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사람, 복잡한 사람(마 18:1-5), 김덕선 목사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3절).
사람이 나이가 들면 단순해집니까? 아니면 복잡해집니까? 남자가 복잡합니까? 여자가 복잡합니까? 도시 사람과 시골 사람 가운데 누가 단순합니까? 장사하는 사람과 직장 다니는 사람과 누가 복잡합니까? 돈 많은 사람과 돈이 없는 사람 가운데 누가 복잡합니까? 지위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가운데 누가 복잡합니까? 자녀가 많은 사람과 자녀가 없는 사람 가운데 누가 복잡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과 안믿는 사람 가운데 누가 더 복잡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 오래 믿은 사람과 새로 믿은 사람과 누가 복잡합니까?
21세기 정보화 사회가 되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복잡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은 번민이 많습니다. 지식이 많아질수록 사람은 많은 번뇌를 갖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려고 따라 무진 애를 씁니다. 변하지 않는 원칙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 조바심을 느끼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대개 단순한 사람은 생각이 없는 사람, 복잡한 사람은 생각이 깊은 사람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사람이 좋다는 사실은 알면서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일부로 복잡해지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었을까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도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누가 제일 큰 가? 하는 문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어린아이를 가운데 세워 놓고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마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동기가 얼마나 순수한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높은 자리가 순수 여하에 따라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도 하고 해악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고의 구조가 복잡해져 있기 때문에 단순해지기에는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사람은 선악에 대한 끊임없는 갈등으로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눈이 밝아져서 지식적으로는 똑똑해졌는데 분별력은 흐려지고 말았습니다. 복잡한 사람은 순수하지 못합니다. 복잡한 사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합니다. 복잡한 사람은 결코 순종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단순한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로 베드로를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말씀하실 때 그리 마옵소서, 결단코 그런 일이 미치지 않을 겁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의 의미를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채 한 마디 했다가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고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사람 역시 베드로였습니다. 오순절 성령충만한 역사가 나타났을 때 당신네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대 놓고 설교했던 인물 역시 베드로였습니다.
복잡한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로 가롯유다를 들 수 있습니다. 언제나 가롯유다는 손해와 이익 관계로 뭐든지 따지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팔아 넘긴 것도 단순히 돈 때문이나 대제사장들의 그룹에 포섭되어 이용당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 예수님께서 당시의 메시야 신드롬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에게 찾아가서 그 돈을 도로 돌려주면서 없는 거로 하자고 했지만 이미 때가 늦은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에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살하였습니다.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복잡한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로 안드레를 들 수 있습니다. 안드레는 자기의 형제 베드로를 예수님께 전도했던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 안드레가 어린아이로부터 받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 말을 하면서 이 음식을 예수님께 내놓는다는 자체가 얼마나 단순합니까?
복잡한 것 같으면서도 단순한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로 도마를 들 수 있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만져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먼저 상처난 부분을 만져 보라고 하셨을 때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도마는 다시 그 때 한번 만져 보고 확인하는 건데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단순해서 상대방의 처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답답한 인상을 줍니다. 복잡한 사람은 매우 피곤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단순한 듯 하면서도 복잡한 사람은 이중 플레이를 한다고 오해받기 쉽습니다. 복잡한 과정을 통과한 단순한 사람은 신분이나 소유나 외모나 학력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거지와 왕자를 한번 바꾸어 보고 싶은 것이 어린아이들입니다. 어른들의 경우는 절대로 바꾸어 보는 경우가 없습니다. 한번 바꾸어 본다 해도 상당히 많은 뒷거래가 이루어져야 가능합니다.
이미 복잡해 구조로 되어버린 우리의 구조를 어떻게 하면 단순한 구조로 바꾸어 갈 수 있을까요? 당신이 매사에 염려하는 습관을 이제는 바꾸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생활의 문제를 가지고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우리는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염려하지 않을 수가 있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염려한다고 달라지는게 있냐고 하십니다.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염려하는 사람은 믿음이 적어서 그렇다고 진단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생활의 문제를 가지고 염려하는 것 보셨습니까? 어린아이들은 부모를 믿고 있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부모가 다 알아서 해 줄 것을 믿기 때문에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염려하면 괜히 마음만 나누어집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위기입니다. 저는 요즈음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어떡하면 좋아요. 염려하는 그 자체가 사람의 진을 빠지게 합니다. 염려의 늪에 빠지게 되면 불신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고 일이 자꾸만 꼬이게 됩니다.
고칠 수 없는 것은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돌아가신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나 그 누구에게 잘못한 것 때문에 마음이 영 안 좋은 상태에서 어둡게 지내시는 분이 계십니까? 이제 더 이상 거기에 매이지 마십시오. 비록 잘못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 해주셨습니다. 더 이상 그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고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래도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을 믿고 열심히 살아가십시오. 아무래도 안될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의 지배를 받지 마십시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염려를 해결할 수 있는 노하우어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생활의 습관을 감사의 구조로 바꾸어 가십시오. 염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을 선물로 갖고 있습니다. 때로는 이것저것으로 고민하다가도 결국에는 감사로 결론을 맺어야 합니다. 감사하실 때에도 다른 것을 덩달아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지금 은혜 안에서 너무내 행복한데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감사할 때 단순하게 그것만 가지고 감사하십시오.
