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다급할 때(삼상 30:6), 김덕선 목사
사람은 누구나 인내의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참고 견디다가 보면 지칠 때가 있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고 더 이상 생각하기조차 싫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상하고 힘들 때 결론을 내리면 후회하기 쉽습니다. 크게 다급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윗은 사울 왕에 의해 두 번씩이나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그러나 사울은 돌아서면 다시 다윗을 잡아 죽일 궁리를 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계속적인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절망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삼상 27:1).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언젠가는 사울의 손에 죽을 것이 자명한 일이야! 다윗은심한 두려움과 조급함에 빠지게 됩니다.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결국 다윗은 블레섹으로 도주해야 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목회의 현장에서 인내의 한계를 느낄때 크게 다급할 때가 있습니다. 생존이냐 소명이냐의 문제로 인해 갈등을 겪게 됩니다.
생존이냐 소명이냐?
다윗은 언젠가는 사울의 손에 죽을 것이기 때문에, 부하들을 이끌고 사울 왕의 군대와 싸우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는 이전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조차도 하나하나 실망으로를 바뀔 때가 있습니다. 게다가 부하들의 숫자도 600명 이상 늘어나지 않습니다. 교인들의 숫자가 더 이상 늘지 않습니다. 있는 교인들마저 시험들 때가 있습니다.
백성들이 다윗 편으로 구름떼처럼 몰려들어야 사울과 대항을 하든지 나라를 얻든지 할 텐데, 그럴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을 배신하고 사울에게 다윗을 밀고하는 일들이 반복됩니다. 그렇게 도망만 다니다가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는 약속을 분명히 받았지만 지금은 현상금 붙은 사나이에 불과합니다. 현실이냐 약속이냐 갈등하게 됩니다.
결국 다윗은 생존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사울의 권력이 미치지 않는 이스라엘 영토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부하들을 이끌고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갑니다. 아기스는 다윗이 초기에 블레셋에 도주했을 대 그 앞에서 미친 짓을 보고 지켜주었던 블레셋 왕입니다. 다윗은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적국 블레셋 왕의 수하로 들어갑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바로 이때 다윗의 정체성이 송두리째 흔들립니다. 목회의 정체성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골든 서클"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가장 바깥원은 무엇을 그 다음 원이 어떻게 그리고 왜 하느냐 입니다. 저는 가장 안쪽의 원을 누가 하느냐를 그리고 싶습니다.
다윗이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다윗은 소년 시절에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적장 골리앗을 때려눕히는 공도 세웠습니다. 지금까지 억울하게 사울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는 것도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집요한 사울의 추격으로부터 살아남은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은 그런 하나님의 싸인은 보지 못하고 추격해오는 사울의 집요함에 그만 두려움에 빠져 잘못된 결론과 결론에도달하게 됩니다. 이때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구했더라면 과연 블레셋 왕의 수하로 들어갔을까요?
다윗이 아기스에게 갔다가 미친 체 하여 생존하려고 했지만 결국은 쫓겨나게 됩니다. 일전에 다윗이 아둘람 굴에서 부하들과 함께 모압으로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유다로 돌아가라고 권면합니다(삼상 22:4-5). 사울에게 쫓기더라도 유다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은 사울에게 잡혀 죽을 것이 두려워 블레셋으로 갑니다. 다윗은 자신이 유다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그릇 행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알면서도 나의 고집과 생존의 위협으로 인해 그렇게 가는 겁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600명이라면 가족들을 숫자까지 합하면 2,3천 명은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가드 왕 아기스는 다윗의 일행을 그대로 받아줍니다. 그리고 다윗의 요청에 의해서 시글락이라는 성읍을 내줍니다. 다윗은 사울의 권력이 미치는 이스라엘 땅을 벗어났다고 한숨을 돌립니다. 사실은 적국 블레셋에 왔으니 더 위험합니다. 아기스 왕의 참모들은 다윗은 자기들의 영웅 골리앗을 죽인 원수니깐 다윗을 죽이는 것이 후환을 없애는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기스는 두 번째 찾아온 다윗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이스라엘을 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눈에 불을 켜고 다윗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다윗은 당연히 사울과 맞서 싸울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다읫이 하나님 편에 서지 않을 때 이상한 편에 서게 됩니다. 당신은 누구 편입니까 퓨시맨입니까
그래도 다윗은 이스라엘을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기스의 환대에 적당하게 반응하면서 철저하게 아기스를 농락합니다. 마치 아기스에게 협력하겠다는 식으로 완전히 아기스를 속이고 있습니다. 비록 적이긴 하지만,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을 배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꿰니까 그 다음의 행동도 잘못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신뢰하기보다 자신이 처한 위험에 집중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결정을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에 대한 신뢰를 배반하면서 가드 왕 아기스를 농락합니다.
