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아십니까?(마 5:17-22, 김덕선 목사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커다란 혼돈과 갈등에 빠지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때는 그들의 외식을 책망하면서도 오늘 본문에는 그들의 의를 칭찬하시는 것은 아닌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당시에 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금욕과 고행에 철저했습니다. 반면에 나는 도저히 그들의 의를 따라갈 수가 없는데 그러면 나는 구원받을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의가 은근히 부러워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히 다른데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종교적 지도자들이 제시했던 신앙의 기준보다 더 철저하고 완벽한 기준을제시하고 있습니다. 23절에 보면 형제들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자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형제들에게 욕을 하면 당시의 종교적 재판에 회부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당시에 라가는비었다, 돌대가리란 뜻이다).
만약 미련한 놈이라고 하면 지옥불에 들어갈 수 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화가 나서 욕설을 퍼붓고 싶은 마음이 살인의 뿌리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29절에 보면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30절에 보면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몸의 일부를 잘라버리면 하나도 붙어 있는게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은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율법의 요구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다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하나님께서 왜 주셨을까요?
그런데 본문 1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18절에는 천지가 없어져도 율법의 일점 일획은 반드시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9절에 보면 누구든지 이 계명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면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분명히 누군가 율법을 다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본래 죄악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율법의 저주를 받아 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으로 이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 자체가 엄청난 은혜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 시대에 사는 사람에게 율법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있습니다. 반면에 복음 시대에 사는 우리도 율법의 일부 또는 전부를 행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과 은혜는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이미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계획하신 것으로 율법은 복음을 예표하는 그림자였습니다. 율법에 기록된 제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한 것으로서 율법의 예고는 복음 속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이 전도하여 교회가 세워진 곳들에 다니며 예수 믿어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고 하여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혼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게 된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율법은 지킬 수가 없고, 또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며,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고 그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가르친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자기들을 위해 율법을 온전히 지켜 주실 율법의 완성자이신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게 한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를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율법을 통하여 인간이 죄인임을 보여주신 하나님은 예수님의 희생을 통하여 무조건 용서와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즉 율법은 인간이 죄인임을 증명였지만 복음은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킴으로써 구원을 얻을 길을 완성한 것입니다. 신약과 사도들에의하면 율법은 구원의 길로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자리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준거해서 살 생활의 규범으로서 몫을 가집니다.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율법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합니다. 이제 율법의 언약백성의 생활 규범으로 어떻게 역사하는지 살펴 보도록 합시다. 통상 율법은 의식법,시민법, 윤리법으로 나누어지는데 윤리법 혹은 도덕법은 그리스도의 속죄 이후에 하나님의 뜻의 표현으로서 더 강화되어 그리스도인의 생홀에서 그대로 실현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의식법의 본질과 정신도 그리스도인이 생활에 실현되어야 할 요구로 남게 됩니다. 율법의 구원의 길이 아니라 언약의 백성들이 준해서 살므로 거룩한 피에 기초해서 세워진 언약의 거룩을 유지하는 규범입니다.
의식법의 본질과 정신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와 경건 생활의 규범이 됩니다. 구약에 백성들이 예배 참석시 성결케 하는 외적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할 때 먼저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정하게 하고서 또 마음을 바로하여 예배해야 할 것임을 깨우쳐 주는 기능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일성수도 단지 세상 일과 오락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성수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날이므로 거룩하게 지킬 뿐만 아니라 안식하는 날로 지키고 또 지켜야 합니다.
시민법의 정신은 국가 생활의 규범으로 현대 상회에서 그대로 다 사회에서 적용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구약 국가법이 규정한 사유재산 제도의 신성은 지금도 변함없는 규칙입니다.
반면에 구약과 신약의 윤리법은 지금도 변함없이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신약과 구약은 동일한 윤리를 가르치나 영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윤리가 더 엄격해지고 신령해졌습니다. 외양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생각과 느낌에까지 아니 그것들의 원천인 그의 내면적 중심까지 거룩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리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으로 규정하셨습니다(마 22:36-40).
그리스도인이 율법의 저주와 요구에서는 해방되었지만(롬8:2), 율법을 주신 원래의 목적, 그 법 정신까지 폐지된 것이 아닙니다(마5:17). 오히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롤 말미암은 새 언약(렘 31:33)으로 마음의 비에 쓴 법으로(고후 3:3),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롬8:2)으로 성도의 삶을 위한 그리스도의 법으로 승화되어 나타나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롤 말미암아 칭의를 받는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성화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엡 6:2, 약 2: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