어떤 가정은 기분좋게 외식을 나갔다고 돌아오면서 본전 생각이 나서 싸우는 부부를 보게 됩니다. 나중에 생활비 걱정 때문에 기분 내고 싶은 남편의 마음을 그냥 꺾어버리는 경우를 종종 좁니다. 지금 우리 생활 형편에 이래도 되는 거냐고? 우리 생활이 어째서. 돈만 많이 갖다 줘 바라 내가 이런 말을 하나. 아내들이여 이런 말을 하지 마십시오, 항상 두 가지 생각하는 것을 버리십시오.
또한 우리가 염려되는 부분을 하나님께 일일이 말씀드리십시오. 인간은 본래 염려하는 것이 고질적인 습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십시오. 믿음으로 기도하시고 하나님께 어린아이와 같이 맡기십시오. 어떤 분들은 기도하면서 염려합니다. 이게 뭐 기도한다고 해결될 것 같으냐? 이상하게도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만큼 염려가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의 습관 가운데 염려하는 버릇을 완전히 뿌리뽑으시기 바랍니다.
분문 5절에 보면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예수님은 어린아이는 천국 문을 열쇠라고 누가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우리 가정에 목회자라고 생각하고 섬기라고 이전에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인격을 진정으로 소중하게 여기고 대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접하듯이 보배 중에 보배와 같이 대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적당하게 대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식당에 가도 어떤 경우는 주문받을 때 아이는 아예 숫자에 넣지도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면 같이 먹으면 된다고 합니다.
우리 부모가 자녀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지나치는 법이 없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하나의 소중한 인격체로 얼마나 귀하게 대하는가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예수님을 대하듯이 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모습 속에 예수님의 모습이 가장 깨끗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이들을 선물로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감정적으로 소홀히 다루기 쉽고 인격적으로 무시하기 쉬운 어린이가 너무나 소중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아이들조차도 너무나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한 가지 공부가 끝나면 그 다음 공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학교가면 학원 숙제하랴, 뭐든지 앞 당겨서 공부하기 때문에 복잡합니다. 새로운 것을 학교에서 배우는 재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 아는 것 학교에서 배우니 시시합니다. 친구들과 사귀면서 서로 배워가는 것이 아니라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집에서도 생활하면서 배워가야 하는 과정을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설거지를 도우려 하다 접시를 깨뜨린 아이에 대해 부모가 하는 말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공부나 해”
어린아이들이 실제 생활에서 필요한 부분에 대해 많이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학문적인 지식이나 점수를 위한 과정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행동하지 않고 머리만 움직이는 아이들은 복잡해집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우울증 내지 심한 경우에는 정신분열증이 오게 됩니다.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무력증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많은 것을 몸으로 배웁니다. 자라는 어린아이들의 활동이 왕성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어린아이가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싶어하면 볼 일을 멈추고 아이손을 잡고 걸어다니십시오. 시간이 허락되면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엄마는 “놔두고 가버릴꺼야” 라고 위협합니다. 이런 말은 아이에게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망과 공포를 안겨줍니다.
무엇보다 부모는 어린아이를 인격적으로 소중하게 대해야 합니다. 부모의 권위를 내세워 아이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위협한다면 아이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줄 모르는 비굴한 아이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부모와의 대화를 하다가 의견이 다룰 때 아이가 부모의 눈을 쳐다보면서 이야기하면 “어디에 버릇없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쳐다 봐! 어디서 배운 버릇이야. 본래 이야기 할 때는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면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을 쳐다보면서 이야기하면 굉장히 버릇없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부모는 아이가 머리를 숙이고 이야기 하면 ”야 고개를 들지 못해, 너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야. 요즈음 우리 아이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또한 이야기 하다고 말대꾸를 하면 우리는 대단히 기분 나쁘게 생각합니다. 고분 고분들을 줄 알고 순종해야지. “어디다 말대꾸냐”고 비난합니다. 21세기는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피력할 줄 알고 상대방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만이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부모된 우리는 자녀들이 말대꾸를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이들의 생각의 폭을 넓혀 주고 모든 사물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말이 너무 없는 사람은 복잡한 사람이 되기 쉽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필요한 말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이 인격의 성숙을 위해서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만이 모든 일을 집중적으로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합니다. 복잡한 사람은 절대로 큰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그 순간에는 은혜가 되다가도 다시 의심이 일어납니다. 의심을 가진 사람은 자연히 복잡하게 됩니다. 야고보서는 “의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 것도 얻을 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