시글락에 자리를 잡은 다윗이 부하들을 이끌고 군사작전을 나갑니다. 목표는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의 마을들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 사람들의 마을을 침공하면 남녀를 무론하고 하나도 살려두지 않고 죽입니다. 이것은 매우 악한 일입니다. 전쟁에서 남녀를 무론하고 다 죽이는 것은 아주 잔혹한 인간들이나 하던 일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 짓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왜 그렇게 변해버렸을까요?
그 다음에 보면 다윗이 왜 남녀를 다 죽였는지 이유가 나옵니다. 그 마을들을 습격해서 노략한 다음에 아기스에게 갑니다. 그것은 노략물 중에서 아기스에게 공물을 바치기 위해서입니다. 아기스가 묻습니다. ‘오늘은 어느 마을을 노략하였느냐?’ 그러면 다윗이 대답합니다. ‘유다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겐 사람의 네겝이니이다.’ 네겝은 유다의 남쪽 지역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네겝에 있는 유다 마을과 여라무엘 족속의 마을, 겐 족속의 마을을 노략했다고 대답합니다. 여라무엘 족속은 유다 지파의 한 씨족입니다. 겐 족속은 원래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족속인데, 유다 족속 중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삿 1:16). 그러니까 다윗이 하는 말은 유다 족속의 마을들을 노략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 말을 듣고 아기스는 자기 뜻대로 되어간다고 생각해서 매우 기뻐합니다. 다윗이 자기 동족 마을을 습격해서 죽이고 노략질을 했으니 이제는 다시 자기 동족에게로 돌아갈 수 없게 되고, 영영 자기 수하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이 노린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아기스의 신임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기스에게 보고한 것처럼 유다 마을들을 침략한 것이 아니라 그술, 기르스, 아말렉 족속의 마을들을 침략한 것입니다. 이 사실이 아기스의 귀에 들어가면 다윗은 끝장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침략한 마을 사람들을 남녀를 불문하고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버린 것입니다.
전쟁을 해서 이기면 재산은 노략하고 사람들은 잡아서 노예로 삼는 것이 당시의 관습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짓을 자행한 것입니다. 그토록 고결한 성품을 지녔던 다윗이 이렇게 망가져버렸다는 것이 너무 기가 막힙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애초에 발단이 잘못된 것입니다. 사울의 손에 죽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자기 목숨을 구하는 일에 전념하다 보니 다른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생각하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자기가 살겠다고 다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일삼은 다윗이 너무 실망스럽습니다.
그렇게 다윗이 1년 4개월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기쁘나 슬프나, 좋은 일에나 나쁜 일에나 시를 썼던 시인입니다. 그 시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는 시를 통해서 하나님과 대화합니다. 그런데 이 시글락에 있던 1년 4개월 동안, 그는 단 한 편의 시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과의 교제가 완전히 단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글락에 있던 이 1년 4개월을 그의 생애에서 암흑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았던 날들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의지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칼과 속임수로 연명했던 비참한 시절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는 평가에 비해 시글락에서의 이 기간은 정말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어두운 시절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위하여 사는 인생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가난하고 고생을 하더라도, 고결하고 아름다운 성품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사는 생애가 되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생존이 우리를 위협하지만 소명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아기스 왕은 다윗이 이 전쟁에 참여해서 확실한 공로를 세우라고 지시합니다. 그러나 참모들의 반대로 인해 이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채 허탈한 마음으로 가족들이 있는 시글락으로 돌아옵니다. 이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막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그의 일행들에게는 또 다른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집이 다 불타버렸고, 가족들은 다 포로로 사로잡아 갔습니다
포기냐, 용기냐?
다윗의 부하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이 돌로 치려고 합니다. 다윗은 크게 다급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다급한 상황 가운데서 여호와를 힘입어 용기를 얻었습니다. 다윗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여호와를 의지하여 힘을 얻는 비결을 알고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께 힘을 얻었을까요?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 오라고 합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묻습니다.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 잡겠습니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그를 좇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 잡고 도로 찾으리라.”
9-10절에 보면 다윗은 자신을 돌로 치려 하는 큰 소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위기를 일순간에 반전시켜 그들 모두로 하여금 자신을 좇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백성들 모두가 다윗을 좇은 것은 '우림과 둠밈'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긍정적인 답변(8절)으로 인하여, 아내와 자식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신하들 가운데 400명과 함께 추격하였습니다. 200명은 힘들어하고 지쳐있기 때문에 강요하지 않고 시글락에 머물러 있으라고 했습니다.
