‘보수적 관점으로 카이퍼 읽기’
교회를 핍박하는 정부에 저항은 정당한가? 교회를 핍박하는 국가정책에 협조할 수 있는가? 복음만 강조하면서 회피만 하면 되는가? 교회의 정치참여가 어느 때보다 뜨거운 지금 칼빈주의 신학자이자 네덜란드 총리였던 아브라함 카이퍼(사진)의 신학을 조명하는 강좌가 열려 눈길을 끌고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1837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라이덴 대학에서 문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를 설립하였고 반혁명당(ARP:Anti-Revolutionary Party)총재가 되었으며, 네덜란드 정치에 깊이 관여하여 하원의원, 종신상원의원, 총리를 역임했다. 또 가장 영향력 있는 칼빈주의 신학자로서 헤르만 바빙크, 벤저민 워필드와 더불어 세계 3대 칼빈주의 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주장한 일반은총과 하나님의 영역 주권사상은 개혁신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번 강좌를 주최하는 신원균 교수는 “칼빈주의를 따르는 사람들 중에서 진보 좌편향적 세계관을 가지신 분들, 또는 중립적으로 복음만 강조하시는 분들은 내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칼빈주의 역사 속에서 주류 칼빈주의 선조들이 국가관과 문화관에서 어떤 세계관을 지켜왔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칼빈은 죽을 때까지 국가로부터 교회의 치리권 독립을 위해서 싸웠으며, 베자와 낙스는 국가의무력협박에 대해서 목숨을 건 저항을 외쳤고, 네덜란드도 국가적 저항에서 나온 것이 도르트 신조이다”며 “이들은 모두 한결같이 국가가 교회를 돕고 협력할 때는 위정자에 대한 존경과 순종을, 그러나 교회를 위협할 때는 목숨을 걸고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저항을 했다”고 강조했다.
신 교수는 이 번 강좌를 통해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는 국가주의, 복음만 강조하는 회피주의, 제도와 역할은 구별, 그러나 상호협조와 저항권을 인정하는 칼빈주의 두 왕국론을 강의할 계획이다. 신 교수는 “칼빈주의자들 중 많은 사람이 카이퍼의 문화관을 세속주의, 자유주의, 진보좌편향주의를 추구하는 것처럼 사용하는데 이 때문에 좌파 칼빈주의자들이 카이퍼를 가장 즐겨 사용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반 드루넨처럼 카이퍼를 극단적으로 비판하면서 복음만 강조하는 문화회피주의를 선택하는데 이는 둘 다 카이퍼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라며 “카이퍼는 칼빈과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두 왕국론을 가장 잘 확립한 분이다. 그의 문화관은 일반은총과 십계명 안에서 보수적 문화관을 확립한 정통칼빈주의의 입장이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과 정치, 리차드 J. 마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무엇으로부터 구원하는 가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는 모든 창조질서를 죄악이 관영한 세력에서 구조하시기 위해 오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위하여 사람을 구원하는 가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따라 살 때 오는 풍성한 삶을 인간에게 주시기 위해 오셨다.
1. 정치 전도가 정치적 구조, 과정, 정책 등에도 관여해야 하는 이유
첫째, 타락의 죄가 인간의 영혼에서 시작되긴 했지만 그 영향은 우리의 사적 생활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둘째, 우리의 사회와 정치의 모든 문제들이 단순히 개인적인 삶을 바꿈으로써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셋째, 교회의 개인들에 대한 메시지는 사회와 정치 생활의 일반적인 양식들에 대한 비판적 자세에서 실제로 분리될 수가 없다.
넷째, 전도는 전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섯째, 우리는 일반적인 정치와 경제적 풍조들의 영향력도 강조해야 합니다.
정치 전도는 사회와 정치구조와 관계를 가진다.
2. 그리스도인과 정치 : 그릇된 개념들(고후 5:19-20)
구원과 정치
첫째, 하나님은 그의 구속 목적들을 성취하기 위한 방편으로 한 백성을 사용하기로 하셨다(벧전 2:9).
둘째, 하나님의 은총의 승리에 대한 우리의 신실한 증거는 하나님의 임재로 사람들을 인도해야 한다.
이스라엘과 교회
이스라엘은 근본적으로 신정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선지자들이 행정과 전쟁, 빈곤, 경제, 및 여타의 문제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주 지당하였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속 정부 하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에 대해서만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았다(사 45:22).
그들이 할리우드의 성적 문란은 신랄하게 비난했으나, 반면에 정치적 권력의 중심부에서 벌어지는 독직과 타락은 못본 체 했다. 그들이 주일 영업이나 주류판매를 통제하는 입법은 요구했으나 투표권이나 인종차별적인 고용 관행에 대한 정치적 개입은 거부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이 창조되었음을 가르치지 않는 공립학교의 교과서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을 가졌지만 그러한 형상을 가진 인간을 억압하는 공적인 법률이나 조치에 대해서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3. 교회 : 공동체와 정치
교회가 사도적 직무의 기둥이요 교회의 참된 근거가 세상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아는 교회는 단순히 선교에 참여하기보다 교회 그 자체가 선교가 되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살아있는 전달체가 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그것의 공동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열방들에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유형적 집단이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도 한 백성, 즉 그의 주권적이고 선택적인 은총에 의하여 형성된 한 공동체와 관계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국가적 공동체라는 존재 그 자체를 통해 열방의 빛, 즉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집단적 순종의 본보기로 의도되었다.
교회가 내적으로만 개발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적극적인 임무를 가지고 있다. 교회는 세상의 모든 곳의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에 참여하도록 요청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랑스러운 모범 공동체로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그리로 오도록 사람들을 부르시는 변화된 삶을 세상에 나눠주어야 한다.
제임스 구스타프슨은 “교회의 정치적 구조는 ..그것을 통하여 정책이 결정되고 사회적 권력이 행사되는 관계와 행동의 패턴이다. 죄의 타락한 세력이 일대일의 개인적 관계들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사회, 경제, 그리고 정치 생활을 지배하는 조직들과 절차들에도 반영되어 나타난다.
