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에 은혜 받는 이유(시 22:1-3), 김덕선 목사
성도들 가운데 “저는 설교에도 은혜를 받지만 찬양에 은혜를 많이 받아요”라는 말씀을 종종 듣곤 합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 훈련도 하는데 찬양에 대한 교육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신앙이 성장해야 하듯이 우리의 찬양도 깊어지고 성장해야 합니다. 인간이 말로써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형태는 찬양이고, 가장 낮은 형태는 저주입니다.
찬양이란 칭찬하다, 자랑하다는 뜻입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자랑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찬양해야 할 이유는 우리가 구원받은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찬양의 본질은 하나님께 영광을 둘려드리는 데 있습니다.
1.찬양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나이다”(3절). 이 찬송은 누가 어떠한 상황에서 불렀을까요? 시편 22편은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인도자를 따라 아앨렛사할, 즉 사슴이란 곡조에 맞춘 노래입니다. 사슴이 맹수나 사냥꾼에 좇기는 것을 곡조에 맞춘 노래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
다윗이 극심한 고통을 당하면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버림받은 고통의 절규이면서 또한 찬양입니다. 그래서 찬양을 곡조있는 노래라고 합니다. 다윗은 언제 이 찬양을 부른지 아십니까? 다윗은 자신이 버림받은 것 같은 극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토로합니다.
버림받은 것 같은 쓸쓸한 순간에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자신이 버림받은 상황이나 순간에 하나님을 멀리 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하나님 앞에 아뢰십시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본문은 신약 시대에 누가 언제 인용하셨을까요? 마태복음 27장 46절입니다. “제 9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예수님께서 우리 시간으로는 오후 3시경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절규하신 말씀입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저주와 형벌을 당하심으로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는 순간에 부른 찬양입니다.
다윗이 이 찬양을 언제 찬양을 부른지 아십니까? 본문 2절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니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윗은 밤낮으로 기도하였지만 응답되지 않는 상황에서 찬양을 드립니다. 다윗이 절박한 상황에서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더구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본문 3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를 찬송합니다. .
다윗과 같이 하나님과 늘 가까이 살았던 사람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시련 앞에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 멀리 계셔서 도와주지 않으시고 자신의 신음 소리를 듣지 않으시는 것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계속 부르짖지만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응답하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당신의 상황과 느낌으로 인해 하나님이 당신을 버리셨다고 믿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를 버리시지 않기 위해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셨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꽤 오래 전에 수요기도회를 마쳤는데 아내 되는 집사님이 저에게 얼굴이 하애지면서 목사님 어떡해요.”우는 것입니다. 저희 집에 오셔서 예배 드려주시면 안되나요? 수요기도회를 마치고 그 집사님의 집에 들어갔을 때 그 남편은 이미 집에 와 있었습니다. 대를 감은 부위가 피에 흥건히 접어 있었습니다. 당시에 상황을 남편이 설명합니다.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기계에 오른 손을 가운데 집어 넣었다고 미처 빼내지 못해 가운데 손가락이 산산 조각이 낫다는 것입니다.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잘라야 봉합수술이 안되고 잘랐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이 생생하게 재현되는 것 같이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이러한 순간 목회자가 설교할 때 제일 난감합니다. 그때 제가 설교했던 본문이 시편 22편 1-3절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 집사님의 내외분과 함께 울면서 예배를 드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때로는 버림받은 것처럼 느꺼지는 순간에도 하나님 앞에 있으면 위로와 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찬양을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세상의 노래는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곳이 임재하시는 성전입니다. 우리가 찬양할 때 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있습니다. 찬양을 할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신뢰로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으면 진정한 찬양이 될 수가 없습니다.
시편 134편 2절입니다.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손을 든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나의 전부가 되며 나의 모든 것을 주께 드리겠다는 헌신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찬양하게 하기 위하여 만드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십니다.