추격하는 도중에 애굽 사람 한 사람을 만나 다윗에게 데려가 떡을 주어 마시게 하고 물을 마시게 하였습니다. 무화과 뭉치 한 덩어리를 떼어다가 주고 건포도 두 송이를 주었습니다. 이 소년은 사흘동안 먹지 못하고 물도 마시지 못하였다가 이제야 기력을 회복했습니다. 다윗이 그에게 소속이 어디인지 밝히라고 했습니다. 그때 이 소년은 자신은 애굽 소년이요 아말렉 사람의 종이었는데 사흘 전에 병이 들어 주인이 나를 버렸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렛 사람 남방과 유다에 속한 지방과 갈렙 남방을 침노하고 시글락을 불살랐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각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다윗은 이 소년에게 네가 나를 아말렉 족속의 진영으로 인도하겠느냐? 당신이 나를 죽이지 않고 내 주인의 수중에 넘기지 않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하면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병든 애굽 소년의 정보는 다윗에게 매우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세심한 섭리가 여기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아말렉 족속에게는 여자, 어린이, 가축 등 많은 약탈물이 딸려 있었기 때문에 진행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다윗 일행은 애굽 소년의 안내로 쉽사리 아말렉 족속을 따라잡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아말렉 족속들은 승리에 도취하여 방심한 상태에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경계심을 푼 상태에서 모두 정신없이 먹고 마시며 취하기 때문에, 다윗의 기습 공격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군대는 처 자식들을 다 찾아왔고, 시글락 사건 이전보다 더욱 풍성한 소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직 신앙으로 나아가는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전화 위복의 은총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께 나아오는 자를 위하여 풍성한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요 10:10;엡 3:20).
다윗은 그의 신하들과 더불어 모든 것을 다 되찾고 빼앗아 돌아올 때 피곤하다고 진영에 머물렀던 이백 명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신하들을 영접하였습니다. 돌아오는 사람들 가운데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한 사람들은 처 자식만 데리고 가게 하고 전리품은 주지 말자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전투에 참여치 아니한 사람들에게도 전리품을 나누어 주었던 이스라엘의 역사적 관례에 비추어 볼 때 잘못된 것입니다(민 31:27).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에 따른 것이었습니다(8, 23절). 후방에서 소유물을 지키는 일도 작전상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25:13). 따라서 소유물을 지키던 자들에게 돌려져야 할 그들의 분깃을 돌려주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23절에서 다윗은 다윗은, 전쟁에 참여했던 자들이나 뒤에 남아있던 자들이나 모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같은 형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리품 분배의 규례는 이미 광야 시절 모세 때로부터 있었습니다. 즉 당시 모세는 미디안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여호와의 명을 좇아 노획한 전리품 중 절반은 싸움에 참전한 '군인들'에게, 그리고 절반은 진(陳)에 머물러 있던 '백성들'에게 분배하도록 하는 규례를 세운 바 있었습니다(민 31:27). 그런데 본절에서와 같은 다윗의 규례 제정은 그러한 광야 생활의 규례에 근거하여, 그 규례의 폭을 군인들 중 전투자와 비전투자 사이의 구별을 없애는 등, 확대 제정한 것입니다.
다윗은 모든 유다 장로들뿐만 아니라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탈취물을 주었습니다. 아무튼 다윗이 이같이 선심을 베푼 이유는 자신이 비록 블레셋 땅에 망명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사울에게 쫓기는 동안 물심양면으로 자신을 도와준 성읍의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합니다(30절), 이제 우리의 목회 현실이 너무 힘들고 자신의 정채성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지 않은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는 기회로 삼기 원합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상황이 생기는 것은 때로는 힘들지만 감추인 보배가 됩니다.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기름 부은 받은 이후에 25년 이상 좇기면서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소명을 때로는 잃어버릴 만큼 생존의 문제를 위하여, 사람간의 갈등의 문제를 위하여 시달려야 했습니다. 다윗에게 찾아온 사람들은 한 결같이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들입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캐어해 줄 그룹이 아니라 끝까지 캐어를 받아야 할 그룹입니다. 목회는 케어해줄 그룹과 캐어받아야 할 그룹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계속 캐어만 하는 교회인 경우는 지치고 탈진하게 됩니다. 그래서 목회를 포기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포기냐, 용기냐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다윗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힘을 얻었습니다. 때로는 요나단을 통해서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습니다(삼상 23: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