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 렌즈로 세상 읽기, 양승훈
대천덕 신부, 당신이 실천할 수 없는 것을 가르치지 말라.
기독교 세계관 사역은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정치, 사회, 문화, 학문, 예술, 종교, 군사 등 각 분야에서 성경적 조망을 확립하는 것, 다른 하나는 이렇게 확립된 조망들을 자신의 삶과 인격 속으로 스며들게 하는 것.
제 1부 기독교 세계관과 인생
사랑이 여럿일 수 있을까? 인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의 대상, 깊이 방법이 다를 뿐, 진정한 사람은 여럿일 수가 없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기쉬 박사님의 재혼에 대한 거부감은 성경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라 내가 자라난 문화가 심어준 선입견에서 나온 것이었다. 때때로 찜찜할 때도 있지만 문화적 선입견을 넘어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배워가는 것이 성경적 세계 훈련의 기본이리라.
미움의 감정은 음욕보다 훨씬 더 질기고 강한 적이다. 미워하는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투쟁을 하느니 할 수만 있으면 그 사람을 피해 도망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가 보이지 않는 것에서 평정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그를 향한 연민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다.
직설적인 충언은 상대와의 관계를 깨뜨리게 되고, 일단 관계가 깨어지면 아무리 좋은 처방도 소용이 없다(전 7:16, 잠 17:9, 13:3, 25:11). 절제하지 않은 충언과 직언은 친구를 잃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아무리 바르고 솔직한 말이라도 보는 각도에 따라 화를 불러 올 수 있는 미련한 말일 수 있으며 관계를 깨뜨릴 수 있는 첩경일 수 있다.
양성 생식은 우수한 후손을 얻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양성생식은 다양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다(창 1:28-31). 나무는 여름에 건조하여 수분이 부족하면 가을이 오더라도 아름답게 물들지 않는다. 덥고 습한 여름이 가고 가을 초 기온이 급랭하며 맑은 날씨가 계속되면 단품의 색은 가장 아름다워진다. 단풍의 색깔이 강수량, 일조, 기온 등에 의해 크게 좌우되듯이 인생의 단풍색도 살아온 모습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인생의 봄과 여름을 어떻게 보냈는가에 따라 노년의 아름다움이 결정된다.
단풍이 식물의 겨울을 준비하는 과정이듯이 노년은 인생의 겨울을 준비하는 과정임을 배울 수 있다.
단풍은 우리의 재물을 어디에 쌓아야 하는지를 말해 준다. 겨울이 되면 아무가 낙엽이 되어 떨어져 버릴 덧없는 잎새에 영양분에 쌓기보다 보이지 않는 줄기와 뿌리에 양분을 저장하는 것처럼 우리의 재물을 잠시 있다가 없어질 이 세상에 쌓지말고 영원을 위해 보이지 않는 천국에 쌓아야 함을 말해 준다(고후 4:18).
마지막으로 단풍은 인생을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매카니즘을 보여준다. 단풍과 낙엽이 식물을 정화하듯이 사람은 노년의 버림을 통해 인생을 정화할 수 있다.
제 2부 기독교적 세계관과 신앙
사랑하는 남편을 죽인 아우카 인디언들에게 다시 들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한 짐 엘리오트의 아내 엘리사벳이나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위해 다시 자신의 삶을 바치고 있는 스트브 세인트 ! 도대체 복음이 무엇이기에 이런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일으키는가! 이들의 이야기는 이제 선교분야의 전설이 되었지만 이들 다섯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아직까지는 원수는커녕 아니 형제들조차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좁은 마음을 해머로 두드리고 있다.
1억 3천만 인구 중에서 분명하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100만도 되지 않는다는 일본인들을 생각하면 측은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욘 4:11).
정말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라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성공보다는 차라리 모든 사람들이 피하고 싶어하는 고난이 훨씬 더 유익하다.
종교적 분위기와 장소를 벗어나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원론은 다분히 무속적 뿌리를 갖고 있다. 일단 신의 면전을 떠나면 그 장소에 매여 있는 신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제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 어디에도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출세하는 것을 축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축복을 요약한 것이 팔복이다. 의를 위해 핍박은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한다. 물론 구약에는 부귀영화와 건강장수를 축복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축복들도 결국 영적인 축복과 관련될 때 진정한 축복이라고 가르친다. 신약에는 대부분이 진정한 축복은 영적인 축복임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세 축복은 자칫 올무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딤전 6:10).