프리만 슬리퍼는 성경적인 권력 개념의 관점에서 본 흑인 권력 개념에 대한 그의 통찰력 있는 연구, 흑인 권력과 그리스도인의 책임에서 이렇게 제안하고 있다. 권력의 왜곡된 형식들은 불신, 지배, 소외 및 그릇된 낙관주의나 성급한 절망 등이 존재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반면 성경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권력의 책임있는 양식들은 신실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신실성은 공동의 책임과 의무, 제도적 조직들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상호 간의 정직을 향상시키는 조직들의 형식과 보존을 위한 자유, 희생적 봉사, 분배 및 상호 간의 지원을 통해 나타나는 사랑 및 미래에 다같이 성장하기 위한 잠재력을 현실적으로 가늠해 주는 소망 등을 내포한다.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정치 영역은 그 자체로 인간의 타락 상태 때문에 도입된 하나님의 필요악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사도 베드로는 신약 교회를 하나의 거룩한 나라로 강론했다(벧전 2:9).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발견하는 큰 나라 속에 존재하는 한 나라로 공존한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사상은 그리스도인들이 요청받는 독특한 생활 양식을 생각나게 해주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4. 교회와 국가(롬 13:1-7, 벧전 2:9-19, 요 17:14-18)
교회는 다른 인간조직체와 병존하는 조직체로서 ”세속“ 인간 정부의 통치하에 존재한다. 로마서 13장이 우리가 어떤 지상 정부에도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 정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공적으로 현 제도와 정책을 비판하고 검토하고 논쟁하고 도전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베드로전서 2:9-17
교회를 구약의 이스라엘과 연관시키고 있다. 베드로가 준 충고의 핵심은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사회의 유대 속에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책무도 기억할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것 같다. 인간 제직들의 긍정적 역할을 인정해야 될 필요성이 강조되어 있으며 정부 관리와 동료 시민들 앞에 비난받을 것이 없어야 할 필요성도 반복적으로 언급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자유가 희생되는 무분별한 굴종, 그리고 우리의 정의와 질서를 증진시키지 못하게 하는 시민 저항의 그릇된 정신 등에서 우리를 구조할 수 있는 한 가지 전망뿐이다. 하나님의 종과 같이 살자. 하나님의 백성은 지상의 국가들 사이에서 독특한 일체 의식을 갖도록 소명되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께 일차적인 충성을 실천하도록 모색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국가사회와 평화적인 관계의 구조가 가능한 관계내에서 이러한 충성을 실천하도록 모색해야 한다.
5.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패턴
사회이론과 교회론 둘 다 기독교의 공동체 이해에 중요하다. 기본적 사회적 유대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인간이 창조된 목적과 연결되며, 교회적 유대에 대한 질문은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된 목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리스도인의 으뜸가는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안전은 어떤 권세도 그에게서 우리를 분리할 수 없는 구주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다.
6. 정치 전도를 위한 전략(엡 4:15-16)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들 자신의 결정에 있어서 도움을 줄 원리들과 지침들을 제공해 주려는 시도를 통해 대개 정치적인 문제들과 관련이 될 때가 있을 것이다. 헨리 피터스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특별히 정치 문제에 관련된 설교 뒤에 모두가 참여하는 토론회를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통일성은 그것의 말씀에 대한 공통적 개방성, 그것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공통적 자발성, 그리고 그것의 말씀 안에서 자유롭고 솔직하면서도 서로를 수용하는 집단적 갈등에 대한 공통적 헌신에 있다.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정치적 개입에 대하여 –그것이 투포를 통해서이든, 아니면 정치나 노동 문제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기 위해 조직된 그리스도인 그룹에의 참여를 통해서 행사되든지-모든 그들의 의견과 방법과 이념과 당파적 헌신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의 조명 아래에서 시험적으로 생각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켜 주어야 하며 그럴 수 있다.
7. 정치 전도 : 그 희망과 긴장(계 22:1, 2)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증거는 우리 각 사람이 가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공동생활 경험에 굳게 뿌리를 박고 있어야 한다.
첫째 우리의 정치적 증거는 우리의 개인적 경험에 뿌리를 박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는 개인적으로 복음이 철저한 능력을 아는 사람들과 구성되어야 한다.
둘째, 우리가 이런 개인적 체험을 한 후, 우리의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평화체험이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다른 사람들과의 회목으로 연결되는 것이 중요하다(요일 3:23; 고후 5:19).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희망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시고 약속하신 것에 굳게 기초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정치적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인격과 사역에 대한 그의 체험에 굳게 뿌리를 박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부정과 고통에 대해 항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단지 그들이 화해와 자유를 체험한 사람들로서 상처와 압박을 직면했을 때 느끼는 심한 아픔 때문이다. 비록 일부 집단들은 단지 어쩔 수 없이 또는 이기적인 이유로, 사회계약에 참여했다 할지라도, 다원적 사회의 존재 자체가 정의와 평화에 대한 공동의 헌신에 기초하고 있다.
셋째,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단편적이라도 정의와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정책들이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그것들을 지지해야 한다는 원칙이 천명되어야 한다. 오스카 쿨만을 원용하자면 우리는 지금 사탕 통치의 중지와 그 나라의 미완성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8. 결론적 성찰(골 1:15-20)
하나님이 우리에게 참여하도록 부르는 곳이 단지 그의 몸된 교회에서 발견되는 공동체 생활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그가 먼저 공개적으로 그의 구속과 화해의 사역을 수행하시는 곳으로 우리를 부르신 후에, 그는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어 그가 비밀스럽고 신비스럽게 그의 목적을 이루어 가는데 협력하게 하신다.
한국 교회와 정치 윤리, 이상원 편저
이상원은 기독교의 정치 참여는 시민 단체, 기독교 정당을 통하여, 그리고 교히의 정치적 입장 표명은 교단등을 통하여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교회는 예배 공동체로서의 고유한 상격을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독일 개신교회의 정치 윤리와 정치 참여, 정종훈
교회와 국가의 상관관계
첫째는 교회가 국가에 대해 적대 관계에 있던 경우이다.
기독교 초청기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면서 로마제국의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평화주의로 수용하면서 군대 복무를 회피하였다. 히틀러 치하에서 고백교회는 독일국가사회주의의 전체성에 항거했고, 인종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교회들은 백인의 우월함을 승인하는 국가에 대하여 변혁을 시도했으며, 해방신학을 견지하는 남미의 바닥 공동체들은 억압과 수탈의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을 추구하였다.
둘째는,국가가 교회에 대해 적대관계에 있던 경우다.
프랑스 혁명의 주도 세력은 자유주의와 계몽주의에 근거해서 교회의 특권층과 함께 교회 자체를 부정하였고,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들의 비참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던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국가들은 교회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비난하였다.
민족사회주의와 독일은 처음에는 교회를 민족의 하부구조로 종속시키고자 했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았을 때는 교회를 말살시키려고 했으며, 저항적인 민족주의의 입장에 있던 제 3세계 국가들은 교회를 제국주의의 하수인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셋째는 교회와 국가가 서로에 대해 호의적인 동반자 관계에 있던 경우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래로 교회와 국가는 기독교 왕국에 도달한 것처럼 적당한 밀월 관계 속에서 서로를 축복했다. 독일에서는 영주의 보호 아래 종교개혁자들과 아우스브룩 종교회의가 결정한 ”영주의 종교를 백성의 종교로 한다“는 합의에 의해 종교적 수장이 된 영주들의 사이에서 왕좌와 제단의 평화로운 동맹을 맺었다.
