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라(마 11:28-30), 김덕선 목사
“하루는 새 한 마리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무거운 날개를 두 개씩이나 양 어깨에 달아놓으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날 수 있는 것은 그 무거운 날개 때문이란다”
우리는 하늘을 날기 원하지만 무거운 날개는 싫어합니다. 무거운 짐을 싫어합니다. 모세도,엘리야도 짐이 무거워 이제 죽여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들은 그 짐 때문에 자신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몰랐습니다.
선교사 한 분이 아프리카에 선교를 갔습니다. 원주민들과 함께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원주민이 큰 돌을 선교사 가슴에 안겨주었습니다. 자신들은 큰 돌을 머리에 이거나 가슴에 안고 강을 건넜습니다. 그 선교사는 그 이유를 강 중간쯤 왔을 때 알았습니다. 강 중간쯤에 급류가 흐르고 있었는데 만약 무거운 돌이 없었다면 급류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무거운 짐이 자신들을 살린다는 지혜를 알고 있었습니다. 가볍고 편한 것만이 행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고 침체의 강을 건너게 하시는데 그것은 우리를 죽이기 위함이 아니고 우리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교회 달력 가운데 8월달 성경 구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제가 어렸을 때 교회 안팎에 이 성경 구절이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많은 버스나 지하철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짐이여, 짐이여, 알고 보니 그 짐은 사람이었습니다.
1. 왜 이렇게 수고하고 무거운 인생을 살아가야 할까요?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어디서부터 온지 아십니까? 인간의 고통과 불행은 인류의 최초의 조상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찾아온 결과였습니다. 창세기 3장 17, 18절입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아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한 것 때문에 우리가 그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생각하면 억울한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전도서 2장 22, 23절은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렇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인간은 말할 수 없는 고난의 현장에서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다고 토로했습니다.
사람들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 중에서 가장 힘든 것이 인간 관계로 인한 스트레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녀들로 인해 평생 힘들어 하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배우자와에 대한 분노로 인해 시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많이 힘들게 하는 사람이나 교회에서 상처를 받아서 관계를 단절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의 품이 절실한 필요한때 스마토폰 안에서 고립과 단절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신자의 경우는 예외일까요? 세상의 짐에다가 교회의 짐을 더해져서 무겁고 힘들다고 말합니다. 혹시 우리가 그렇게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던 어느 날 제가 독일어 성경을 읽는 가운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지어진 자들이 다 내게로 오라는 번역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타인에 의해 무거운 짐을 진 채 계속해서 지쳐 있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운다고 책망하셨습니다(23:1-4)..당시에 율법주의자들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수 많은 규정들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4절입니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누가복음 11장 46절입니다.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 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댜.”
2.어디에 가느냐 보다는 누구에게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 인생의 문제는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누구에게로 가야 할까요? 사람들은 지치고 힘들 때 그것을 풀기 위하여 여행을 다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긴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시간이 있어야 하고 돈이 있어야 합니다. 이상하게도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는 사람은 시간이 없습니다. 너무 힘들고 지칠 때 어디에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새로운 환경을 통해서 문제에서 벗어나서 쉼을 얻는 것이 필요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있을 때 누구에게 가야 할까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사야 53장 4-6절에 의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십자가 위에서 친히 담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참된 안식과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신자가 예수님께로 가면 신자는 죄에서의 해방과 율법의 속박에서의 해방, 불안과 염려, 고통에서의 해방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나에게로 오라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고 하셨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께로 나가야 된다는 것은 알지만 선뜻 나가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이 바빠서 나가야지 하면서 예수님께 나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은 죄를 많이 지어서 문제가 많아서 나 같은 사람은 받아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몸이 불편해서 예수님께 나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병원에는 건강한 사람이 갑니까, 몸이 아픈 사람이 갑니까? 어떤 사람은 자신은 교회 한번 나가면 빠지지 않고 나가야 하는데 그것이 자신이 없어서 아직까지 못 나가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번에 한 번이라도 나가보자 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가야 합니다. 그렇게 안하면 평생 못갑니다.
미국의 부흥 사였던 무디가 설교했던 말이 생각이 납니다. "그대 자신을 믿어 보라! 그대는 실망할 때가 있을 것이다.친구를 믿어 보라! 어느 날 그들은 죽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대와 해어질 것이다.그대의 명성을 믿어 보라! 어느 때 훼방하는 혀가 그것을 뒤집어엎을 것이다.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어 보라! 그대는 현세와 내세에 후회함이 없을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인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해주시겠다는 것은 주님이 해 주실 일입니다. 요한복음 6장 37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쫓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요한복음 6장 44, 45절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게로 오라 나는 너희를 찾기 위해 왔다.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이끌어 주실까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에 가자고 했는데 그때 빵 터진 겁니다.
3. 더 깊은 쉼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는 참된 안식과 쉼을 얻었는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렇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그리하면 네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전후의 관계를 파악해야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예수님의 멍에를 매고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여기서 멍에를 메고 배우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쉼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9절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매라고 하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갖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요일 3:23). 본문 30절입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당시에 유대인들의 경우, 그들은 종교가 큰 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종교는 끝이 없는 규칙과 의무를 강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짐을 묶어 우리 등에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짐을 대신 지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송아지는 멍에를 매지만 어미 소를 무거운 짐을 지기 때문에 묶인 채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무거운 짐수레 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멍에를 메거나 줄에 묶인 채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송아지와 는 멍에를 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무게를 느끼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빗대서 우리가 짊어지는 멍에는 가볍고 쉽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 깊은 쉽은 우리가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갈 때 가능합니다. 주님은 나와 함께 멍에를 매자고 하십니다. 그러면 너는 다른 데서는 찾을 수 없는 평안과 만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주님이 내게 주신 멍예는 의무가 아니라 사랑의 멍에입니다. 조건부가 아니라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우리가 믿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질 때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는 것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주님의 심정을 깊이 헤아리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서 얻게 됩니다. 깊은 쉼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입니다. 참된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안에 있었고, 또 그분이 주리라 약속한 것을 발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멍에는 율법학자들이 뒤집어 씌운 그런 무거운 짐이 아니라 안식을 가져다주며 평강을 가져다 주는 쉽고도 가벼운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참된 안식과 평안를 주십니다. 죄의 속박과 염려와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시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에 대해 계속 배워갈 때에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새의 깃털과 같아서 창공을 자유롭게 날 수 있을 만큼 가볍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요일 5:3).
안식이란 바쁜 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이란 그 영역에 자신을 합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안식은 시냇물의 움직임과 같습니다. 그것은 다툼이 없이 맑고, 그 삶을 따라서 바다로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안식은 최상의 것. 최고의 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며 지속적인 것이고 빗나가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참된 안식입니다-드와이트.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 4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