이원론적 행습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길은 바른신관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이벨스의 책 제목처럼"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당신은 누구인가?" 라고 물었을 때도 사람은 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언제, 어디서나 살펴보고 계신다고 믿는 사람은 이원론적으로 살지 않는다. 자신의 행동 뿐 아니라 자신의 심장폐부에 숨은 생각이나 동기까지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일상적인 삶에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 수가 없다.
사춘기 아들이 부모에게 반항하는 것의 가장 심한 형태는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를 무시하고 자기는 자기 힘으로 존재하고 살아간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진화론자들의 태도와 흡사하다.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죽이신 하나님의 마음과 가장 가까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춘기의 자녀를 둔 아버지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사춘기 자녀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하나님의 참으심을 본받는 것이 필요하다(히 12:3). 결국 아버지의 크기는 인내의 크기라고 할 수 있다.
사춘기의 시기는 인생에서 가장 교만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사춘기를 통해 부모는 비록 자식을 낳았을지라도 자식은 자신의 소유, 혹은 자신에게 속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직접 계산해야 할 독립적 인격체임을 깨닫게 된다.
목사만이 성직자라고 생각하면서 평신도들과 다른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청산해야 할 대표적인 중세적 잔재이다. 목사가 교회에 파송된 성직자라면 평신도는 세상을 향해 파송된 성직자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기적적인 일과 자연 질서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구태여 구분하지 않는다. 이러한 구분은 유한한 인간의 이해력을 기준으로 나누는 것 일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들이며 아무런 차이가 없다.
교회에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가서는 안 되는 것처럼 연애하러 가도, 사업하러 가도, 국회위원이 되기 위해 가도 안 된다.
예배가 아닌 다른 목적을 가지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영적인 앉은뱅이가 되는 지름길이다.
교육의 최종적인 목적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학생들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것이다.
근면과 성실이 전문성과 결합되고, 그 전문성이 집중력과 결합할 때 성공한다.
자녀 교육의 성공은 아이들이 자라서 하나님과 사람들과 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사는가, 그래서 그들이 정말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는 가에 달려 있다.
진정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성경의 세계관을 채택하는 신앙인이 된다는 것이다.
왜 이처럼 부지런하고 똑똑한 한국인들이 서구인들을 추월하지 못하는가?
첫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협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기록하는 습관이 몸에 배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협력을 동시대적 협력이라고 한다면 기록은 세대간의 협력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합리적 사고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에는 합리적 결과를 수용하지 못한다는 측면이 있다. 많은 목회자들은 믿음은 곧 비합리라는 잘못된 등식을 만들어 주일 설교를 한다. 군대는 무리와 비합리가 상식화된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없는 것은 있게 하라. 안 되는 것은 되게 하라. 비합리는 부패와 부도덕과 직결되어 있다. 대표적인 예가 부실 공사다. 합리와 상식 치밀한 계획의 중요성은 예수님께서도 강조하셨다(눅 14:28-32).
기독교세계관에 있어서 사형 제도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첫째로, 사형 제도는 하나님의 공이로움을 반영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죄를 지은 사람은 그것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
둘째, 사형 제도를 집행할 때에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벋은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형이 가벼이 시행되어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자가 없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의미 속에는 또 다른 측면은 인간의 주권성이다. 인간은 주권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질환자들은 사형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미성년자들에 대한 사형도 금지해야 한다.
또한 응보적 감정에 근거하여 사형 제도를 지지하는 것도 성경적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공개처형을 해서는 안된다.
셋째로, 사형제도는 인간의 타락과 관련되어 있다. 어떤 경우라도 정치범이나 사상범들에 대한 사형은 폐지되어야 한다.
넷째로, 사형제도는 피조세계에 대한 청지기적 소명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분명하게 다른 사람을 죽인 사람들은 시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창 9:6). 레위기 20장에는 이방인 숭배, 신접한 자,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 간음하는 자, 근침상간, 동성애, 수간 등을 죄를 범한 자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민수기 15장에는 안식일을 범한 자를 죽이라는 기록이 나와 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중에서, 12, 2, 3, 4, 5, 6, 7, 계명을 어긴 자들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보호하며 인간이 사는 사회의 도덕과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신다.
서구의 계약사회는 효율성과 생산성은 뛰어나지만 재미가 없고 인정사회는 재미는 있지만 법치를 할 수 없다. 원칙이 살아있으면서도 인정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는 희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