넷째는 교회와 국가가 각각의 고유한 영역에서 서로 무관한 관계에 있던 경우다.
임박한 종말을 기대했던 초대교회의 미비한 종교적 움직임에 별로 의미를 두지 않았던 로마제국은 서로에 대해 관심을 둘 여지가 없었다. 성과 속을 이분적으로 나누었던 사회에서는 거룩한 교회와 세속적인 국가는 각각의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고 이해했고, 성숙한 민주주의에 도달한 사회에서는 정교분리의 원칙 아래서 교회는 종교적인 영역을 관할해야 하고, 국가는 정치적인 영역을 관할해야 한다는 역할 구분에 도달하고 있다.
다섯째는 교회가 국가에 대해 자신의 긍정적인 책임의 관계를 감당해야 한다고 이해했던 경우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형성된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이 형의를 중심으로 한 에큐메니칼 진영의 교회들은 자신이 속한 국가들에 대해서 책임사회, 정의와 평화의 사회, 창조질서를 보존함으로서 지탱 가능한 사회를 추구해야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독일개신교회의 정치윤리
루터교회의 두 지배론과 개혁교회의 그리스도의 왕적주권론으로 대별하고 있다.
1) 두 지배론
두 지배론과 관련한 루터 진술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아담의 모든 후손들을 두 분류로 분류해야 한다. 즉 한 부류는 하나님의 왕국에 속하며, 다른 한 부류는 세상의 왕국에 속한다. 하나님의 왕국에 속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신앙인이며, 그리스도와 복음에 종속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은 세상의 왕국에 속해 있으며 세상의 법 아래에 있다.
두 왕국은 명백하게 구별되나, 둘 다 하나님께 종속되도록 한 것이 틀림없다. 즉 전자는 신앙을 맺게 하고, 후자는 외부의 평화를 초래하여 악한 행위를 맏아낸다. 루터는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비록 상이한 목적(신앙과 펴오하)을 위해 상이한 수단으로 지배하실지라도 하나님의 왕국과 세상 왕국 모두를 통치하신다는 것,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정의를 행하는 데 있어서 복음의 왕국에 속하지만, 죄악을 범하는 경우에는 법의 왕국에 동시에 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과 세상 법의 왕국은 분리되어도 안되고, 어느 한쪽으로 흡수되어도 안된다는 것을 의도하였다.
2) 그리스도의 왕적 주권론
루터가 두 영역을 너무 분명하게 구별함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이 서로 반대되고 상충되는 것처럼 오해하게 되었던 반면에, 칼빈은 복음과 율법을 긴밀하게 연락하였고, 이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활동을 계시를 통해 연속적으로 이해했다. 칼빈에 의하면 교회는 설교와 성례전의 집레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세속의 통제로부터 자신의 자유를 지킬 수 있어야 했다.
이러한 칼빈의 입장을 따르는 개혁교회는 히틀러 민족사회주의의 전체주의로 인하여 교회의 본질까지 소멸할뻔했던 상황에서 오늘날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왕적 주권론을 형성했다. 당시 교회는 전체주의적인 세속정치에 저항함으로써 국가의 오류룰 제어하고 교회의 자신의 고유한 신앙을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교회와 국가 사이에는 처음부터 긴밀한 관계에 있고, 그 구성원들은 공동체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서 비롯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시민 공동체인 국가의 현존은 세상에서 죄로 타락한 인간을 보호하고 유지하려는 하나님의 은혜의 질서다. 기독교 공동체는 시민 공동체에 대한 무조건적인 부정 또는 긍정을 배제하고 정치 공동체의 최선의 형태(보다 나은 국가)를 위해 기독교인들의 책임을 감당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이처럼 독일의 개혁교회는 그리스도의 왕적 주권론의 정치 윤리에 근거해서 가능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문제들에 개입해서 교회가 직접적인 저항의 노력뿐 아니라 구체적인 대안까지 마련할 만큼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독일개신교회는 성명서나 사회백서 또는 연구서 등의 문제를 통해 정치 참여를 실천하고 있다. 독일개신교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영역의 문제에 입장표명을 하는 이유는 각종 문제를 신앙적인 입장에서 해명하고, 각종 문제에 대한 논점을 진지하게 수용함으로써 문제를 책임 있게 감당하려는 데 있다. 독일개신교회는 2년마다 개최되는 교회의 날 행사를 통해 정치 참여를 실행해 왔다. 1949년 이후 개최한 교회의 날 행사는 제도권 교회가 주도하는 행사라기보다는 오히려 기성교회의 무기력과 용기 부족에 대항하는 평신도들에 대항하는 평신도들에 의해 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와 정치 윤리, 이상원 교수
히딩크 축구로부터 정치 및 경제 공동체 운영의 원리를 찾아내는 일이 가능한 이유는 히딩크 축구 그 자체 안에 네덜란드의 정치, 경제, 사회의 특징들이 깊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경제는 정부와 자본가를 포함하는 경영자들과 노동자들의 철저한 삼자 협의를 통하여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네덜란드는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이면서도 어느 나라보다 빈부의 격차가 크지 않고 거의 모든 국민이 학력, 신분, 직업, 남녀의 차이와 상관없이 평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나라다.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정치 사상은 영역 주권론으로 집약된다. 절대군주제를 비판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국가 권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하였다고 반 프린스터는 비판한다.
반프린스터에 의하면 교회, 학교, 가족은 정부가 담당할 수 없는 기능들을 수행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이 기관들 안에 정부로부터 독립된 이 기관들 안에만 고유한 법이 적용 수 있어야 한다. 이 고유의 법은 곧 하나님의 법이다. 교회와 국가는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 각각은 자기의 영역 안에서 일을 해야 한다.
1858년 학교법의 핵심은 국립학교는 종교가 다른 학생들의 종교적 이념과 배치되는 내용을 가르치거나 행하거나,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정부가 수행할 수 있는 최고의 과제는 언제나 법으로 귀결된다. 로만은 국가가 고유한 법의 영역의 주인으로서 고유한 업부에 충실하는 한 다른 영역들의 주권은 보장된다고 말한다. 로만은 국가는 어린이 교육, 도덕의 함양, 농지개간, 신앙증진에 관여해서는 안된다. 국가가 신앙과 도덕에 대한 관여를 가능한 줄일 때 어느 한 나라의 도덕은 가장 높은 단계에 올라설 수 있다. 선한 도덕으로부터 법이 나오는 것이지 법으로부터 도덕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도이베르트는 인본주의적인 국가론에 대응하여 자기 자신의 독특한 사회계약이론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들을 각각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만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영역주권의 근거로 제시된다. 공적 정의의 한계선을 넘어서게 되면 정부의 결정은 합법성을 상실하고 국가 자체가 권위를 잃게 된다.
