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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에서 신앙생할 어떻게 할 것인가?(룻기 1:19-22), 김덕선 목사

by liefd 2026.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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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는 영적으로 암울한 시대에 살았던 한 가정의 몰락과 회복의 이야기입니다. 룻기의 시대적 배경은 사사 시대의 영적인 침체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삶의 목적을 상실한 채 각자 자기의 소견대로 행하고 있었습니다. 룻기 1 1절은 이렇게 진행됩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그 땅이 어디일까요?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베들레헴은 누가 탄생한 곳일까요? 예수님이 탄생한 곳입니다. 베들레헴은 라헬이 베냐민을 낳고 장사된 곳입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란 의미인데 바로 그곳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흉년은 자연재해로 인해 생기는 경우보다는 대부분 하나님의 징계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베들레헴에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자기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모압 지방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입니다. 말론과 기룐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입니다. 베들레헴과 에브랏은 다른 지명일까요? 같은 지명인데 에브랏은 베들레헴의 옛 지명입니다. 엘리멜렉의 가정은 신앙의 가정입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신앙의 진가를 발휘해야 합니다.

 

 

가정이 위기상황에 처할 때 신앙 안에서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합니다.

 

위기상활에 처할 때 상황을 분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감정의 상태도 점검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충분히 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파생되는 결과는 가족 전체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위기 상황에서 판단이 흐려질 때가 종종 있기 때문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잘 살려고 하다가 믿음에서 멀어지면 안됩니다. 하나님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위험합니다.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을 버리면 안됩니다. 그러면 금방은 해결될 것 같지만 조금 지나면 더 큰 어려움이 온다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멜렉의 가정이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해서 모압 땅으로 간 것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압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우상을 섬기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오미의 가족들은 그곳에 가면 혹시 양식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이민을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생계의 위협 때문에 갔지만 거기서 과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있을까요? 때로는 우리가 직면하기 보다는 피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도피는 오히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듭니다.

 

신자는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제일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곳인가? 점검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순간이 선택이 아니라 영원한 선택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운 시기를 맞았지만 그대로 잘 견뎌냈습니다. 엘리멜렉의 가정은 부유했을까요, 가난했을까요? 룻기 1 21절에 보면 엘리멜렉의 가정은 부자였습니다.

 

엘리멜렉의 가정이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간 것은 신앙적인 선택이 아니라 현실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멜렉의 가정에 불행한 일들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모압 땅에서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때라도 나오미는 자녀들과 함께 베들레헴 땅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계속 거기서 머물렀습니다. 나오미는 두 아들이 믿음의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상황이 점점 더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을 점점 더 멀리하게 됩니다.

 

두 아들들은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모압 여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은 오르바요,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룻이었습니다. 그런데 룻의 남편은 누구일까요? 룻기 4 10절에 보면 말룐입니다. 두 아들이 장가간 시점은 나오미 가정이 모압 땅에 거주한지 10년쯤 되던 해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었습니다. 결혼은 했지만 자녀가 태어나지 않았는데 두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나오미 가정에 이제는 세 과부만 남았습니다. 누가 가장 많은 것을 잃었을까요? 당연히 나오미였습니다. 나오미는 너무 외롭고 산다는 것 자체가 힘들고 심지어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오미는 두 며느리들에게 사랑과 관대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당신은 가정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애서 삶을 재편성해야 합니다.

 

룻기 1 6절에 보면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습니다. 나오미는 유다에서 양식을 주셨다는 사실보다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는 것에 마음에 더 끌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을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이때 두 며느리의 마음도 복잡했을 것입니다. 시어머니를 따라 가야 되나, 친정으로 가야 되냐? 차마 먼저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오미도 두 며느리를 볼 때마다 마음이 복잡합니다. 두 며느리의 장래가 걱정이 됩니다. 그동안 고생만 하고 남편을 잃은 그들을 바라볼 때 마음이 찡합니다. 고향에 돌아가더라도 자신이 그들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생각에 그들을 보내주어야 한다는 마음을 굳히게 됩니다. 그래서 고민고민하다가 어렵게 말을 꺼냅니다.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깨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좋은 남편을 허락해 주셔서 위로를 받으면서 살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향한 마음이 따뜻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시어머니는 두 며느리를 향하여 너희들이 우리 집 안에 들어와서 두 아들이 다 죽었다고 우리 가정을 망치러 들어왔냐고 소리쳤다면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나오미는 자신들의 남편과 나오미에게 너무 잘 해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다 갚아주시기를 원한다고 축복합니다. 가정에서 우리는 어려운 일이 겪을 때 서로 격려하고 축복하는 것이 신자의 가정에 꼭 필요합니다.

 

두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의 위로의 말씀을 감동을 받습니다. 그들이 나오미에게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내가 고향에 가서 너희들을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토로합니다. 설령 내가 재혼을 해서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자라기를 어떻게 기다릴 수가 있느냐? 그렇다고 아직 한참인데 남편없이 살아가겠느냐?고 반문합니다.