찬양은 인간편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가장 가치있는 행위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우리의 존재가 찬양의 이유가 되게 해야 합니다(엡 1:3-6). 찬양은 하나님 그분을 자랑하고 선포하는 일입니다. 찬양은 예배 순서가 아니라 삶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경험하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2.찬양은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적입니다
은혜받기 위하여 찬양을 많이 하는 것이 맞는 말일까요? 틀린 말일까요?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놏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찬양은 은혜받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돌려드리기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찬양을 드릴 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양은 은혜를 받는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찬양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이사야 43장 7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찬양을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절박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앞에는 시퍼헌 홍해바다가 혀를 날름거리고 있고, 뒤에는 애굽 군대의 추격이 있는 상황 속에서 그들은 기도하지만 원망과 푸념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0절 하반절에서 1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고아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하느냐.'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자 바다가 육지 같이 갈라졌습니다. 이스라앨 백성들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와 같이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아직 상황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애굽 군대들도 바다 가운데로 들어와서 빠른 속도로 달려옵니다.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건너고 애굽 군대눈 바다 가운데 들어섰을 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라고 했을 때 애굽 군대들이 몰살당하게 됩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모세는 홍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출애굽기 15장 1, 2절입니다. “이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그들이 기도했기 때문에 홍해바다가 갈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찬양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찬양한 것입니다. 찬양은 은혜의 수단이 아닙니다. 찬양은 삶의 목적입니다.
사도행전 16장 25절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극도의 수치심과 매질로 인한 고통이 극심했습니다. 게다가 흉악한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바울과 실라는 한 밤중에 기도하고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고 있습니다.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서 옥문이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찬양을 통해서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벗겨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옥문을 여는 열쇠가 찬양이라고 여기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찬양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옥문을 열리게 하고 차꼬를 풀게 하셨습니다. 기도와 찬양을 드렸기 때문에 이런 기적같은 일이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옥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거나 찬양한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고 찬미할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전자는 내 기도를 크게 읽었고, 후자는 하나님을 크게 했습니다.
전쟁에서 찬양을 통해서 승리로 이끌었던 사건을 아십니까? 역대하 19장에 보면 전쟁에서 패하고 돌아온 여호사밧은 선견자 예후를 통해 하나님의 책망을 받습니다. 그 후에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과 마온 사람들의 연합군이 여호사밧을 치러 왔^습니다. 이에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금식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역대하 20장 12절에 보면 여호사밧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를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모압과 암몬과의 전쟁을 금하셨습니다(신 2:4, 5, 9, 19). 그래서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특이한 것은 찬양대가 예복을 입고 이스라엘 군대 앞에서 이렇게 찬송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라(21절).” 22절에 보면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러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이 전쟁에서 여호사밧이 승리하였습니다. 찬송할 때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도저히 승산이 없는 전쟁에서 승리케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승리를 약속하셨기 때문에 믿고 찬양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들이 찬양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약속하신 것은 아닙니다. 찬양은 승리를 이끌어내는 도구가 아니라 이미 주신 승리의 결과로 터져 나오는 극히 자연스러운 선포이고 믿는 자의 태도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찬양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새해에 표어로 주신 성경 구절, 사도행전 2장 47절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찬양할 때에 구원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원망과 불평이 가득찬 세상 가운데서 신자들이 하나님을 찬미할 때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로 인해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게 되고 구원받는 수가 날마다 더하게 됩니다.
찬양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찬양을 잘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찬양을 늘 하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 위하여 항상 영혼의 시동을 끄지 마십시오(시 143:6). 시동을 끄지 않는다는 것은 늘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의 관심사에 나의 관심을 집중하는 것입니다(욥 1:21-22).
“찬양은 크리스천의 삶에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입니다. 찬양이라는 단어에는 두가지 방향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방향과 간접적인 방향입니다. 직접적으로는 하나님을 높이거나 혹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외감을 표현함으로써 찬양하는 것입니다. 간접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칭찬하거나 크신 분으로 보이게 해드림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밥 소리기-Bob Sor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