하웃즈바르트에 의하면 각각의 삶의 영역의 중심점, 각 영역을 결속시켜 주는 관계의 원천은 인간 권위의 존재가 아니라 이 영역에 독특한 하나님의 규범들의 존재에 있다.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는 정치의 소명을 받은 기독교인들이 교회와는 구분된 시민단체나 기독교정당이라는 별도의 기관을 구성하여 전개되어야 하며, 교회는 예배공동체로서 고유한 성격을 벗어나서는 안된다. 교회는 성도들의 구원과 내적인 덕성의 함양을 위하여 진력해야 하고,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기도하며, 설교와 교육을 통하여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들에 대해 성도들을 바른 기독 시민으로서 살아가도록 양육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정치적인 사안들에 대한 입장을 천명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교회 정치기구인 교단을 통하여 표명하는 일이 옳은 방법이다.
영국 성공회와 청치 윤리: 윌레엄 템플에서 월리엄스까지, 알린M.
1. 윌리엄 템플
첫째 원칙은 개인 각자의 존엄성과 가치이다.
시민들이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그리고 그들에게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를 마련해 주기 위하여 그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야말로 모든 진정한 정치의 최고 목표이다.
둘째, 인간은 자연적으로뿐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사회적인 존재이다.
민주주의는 그 어떤 형태의 구조보다 인간에 대한 기독교적인 개념에 더 많이 일치한다. 민주주의가 원래의 뿌리가 되는 원칙들에 충실한 지를 알 수 있는 세 가지 시금석이 있다. 개인들을 위한 정의를 확립하고자 하는 관심의 깊이,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조심스러운 배려, 개인의 양심에 대한 철저한 존중. 제일 나중의 것이 가장 중요하다. 양심적인 반대자에 대한 존중이 진정한 민주주의이 특징이다.
템플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 그리고 교인과 시민의 관계에 대하여 복잡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 교회와 국가는 사람의 삶이라고 하는 같은 영역을 다룬다. 다만 그 영역과 관련해서 다른 기능을 할 뿐이다. 기독 시민은 모든 사안에 있어서 교회와 국가의 적절한 요구에 대해 응답함으로써 그 삶 전체를 통해 교인과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템플은 자기 만족에 빠지지 않고 슬픔 가운데서 결정을 내리기만 한다면, 매우 불완전하고 죄악된 세상에서 가장 덜 악한 것을 선택하도록 자우 요구받고 잇다는 점을 인정하였는데 이는 올바른 것이었다. 템플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그리고 우리 자신의 모습의 한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게서 죄인인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현대 미국 복음주의 교회와 정치 참여, 신원하
미국 복음주의 교회와 정치 참여
1950년대 이후 칼 헨리를 비롯한 의식있는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서서히 이에 대해 눈을 뜨면서 복음의 사회적 메시지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젊은 지성적 복음주의자들이 이 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했고, 70년대에는 복음주의자들이 공공 광장에 나아와 활발하게 사회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1973년 시카고에서 개최된 사회참여를 위한 복음주의자들 협회로 가시적인 열매를 맺었다.
1. 복음주의 보수 입장
헨리가 강조하는 사회적 책임의 핵심은 그리스도인들이 도덕성을 발휘함으로 자기가 속한 조직과 관계들을 변화해 나가는 것이다. 헨리는 정부를 하나님이 인간의 악을 억제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정의를 세우기 위해 세우신 제도로 이해한다.
복음주의 보수주의 입장은 70년대 이후 미국사회가 문화적으로 이념적으로 다원화되면서 기독교 신앙이 점점 약화됨을 우려하며 신앙의 회복을 외친다. 밈국이 기독교적 가치에 기초하여 세워졌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신앙을 시민생활, 공적생활에서 배제하는 경향을 비판한다. 미국이 연방관료제 강화와 복지 등 정부가 국민생활에 깊이 개입하고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것을 반대한다. 특별히 전통적인 도덕과 윤리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한 구체적인 안이나 정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2. 복음주의 진보입장
헨리의 보수적인 개인적 사회 윤리는 사회에 실제적인 변화를 가져오기에 역부족이라 믿고 이에 불만을 품은 복음주의 학자들이 60년대 후반기에 등장했다. 초창기 주요학자인 모버그 교수는 사회악에 대해 강조하면서 사회악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악을 후원하는 행동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면서 개혁을 위한 강한 행동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3. 급진 좌파 입장
1960년대 중 후반에 젊은 복음주의자들 중에 미국의 기본 사회쳬계와 질서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려고 하는 것은 기존 질서로는 안되고 진정한 성경적인 새로운 질서를 지닌 공동체를 만들어 대안적인 삶을 확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자들이 등장했다. 짐 윌리스, 존 알렉산더 등.
첫째, 급진적 좌파의 입장은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미국의 현상과 정치는 성경이 그리는 질서와는 동떨어진 철저히 부패한 사회이며 그런 제도가 황행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둘째, 이들은 정부가 사회 기금을 모아서 가난한 자들을 비롯한 약한 자들에게 복지혜택을 베풀고 또 새로운 법을 만들어 나가는 일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이것이 궁극적으로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셋째, 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평화주의 이외에는 다른 삶을 살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어떤 경우에도 무력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4. 근본주위 신우파의 입장
1970년대 후반에 제리 포웰과 펫로벗슨을 필두로 영향력있는 텔레비전 전도자들과 목사들은 미국 사회에 만연해 가는 동성애, 포르노, 마약, 이혼, 가장 해체, 낙태 등 비도덕적인 현상을 개탄하면서 이것들은 미국사회가 기독교적인 가치에서 떠나 인본주의와 세속화에 물든 결과라고 진단하고 이 현상은 결국 미국을 망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교육제도 중에서도 공립학교에서 금지한 기도 모임을 종교적 자유 옹호라는 차원에서도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기독교 정신에 의한 사립학교들을 많이 만들어 자녀들을 보호하고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근본주의 신우파들은 역시 철저한 애국주의에 기초하고 있고 또 미국은 선택된 나라라는 관점에서 여러 가지 문제에 접근한다.
둘째, 이들은 국내정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로서의 정부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정부가 그 권력을 과도하게 갖고 그 힘의 범위를 넓히는 것은 반대한다.