 

13절 하반절의 말씀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다고 말합니다. 나오미는 지금까지 불행했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다고 받아들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이런 일, 저련 일을 겪게 되는데 나오미가 주님의 손이 나를 치셨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오버하는 것 아닐까요?

 

그러나 우리가 이해할 수는 없어도 모든 것을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떠한 위기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낫게 해주신다는 기대를 갖게 됩니다.

 

히브리서 12 11절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호세아 6 1절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두 며느리들 가운데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고 모압 땅으로 돌아갑니다. 오르바는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사람들의 기억속에 사라지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선택은 앞으로 우리가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나오미가 룻을 향하여 너도 네 동서처럼 모압의 백성과 신들에게 돌아가려고 권면합니다. 나오미의 권면은 며느리들의 장래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신앙을 버리고라도 인생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더 나은 것처럼 말을 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룻은 단호한 입장을 보입니다.

 

어머니 나로 하여금 어머니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강권하지 마십시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깨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입니다.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룻은 베들레헴에 가서 한번 살아보고 정 힘들면 돌아가겠다는 여지를 남기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내가 죽어도 거기서 죽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상황에 따라서 늘 변할 수 있다는 여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고 뼈를 묻겠다는 심정으로 주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올바른 선택, 믿음의 선택이 필요합니다.

 

룻은 짧은 기간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슬픈 일들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녀는 시아버지의 죽음과 남편의 죽음, 시아주버님의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해 불평하는 시모 나오미도 보았습니다. 친가로 돌아가는 오르바의 좋지 못한 일, 자신도 집으로 돌아가 부모와 함께 살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에도 불구하고, 이 젊은 과부는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신명기 233절에 보면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룻이 극복해야 할 가장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은혜는 그것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룻이 베들레헴으로 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 모압 땅에서 누릴 수 았는 많은 것을 포기할 각오를 했다는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가까이 왔을 때에 동네 사람들이 떠들며 이르기를 이 사람이 누군가? 나오미가 아닌가? 나오미란 이름의 뜻은 희락입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대신이 나를 '마라'라 부르십시오. '마라'란 괴로움이란 뜻입니다.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습니다.

 

내가 모압으로 이민 갈 때에 풍족하여 나갔는데 하나님께서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징벌하셨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나오미는 동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신세를 타령하거나 저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징계하신 것으로 인정합니다. 자신의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간섭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비참함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찾았습니다(1:21). 나오미는 잃어버린 상실과 고통의 세월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했습니다. 여호와란 약속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전능자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최악에서 최선을 끌어내시는 하나님이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가정의 문제를 서로의 잘못에서 찾지 말고 하나님의 관계속에서 찾아갈 때 생각지 않게 문제가 풀리게 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셉은 자신을 애굽의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50 20절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창세기 45 24절에서 요셉이 자신의 형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형들을 돌려보내면서 이렇게 당부합니다.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마십시오.

 

형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이 살아있다는 말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이 돌아가는 길에 요셉을 판 것에 대해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질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 책임을 추궁하기 보다는 자신이 책임을 지고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족 공동체는 섭섭한 것을 추구하기 보다는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마음을 같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정에서 신앙생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명기 6 4-9절에 보면 부모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먼저 부모의 마음에 새기고 이것이 최고의 가치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이든지 이 말씀을 강론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말씀을 자극을 받을 수 있도록 눈에 보이는 곳에 띄게 해야 합니다. 세상의 영상이 자녀들의 마음을 장악하기 전에 말씀의 영상들이 자녀의 마음을 차지해야 합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계속 받으면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눈을 의식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39 9절입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부모가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축복 기도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위하여 축복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삭은 야곱을 위하여 축복기도합니다. 야곱은 열 두 아들을 위하여,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위하여 축복 기도를 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약속의 유산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이삭은 야곱에게, 야곱은 요셉에게 신앙적인 유산을 물려주는 것을 가장 귀하게 여깁니다.

 

나오미의 가정은 몰락한 것 같지만 며느리 룻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룻이 나중에 보아스와 결혼함으로써 다윗의 아버지인 오벳으로 이어집니다. 오벳이 다윗을 낳고 결국에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게 됩니다. 한 가정이 때로는 실패한 것 같고 소망이 없는 것 같아 보여도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기이한 일을 행하십니다.

 

가정에서 신앙생활은 육적인 것을 따라가지 말고 영적인 방향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에덴 동산에서부터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려고 할 때 하와가 아담에게 물어 보았다면 따먹었을까요, 따먹지 않았을까요? 알 수는 없지만 따 먹지 않은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아담에게 건낼 때 아담이 거절했으면 좋았을텐데! 그냥 따먹고 말았습니다.

 

부부가 어떤 것을 결정할 때 그것이 영 아닌 것 같으면 거절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건 아니라고 싶으면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처럼 선조취를 취해야 합니다. 가족 구성원들 가운데 영적으로 깨어있는 분이 있어서 중요한 문제를 지혜롭게 선택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의 진로를 선택할 때에도 부모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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