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향력을 끼치는 교회(마 5:18), 김덕선 목사
캐논 캘러한의 쓴 책 “영향력으로 남는 교회”에서 저자는 이렇게 역설합니다. “이제 교인, 헌금, 건물로 교회를 평가하던 시대는 갔다. 교회 상담가로 유명한 케논 켈러한은 21세기 교회의 운명은 교회의 규모가 아니라 교회의 영향력에 달려있다고 단언한다. 그가 제시하는 파워풀한 교회의 모델은 가족 같은 교회, 역동적인 교회, 은혜로운 교회, 관대한 교회의 모습들로 지역 사회 깊숙이 파고들어 영향력을 떨칩니다.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들도 세 가지 유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작고(크고) 강한 교회, 작고(크고) 약한 교회, 작고(크고) 죽어가는 교회. 예람교회는 작지만 강한 교회,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누가 세상에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3, 14절). 이것은 신자들이 끼치는 영향력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소금은 방부제로 사용되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맛을 내기 위해 사용됩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이 세상에서 소금과 같이 맛을 내야 합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않아무런 쓸모가 없어져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부족한 것이 많은데, 왜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세상의 빛이 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사야 49장 6절입니다.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요한복음 1장 4절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절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참 빛으로 오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은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고 믿을 때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기 때문에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순간 구원의 빛, 생명의 빛, 사랑의 빛을 받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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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어두운 그늘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할 때 그 사람이 빛되신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16절입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세상의 많은 학식을 가진 사람이나 많은 권력이나 부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실력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에 빛이 비쳐지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보게 될 것입니다. 밤에 등불이 켜서 집안을 환하게 비출 때 멀리서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고대의 마을은 흔히 흰 석회암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태양빛을 받으면 빛나게 되고 많은 사람들의 아름다운 광경을 보게 됩니다. 밤에는 동네 주민들이 켜 놓은 등불이 주변 지역에 비쳐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노출되게 되어 있습니다.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핍박을 받아야 합니다. 조롱이 아니라 감동을 끼치면 좋겠습니다.
본문 15절입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사람이 집 안에서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말'은 곡식의 양을 재는 나무 그릇으로 보통 8.25리터의 양을 담을 수 있는 용기입니다. 말은 빛을 비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특히 이 말 아래 둔다는 것은 빛을 차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안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가 점검해야 합니다. 이제 등불을 등경(등불 받침대)위에 두어 빛을 멀리 비치게 해야 합니다. 등불을 켜는 것은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추게 하기 위함입니다. 먼저 우리 가정에 생명의 빛, 사랑의 빛, 위로의 빛, 소망의 빛이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빛은 가까운데서부터 멀리까지 두루 비쳐야 합니다. 비치게 됩니다.
우리가 어두운 그늘에 앉은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 세상의 빛을 비추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신자는 복음의 세일즈맨입니다. 이전에 어두운데서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나누는 것이 전도입니다.
어느 성도 한 사람이 독일의 시골을 여행하다가 작은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예배당은 좁고 초라했으며 예배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불 하나 켜지 않고 어두컴컴한 그대로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실망스러웠지만 예배 시간까지 그 교회의 안내인의 집에서 기다렸습니다. 저녁 예배 시간이 되어 안내인을 따라 교회로 향했습니다.
교회 마당에 들어서자 숲 속 여기저기에서 성도들이 등불 하나씩을 들고 모여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예배당으로 들어서자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교회 안은 아름다운 등불로 가득했고 제단 뒤에 걸려있는 십자가는 그 등불들 때문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사람들이 점점 많이 모여들면서 서로를 분별할 수도 있었으며, 인사도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안내인의 인도를 따라 한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 의자 앞에는 ‘안나’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습니다.그 날 저녁에는 ‘안나’라는 할머니가 병환으로 교회에 나오지 못해서 자리가 하나 비었다는 것입니다.“자리 하나가 비게 되면 등불 하나도 비게 되지요. 그리고 교회당은 그만큼 어둡게 되고요. 그러면 그만큼 예수님의 모습이나 십자가도 어두워지게 되고 서로를 아는 데도 더 장애가 되지요.”
2. 어떻게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곳은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과 비슷한 수준에 있거나 예수님을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지고 사람에게 밝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1-10절에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면서 이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산상수훈의 복을 누리는 사람은 세상에서 영향력을 끼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예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사람들은 세상에 영향력을 끼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고, 주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신자를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자신을 나타내면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본문 19절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불신자들로 하여금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역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역시 다르다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냄으로써 사람들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신자들은 도덕성에 있어서 불신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탁월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8, 9절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예수님의 성품을 드러내야 합니다. 어두운 세상 가운데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합니다.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모든 면에서 착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의로워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옥한흠 목사님의 유튜브 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세상에서 영향력을 끼치려면 불신자들보다 도더성에 있어서 40% 이상 차이가 나야 한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불신자들 가운데서 가끔 포르노를 시청하는 사람들이 30%였다고 합니다. 미국의 신자들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40%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비슷해서는 교회가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다니엘처럼 업무면에 있어서 털어도 먼지가 안나는 그런 크리스찬들이 비중이 높아져야 세상이 교회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미국의 정치가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기가 사는 필라델피아 시민들에게 선한 일을 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름답고 좋은 등을 하나 준비해서 집 앞에 선반을 만들고 그 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등불은 집 안에 두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집 밖에 두는 것은 낭비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사람들은 뭔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집 밖에 등불을 두니까 밤에 지나가는 사람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멀리서도 방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좋게 생각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 밖에 등불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가 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가로등의 시작이었습니다. 만약 길거리에 가로등이 없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얼마나 캄캄하고 어둡겠습니까? 세계적으로 가로등이 생기게 된 것은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을 위하여 집 밖에 등불을 둠으로써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선한 행동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감화를 준 것입니다.
우리는 어두움이 짙다고 탓하지 말고 그럴수록 빛의 역할은 더욱 커집니다. 칠흑같은 밤하늘에 별들이 모여 있으면 더욱 환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역시 믿는 사람들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줄 때입니다.
로마제국에서 기독교는 많은 박해를 받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급속도로 성장하였습니다. 200년대 로마제국 인구 1억중 기독교인은 5%를 넘게 되었고, 300년대에는 10%, 그리고 400년대에는 약 50%에 이르렀습니다. 그 확산 원인은 무엇일까요?
[기독교로 보는 세계 역사]에 나오는 세 가지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랑과 평화라는 기독교의 본질적 가치의 힘이었습니다.
로마제국에서 노예와 귀족이 계층의 벽을 넘어 진정으로 형제로 부르며 교제하는 공동체는 사실 기독교외에는 없었습니다. 많은 신자들은 노예를 가족으로 대하거나 해방시켰습니다. 기독교를 싫어했던 황제 율리우스 조차 이렇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보라!”
둘째, 이교들과 현저히 달랐던 기독교의 독특한 신관이었습니다.
아들 예수를 인간을 위해 보낸 사랑의 창조주와 인간의 죗값을 치루기 위해 자발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택한 예수님의 이야기는 로마와 그리스 신들의 탐욕적이고 전투적인 모습과 질적으로 대비되었습니다.
셋째, 신자들의 선행이었습니다.
초대교인들은 고아와 과부, 병자들과 굶은 자들을 도왔으며 재산을 기부하였습니다. 처형되어 길에 버려진 죄수들의 시신도 매장해 주었습니다. 로마사화에서 사형판결로 처형된 시신을 매장하는 것은 중대한 위법행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누구의 시신이든 가리지 않고 묻어 주었습니다. 신자들의 의연한 순교도 많은 이교도들에게 감명을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