셋째, 국제 관계에 있어서 정부는 세계에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소련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아야 하고 이를 위해 강력한 국방쳬계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 정치와 복지한국의 미래, 고세훈
근대 복지국가는 자본주의적 산업화를 진행하면서, 과거의 대표적인 복지제도들이 소멸하고 국가가 그 역할을 떠맡은 데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정의를 말할 때 두 가지 개념을 말한다. 하나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 행위에 대한 보상과 처벌을 동반하는 응보적 정의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 내의 자원 배부느이 자원 본배의 적절성을 추구하는 분배적 정의이다.
한국교회와 시민정치, 박득훈
한국의 경우 시민사회의 진정한 태동은 1987년 민주 항쟁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큰 의이가 없을 것이다.
정교분리 원칙에 대한 그릇된 이해
대한민국 현행 헌법 제 20조는 ①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와 ②국교는 인정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정교 분리원칙의 헌법적 선언의 원조는 일반적으로 미국헌법 수정 제 1조에서 찾는다. 의회는 국교의 수립에 관한 혹은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할 수 없다.
기독교 세계관은 아브람 카이퍼가 주장한 것처럼 인간의 전 실존이 신 의식에 젖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정치, 경제를 포함하여 인간의 삶의 모든 분야에 신앙이 스며들어야 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 세계의 주권자이시다(시 33:13-15). 이렇게 볼 때 불신자들이 같아 어우러져 사는 사회 속에서 정의로운 정치활동을 펼쳐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쉐이퍼가 잘 지적했듯이 모든 시민정부는 하나님의 법 아래에 있으므로 만약 그 법을 어기면 그의 몫은 박탈당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시민은 불북종할 권리가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구원은 단순히 영혼의 구원이 아니다. 이는 구원이 하나님의 나라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사 52:7; 10:24-26). 예수님 자신도 구원을 하나님의 나라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눅 18:24-27). 당연히 하나님의 통치 영역은 정치적 영역까지도 포함한다.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정치의 장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특히 그 영역에 부르심을 받아 정치의 은사를 갖게 된 사람은 전문적인 정치인으로 나서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노예제도에 대해 원칙적인 동의를 했는가이다. 엡 6:5-9에 나타난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 대한 비울의 권면을 주목해 보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인과 노예가 동등한 존재임을 알리면서 서로 귀하게 여길 것을 명하고 있다.
리차드 니이버, 다섯 가지 이상형, 문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 문화를 지키는 그리스도, 문화 위에 서 있는 그리스도, 문화와 역설적인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 문화를 변혁시키는 그리스도. 맨 마지막이 가장 바람직함
한국의 천민자본주의와 기독교,백종국
외환위기를 보는 기독교의 태도
이원론적 사고. 외환위기를 세속의 문제로 간주하고 교회는 여전히 개이느이 구원에 몰두해야 생각하는 태도
외환위기를 한국인의 종교적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판단하고 종교적 행위에의 몰임을 더욱 부추기는 태도
사회적 위기를 교회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로 파악하고 교회의 회개와 반성, 그리고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더욱 깡하게 하려는 복음주의적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참여와 방향과 강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느나, 인류의 역사와 삶의 모든 영역이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 놓여있다고 믿고 교회개혁과 시민 운동을 함께 주도한 정통 칼빈주의자들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루터주의는 교회적 신학적 성격에 한정되어 있는 데 비해서, 칼빈주의는 그 특징을 교회 안팎으로, 즉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다(정성구).
천민자본주의의 특징은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정치적 상업적 독정의 추구와 계층화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체재의 정치, 경제적 형태를 의미한다.
둘째는 독점을 통한 불로소득의 추가다. 이 체재의 현실적 목표를 의미한다.
셋째는 독점을 가능하게 하는 부정 부패의 범람을 들 수 있다. 이는 체재의 운영방식이다.
넷째는 불로소득의 과시적 소비다. 어떤 체제 내의 권위를 수립하는 방식으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부분이다.
한국 경제 | 한국교회 | |
발전주체 | 재벌 중심 | 대형교회 중심 |
채무구조 | 차입경영 고정자산의 과대투자 |
차입경영 건물증축, 건물 유지지 증대 |
발전모형 | 외형중심 문어발식 경영 |
외형중심 교인의 수평이동 |
핵심문제 | 기술 낙후, 소프트웨어 낙후 고비용/저효율 |
내실부족, 소프트 웨어 낙후 인건비 과다지출 |
상호협조 | 기업간 과다경쟁 | 교단간 과다경쟁 개교회 중심 |
효율성 | 중복투자로 비효율성 | 중복사업으로 비효율성 |
자립도 | 중소기업의 미자립 | 중소교회의 미자립 |
이상에서 우리는 한국 기독교가 어떻게 천민자본주의적 체재에 부화뇌동하였는가를 살펴보았다. 사제주의, 물량주의, 반지성주의로 요약되는 한국 기독교의 성향은 그 내용을 놓고 볼 때 기독교가 추구하는 바가 아니었다.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 김충림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배반하였기 때문에 2545년이란 긴 세월 동안 나라 없는 민족으로 방황하였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해서 기독교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종교가 아니고 그들의 종교는 유대교에 머무르게 되었다.
초대교회의 신학자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신의 도성에서 크리스천은 신의 도성이 상징적 지상 기관인 교회에 속해 있으며, 동시에 지상의 도성인 국가에 속해 살고 있다고 하였다. 또 중세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크리스천은 영적인 정부와 세속적인 정부(국가 기관), 두 정부 밑에서 살고 있다고 하였다. 크리스천의 영적인 왕국(교회)의 시민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왕국(국가)의 시민으로서 두 종류의 시민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이러한 견해는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다.
조지아 하크네스, 그의 저서 기독교 윤리에서 크리스천은 네 가지 점에서 일반시민과 다른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첫째, 국가는 국가의 권위와 힘을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것으로 간주하는 반면, 크리스천은 오직 하나님의 권위와 함을 최고의 것으로 생각한다.
둘째, 국가의 주요 관심사는 한 국가 공동체인 반면, 크리스천의 관심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과 세계 공동체에 있다.
셋째, 국가는 도덕적으로 정의와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반면, 크리스천은 하나님과 그의 동료들에 대한 사랑을 최우선으로 한다.
넷째, 국가는 국가의 권위를 위하여 강제력을 사용하지만, 크리스천은 정당하고 필요한 경우 강제력을 인정하나 그렇지 않을 경우 그의 양심은 강제력 사용을 반대한다.
1. 교회와 국가 관계의 역사적 고찰
1) 초대교회와 국가의 관계
초대교인들은 신앙과 선교의 지유를 억압하는 로마정부로부터 박해를 당하고 순교를 당하는 것이 오히려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초대교회의 절대 초석인 절대 유일신 신앙과 메시야 사상은 초대교회로 하여금 반기독교적 로마 정부와 타협할 수 없게 만들었다.
2) 중세교회와 국가의 관계
교회가 지상의 모든 지배권과 통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은 교회가 통치한다는 신념에서 “교회는 실제적 국가요 세속적 국가는 교회의 기관이다. 따라서 국가는 전적으로 교회권에 복종해야 한다.
3) 종교개혁시대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
교황의 세력이 약화되자 유럽 각 나라의 통치자들은 민주주의와 국가주의를 내세우며 교횡청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개혁자들은 두 왕국의 개념과 게약 사상에 근거하여 정교의 분리와 교회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의 국가관은 로마서 13장에 따라 국가는 신이 주신 제한된 권세 안에서 죄를 벌할 권한과 질서를 유지할 권한을 가지고 있고, 국가의 목적은 법 질서를 지키며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자는 국가에 복종할 의무가 있으며 그 의무가 때로는 자연법에 위배된다고 느껴질 경우라도 불복종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국가가 분명히 신에게 불복종할 경우 신자는 국가에 복종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속 통치기관에 대하여 저항을 피하고 불의를 감수하는 소극적 자세를 취하지 말고 비판과 봉사를 통한 적극적 참여를 권장하였다.
요한 칼빈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계약 백성으로 그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순복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하나님의 주권과 계약 사상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 영적인 정부(교회)와 세속적인 정부(국가) 두 정부가 있는데 둘 다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하였다.
세속적 정부는 두 가지 목적과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참된 종교를 보호하고 하나님의 의를 증진시키는 일이요, 둘째는 백성의 사회복지를 도모하고 증진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세속적 정부의 통치자와 공직자들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의를 증진시키는 일과 백성들의 복지를 도모하는 일이 자기의 사명임을 겸허하게 인식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에 의하여 세움을 받은 정당한 정부의 통치하에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라 가르쳤다.
그는 로마서 13:5과 베드로전서 2:12-14, 디도서 3:1에 근거하여 정부의 공직자들을 존경하되 통치자에게 순종하는데 조건과 예외가 있다고 하였다. 만약 공직자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명령을 내릴 경우 그리스도인은 그 명령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만약 통치자가 독재자가 되어 포악하고 발자하게 되어 백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를 자행할 경우, 공직자들은 포악한 통치자에게 항거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4) 현대교회와 국가의 관계
① 현대 신학자들의 국가관
현대 개신교회의 대다수의 신학자들은 로마서 13장과 개혁자들의 국가관에 따르면서 현실 국가는 신이 세워주신 제도로 인정을 하나 죄적인 제도로 보고 있다.
② 미국 교회의 국가관
정교분리의 원리가 1789년에 채택되어 미국헌볍에 명시되었는데 ”의회는 종교를 설립하는 법을 만들 수 없으며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를 금하는 법도 만들 수 없다. 공직자에 대한 자격으로 종교적인 심사를 요구할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노예제도 문제는 교회의 태도에 변화를 초래했다. 교회가 노예제도 폐지를 위한 입법 활동을 벌이며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20세기 중엽부터는 교회가 정치, 경메 문제에 더욱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미국 NCC는 정교 분리의 전통을 거부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직접적인 참여를 격려했다.
라운은 그의 저서 교회와 국가에서 교회의 정치 참여를 세 가지로 제시했다.
첫째, 교회가 정치적인 영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법은 제안된 정치에 대한 입장을 공식 선언 발표하는 것이다.
둘째, 보다 직접적인 방법은 구체적인 입법 제안을 하거나 또는 지지하는 것이다.
셋째, 제안된 입법에 책임있는 사람들과 공식 또는 비공식적인 회의를 가지는 것이다.
③ 공산주의와 국가의 관계
공산주의는 고대 희합사회 때부터 있었으며 심지어 초대교회 때도 있었다. 그 당시의 공산주의는 유물주의도 반종교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에 유행한 공산주의를 반신적이고 반 종교적이고 반개인주의적이었으며, 그러한 원칙 아래 국가를 건설하여 공적으로 종교와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본회퍼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죽음을 이기시는 기적으로 나타나시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명령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하나는 교회, 다른 하나는 국가의 형태로 나타나는 바 이는 필연적이다. 교회와 국가는 상호간에 존중하고 서로 견제하는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관계이고 국가가 교회 위에 군림해서는 안된다.
2. 교회와 정치에 관한 성경적 고찰
1) 구약 성서의 교회와 정치
구약 성서의 통치 형태는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신권 통치와 왕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스리는 왕정체재로 나눌 수 있다.
2) 선지자의 사명
선지자의 첫째 사명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고 우상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둘째 사명은 부정직한 사회, 정치적 부정부패와 도덕적 퇴폐에 분개하여 율법을 준수하도록 선포하는 것이다.
셋째로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방탕한 왕에게는 항거하고 정직하고 정의로운 왕은 지원하고 독려하는 것이었다.
3) 신약 성서의 교회와 정치
첫째, 예수께서 역사 속에 들어오심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새롭고 최종적인 행위로서, 새 언약은 더 이상 히브리 민족만을 위한 언약이 아니고 전 세계 인류를 위한 언약으로 바뀌었다.
둘째, 예수가 태어나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정치적으로 무기력하였고,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외국의 왕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비록 이방인이나 다른 나라의 왕이 자신을 지배하고 다스릴지라도 그 통치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통치하는 것으로 믿었다.
셋째, 새로운 기독교 사회를 형성함에 따라 서로 다른 광범위한 문화와 배경을 가진 샤람을 받아들이게 되어 새로운 사회적 책임을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언약은 혈연과 지연과 할례가 히브리 공동체를 하나로 연결시켰으나, 신약의 새언약은 히브리인뿐 아니라 누구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공동체 구성원으로 연결시키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첫째, 가난한 자, 압제 받는 자, 갇힌 자, 장애자를 도와야 한다(눅 4:18).
둘째,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누룩의 역할을 통하여 개인의 삶과 사회에 영향을 끼쳐 변화시켜야 한다.
셋째, 마지막으로 선교명령을 완수해야 하는 나라임을 선포하였다.
황금률은 산상수훈의 요약이다. 황금률은 개인에게 하신 말씀이지 정부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다. 정부는 하나님이 범죄를 권력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만든 기관이다.
신약 시대의 경제원칙은 첫째, 사람의 소유물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써야 한다는 청지기직 태도이다. 둘째 신약에서 추가되는 교훈은 하나님이 맡기신 위탁물 관리는 어떤 규정에 따라 성실히 유지되어야 한다. 셋째, 청지기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소유물을 가지고 행하는 일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
이에 대해 프란시스 쉐퍼는 ‘하나님은 삶을 지배하시는 분이시 때문에 세상의 황제의 수준으로 떨어뜨려 비교할 수 없고 황제는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인간의 삶을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나누는 것으로, 오늘날 일반적인 정교분리를 의미한다는 견해이다. 정교분리는 서로 독립적이고 분리되었으나 서로 존경하며 서로 간섭하거나 방해를 놓지 않는 관계를 의미한다(마 10:18 :16:11 ; 눅 12:49). 올바르지 못한 정치 권력에 대해서는 불복종 또는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13장 1, 2절에서 바울은 로마 국가의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속한 사회 또는 권력에 대하여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하여 가장 명확하게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바울은 정치 지도자들이 하나님에 의해 임명되었고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임명받았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복종하라고 요구하였다. 세상 통치자들은 선한 것을 장려하는 적극적인 이무와 악한 것을 벌하는 소극적인 의무가 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세상 권위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권력이 하나님의 법도에 합당하지 않고 불의를 행할 때 그리스도인은 야합하거나 굴종할 것이 아니라, 적법한 절차를 거쳐 불의한 세력을 개혁해야 한다. 정당한 정의와 권위에 대하여 복종해야 하는 만큼 불의한 정부나 권위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베드로전서 2:11-17절에서 베드로는 국가나 정부가 하나님이 정한 제도라기보다는 인간이 세운 제도로 보았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도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 이유는 이와 같은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국가를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으로 생각하는데 반해 요한계시록은 국가를 사탄이 세운 악한 도구로 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정부나 황제에 대하여 숭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4) 구약과 신약 정치의 차이점
신약의 정치가 하나님의 정치라는 점에서는 구약과 동일하다. 단지 대상이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우주를 대상으로 전 인류를 구원하다는 데 큰 차이가 있다. 구약의 정치는 이스라엘 민족을 창대하게 하는 것이었으나, 신약의 정치는 인간 사회의 정의와 자유, 평화와 평등이 그득한 가운데서 그 존엄과 행복을 추구하는데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구약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수직관계를 중시한 반면, 신약의 정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수평적 관계를 수직관계와 동등하게 취급하여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 구약의 정치와 다르다.
3. 한국 기독교와 정치에 관한 역사적 고찰
제 1단계 1884-1919년/ 기독교가 일본 제국의 압제 하에서 민족의 운명 개척에 적극참여한 항일민족 운동 시대
제 2단계 1929-1935년/기독교가 민족 광복을 위한 항일 투쟁의 주 무대에서 이탈하여 계몽 사업에 전념한 시대
제 3단계 1936-1945년/일제에 굴복한 치욕과 수난의 시대
제 4단계 1945-1970년/기독교의 양적 팽창 시대
제 5단계 1970-1989년/민권회복과 민족 발전을 위한 적극적 현실 참여시대
제 6단계 1990-1999년/기독교의 성장 침체기
한일합병 시대에 선교사들은 교인들이 전도 운동보다 항일민족 운동에 열을 올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강조함, 계몽 운동으로 전환
1935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라는 수모를 겪게 됨
한국 기독교는 일제하에서의 신사참배 이후 이 00 정권을 거쳐 5.16군사정권에 이르기까지 정치 권력에 맹종하는 것이 하나의 생리가 되어 비 기독교인들로부터 위선자라는 오해를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비난 속에 기독교가 해방 후 처음으로 1965년에 굴욕 외교를 반대하는 야당, 학생과 더불어 한일협정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1969년 3선개헌 반대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반대함으로 한국교회의 불협화음을 노출시켰다.
독재정권에 대하여 정치적 비판을 가하였던 기독교의 비판세력은 한국 기독고 협의회(NCC)를 중심으로 한 진보적 에큐메니칼 그룹에 불과했다.
유신후 1년만인 1974년 11월 신학자 목회자 66명이 발표한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설명은 현 시국을 세 가지 관점에서 예의주시할 것을 천명하였다.
권력이 그 한계를 알고 정의를 위해 행사되고 있는가?
하나님에게 속한 인간의 기본권이 보장되고 있는가? 이에 대하여 질문하고 철저히 부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1. 교회와 국가는 둘 다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으로, 둘의 관계는 적대적이 아니다.
2. 국가는 일방적 지배가 아닌 국민과의 계약에 의한 봉사를 해야 한다. 따라서 국가가 약속을 저버릴 때 교회는 순교의 각오로 이에 대항해야 한다.
3. 선교의 영역은 인간 생활 전 영역이며, 특히 교회는 가난한 자, 눌린 자, 갇힌 자의 해방을 위해 관심을 집중시켜야 한다.
4. 진정한 반공이란 국민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고 저으이로운 사회질서가 세워질 대 가능하다.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의 성명
첫째, 국가는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 아래서 국민복지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조건적 권위를 위임받았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는 성서 말씀은 이러한 정치권력의 한계와 정당성을 전제하고 있다.
둘째, 국가의 조건적 권위란 ”하나님 앞에서 그 권세가 합법적으로 설립되었는가, 국민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노력하는가, 인권을 옹호하는가,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셋째, 그러므로 그 권세가 본래의 한계를 넘어설 때,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의 대변자로서 이를 비판 대항해야 한다.
넷째, 정교분리의 원칙이란 정교야합을 막기 위한 것이지 정권이 무엇을 하든 종교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섯째, 하나님이 선교는 영적구원과 사회적 구원을 구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교는 모든 잘못된 사회제도와 조직 속에서 인간을 참된 인간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종교 주도권 선정정치는 종교를 타락시키는 악마의 도구라고 비난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분리원칙을 의식하면서도 정치 주도형으로 되어간 사례는 제 4세기의 콘스탄틴 황제와 그의 아들들의 통치, 비잔틴 제국의 황제들의 정치, 16세기 헨리 8세와 왕국이 수장령, 18세기 프랑스 혁명 이후의 나플레옹 정치, 그리고 19세기 독일의 문화 투쟁과 프러시아 왕구그이 종교법 등을 들 수 있다.
헨리 8세의 전제정치를 이론적으로 지지한 토마스 홉스의 계약론은 군왕 전제주의를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즉 국민의 통치 권력을 왕에게 일단 위임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권력을 국민이 도로 회수할 수 없고, 왕의 권력은 신설불가침이라고 주장하였다.
바로 이때에 정교 분리를 요구하는 자들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최초로 정교분리를 주장한 사람은 캠브리지 대학교수인 토마스 카트라이트였다. 그는 1569년 영국 국교회가 감독제를 고수하는데 반발하고 교회에서 장로를 선출하는 종교개혁을 부르짖으면서 정교분리를 주장하였다. 다음으로는 1581년 로버트 브라운 목사가 회중교회를 설립하고 교회의 중앙집권과 국왕 통치를 반대하고 교회의 완전 독립을 주장하였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영국 교회에 장로주의 바람이 불면서 최초로 민주주의 제도가 선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정교분리
엄격한 분리, 이원론-보수 교단의 주장
협의의 정교분리-개신교, 천주교의 입장
중립론
조절론
벤네트는 미국의 정교분리의 장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첫째, 공인된 국교 체재에서는 실현되기 어려운 종교의 완전한 자유를 보장한다.
둘째, 민주적 절차가 아닌 방법으로 국가를 통제하려는 교회의 잘못을 제거할 수 있다. 즉 공인된 종교(국교)가 신앙에 관한 문제를 정부의 힘을 이용하여 다른 교파를 불리하게 만들거나 종교의 자유를 방해할 수 없다.
셋째, 교회의 자립이 보장된다고 하였다.
국가 권력과 교회는 다음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평화적 공존을 이룩할 수 있다고 본다.
1. 국가와 교회의 절대적 분리는 있을 수 없다. 국가와 사회는 교회의 복음 전파의 대상이며 하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할 생활의 영역이다.
2. 국가 권력은 교회의 외침과 교훈에 귀를 기울이고, 교회는 국가 권력의 권위를 인정하고 비판에 앞서서 협조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3, 국가의 권세를 잡은 자들은 그들의 권세가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봉사하여야 한다. 이들이 하나님 자리에 앉으려 하거나 권세의 합게를 넘어서서 위탁받은 기능을 이탈하고 외도를 한다면, 교회와의 충돌은 필연적이다
4. 교회가 교회의 영역이 아닌 정치 문제에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특별히 압력 단체로서 정치를 지배하려 하거나 영향을 주려 한다면 충돌은 불가피하다.
5. 교회 지도자가 국가 권력에 야합하여 국가의 기능을 옹호하며 절대화시키거나 교회를 부패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6. 성서의 가르침과 하나님의 뜻에 맞는 새로운 신학을 정립하여, 교회가 국가 발전에 기여하고 봉사하는 지침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교회의 복종과 저항
크리스천들의 정치적 저항의 근거는 바로 인간의 정치적 권력은 그 책임을 하나님께 묻는다는 근거에 있으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즉 인간의 복종을 요구할 수 있는 정권과 법은 바로 인간을 존중하며 인간성을 높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정치적 명령은 바로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며, 하나님의 정치적 명령은 인간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정치 사회를 성립시키는 일에 참여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정치 권력자가 본연의 의무를 배반하고 기독교를 탄압할 경우 크리스천은 그리스도에 복종하기 위하여 정치 권력에 항거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기독교는 첫째로 정치적 권위를 존경하면서 잘못을 시정하고 탄압을 멈추도록 후소할 수 있다.
둘째로는 이러한 호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에는 교인들에게 호소하여 교인들만이라도 교회의 정신에 일치하는 방향으로 정치적 권위에 봉사하도록 교인들을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셋째로는 이러한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에는 항거할 수밖에 없다.
토마스 제퍼슨은 “폭군에 대한 항거가 하나님에 대한 복종이다”라고 하였고, 왕의 선한 신하이지만 그러나 먼저 하나님이 선한 신하라는 말음 모두 크리스천의 저항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말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저항
1.루터의 견해
세속권이 옳게 쓰여질 때 그리스도인들은 자발적으로 그리고 더 높은 내적 사랑의 동기에서부터 세속권의 요구에 복종하지만, 세속권이 신앙과 내적 생활을 침해하려 할 때에는 결코 복종할 수 없다고 했다. 로마서 13장 1절과 베드로전서 2:13절에 언급된 통치권에 대한 복종은 외적 사항들에게만 해당된다고 했다.
2. 칼빈 견해
폭군들의 명령과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해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칼빈은 정치적 혁명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날 수 있음을 시인했다. 그렇다고 하여 국가에 대한 칼빈의 태도가 비판적이거나 혁명적인 것에 그친 것은 결코 아니고 하나님이 포괄적인 주권 사상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주권과 통치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와 정치 모든 영역에 구체적으로 실현되기를 원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추구했었다.
3. 존 낙스의 견해
존 낙스는 단호한 입장을 지지한다. 일반 시민도 정부의 관리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행위를 요구할 경우에는 불복종함은 물론 저항을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하였다.
비록 악한 정부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 정부의 공무원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 그리고 지배자나 왕은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통제되고 제한을 받는다고 하였다.
한국교회의 저항과 순종
맹용길 교수는 한국교회의 저항과 순종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교회는 정치적 항거를 할 수 있고 정치적 문제를 생존의 차원에서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의 정치적 항거는 저항과 무저항으로 나눌 수 있으니 모든 저항은 항거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정치적 항거에 폭력을 사용할 수 없고 비폭력적 저항만이 교회의 입장이다.
교회는 최후 순단이 아니면서도 국제적 분쟁이나 전쟁이 참가하게 될 경우, 자국의 방어라는 측면에서 참가하게 되며 절대적 평화론을 제거해야 한다.
교회가 최후의 수단으로 폭력적 방법을 사용하기보다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며 최후의 수단도 평화론에 근거한 사고와 실천을 가능케 하고, 폭력적 수단 사용을 정당화하면서도 이를 최소화하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
교회가 폭력을 생각할 경우에는 언제나 교회가 본래부터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생소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교회는 항상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고 사랑과 봉사로써 실천하여야 한다. 교회는 선으로 악을 이기고 대항이나 저항에 앞서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여 불의를 허용하지 않는 창조적 노력이 필요하다.
교회가 정치적 항거를 수용할 때는 항상 생존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것은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는다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교회는 정치적 항거를 통하여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것을 더 먼저 구하여 할 것이다.
교회가 정치적 항거를 함으로 인해 또 다른 폭력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게 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교회는 정체적 문제에 무관심하지 말고,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상황 처리하는 일로써 다루어야 한다.
진보 보수 기독교인, 칼 트루먼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일차적인 이유는, 미국에서 복음주의 교회가 보수적 정당 정치와 기독교적 충성을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시킴으로써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를 등지는 위험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나의 확신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변증가들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뛰어난 시민이 되어야 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시민으로 살아가는 데에 영향을 주는 전체 문제들에 대ㅔ해 잘 알고 사려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 책은 두 가지 사실을 배경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첫째, 내가 우파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고 정치적으로 중간 입장으로 이동했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상황에서 중간입장이란 미국인에게는 좌파이여, 우고 차베스(베네술라 대통령)에게는 우파의 입장입니다.
둘째, 우파든 좌파든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기독교적 입장과 동일시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 에서 문제가 많다는 것입니다.
영국 사람이 볼 때, 미국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 중의 하나는 정치가 대부분 너무나 종교적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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