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부를 극복하는 지혜(약 2:5), 김덕선 목사
야고보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당할 수 있는 다양한 시련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가난과 부에 대한 시련입니다. 가난에 대한 시련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데 부에 대한 시련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의 문제는 자신들의 문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부자들의 문제 역시 극심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부자는 재산이 늘어나면서 염려와 유혹도 늘어납니다. 부자는 교만하고 자신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한끼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재물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자만 자기만 위해 살고, 약한 자를 착취하려는 시험에 빠집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도 부유한 사람들에게도 시련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9-10절에서는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 둘 다에게 자랑하라고 권면합니다. 자랑하라는 것은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각자는 자신이 처한 환경 내에서 기뻐하고 심지어 자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가난과 부에 대한 참된 반응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난은 불행이고, 부유는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합니다. 신자는 비록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비천한 자리에 처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인내함으로 보다 높은 지위를 지위를 얻게 될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는 비록 가난하지만 영적으로 자신의 부요함을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해야 합니다. 부자는 자신들이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뽐내지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 부자는 재물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이 영적으로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의 삶을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아무리 부요한 자라고 할지라도 그 부요함을 영원히 누리지는 못합니다. 마치 꽃이 시드는 것처럼 부뿐만 아니라 생명도 곧 시들어 버릴 것이기 때문에 겸손해야 합니다(벧전 1:24). 그러기에 부한 자는 일시적인 부나 아름다움을 추구하거나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낮아져야 합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부유함은 행복과 안정을 제공해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생각지 않은 위기를 만나면 풍랑을 만난 배처럼 좌초하게 됩니다. 작열하는 태양아래 뜨거운 바람까지 불면 풀은 마르고 꽃이 떨어지는 것처럼 하루아침에 쇠잔해집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절에 보면 정함이 없는 재물이라고 표현합니다.
성경은 부가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다만 돈을 어떻게 벌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17장 11절에 보면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19절입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내가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라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교회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신분이나 학벌이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차별 대우해서는 안됩니다.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올 때 의 경우를 예로 듭니다. 부유한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면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고, 가난한 사람이 들어오면 서 있건 바닥에 앉으라고 합니다. 부유한 사람은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고 가난한 사람은 무시해도 좋은 사람으로 판단하고 차별하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는 것은 잘못된 동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상대방을 위한 판단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판단이다. 이러한 구별 행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을 서로 분리시키며 피차 시험에 들게 하기 때문에 악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며(요 8:15), 확고한 믿음이 결여된 것임니다.
신자가 차별하는 것은 복음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모든 사람이 같이 대해야 합니다. 복음으로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셨습니다. 부자는 종종 가난한 자들을 법정으로 데리고 가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함으로 그들의 권세를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기 위해 사용합니다(약 2:6-7)
세상사람들은 부와 가난으로 차별 대우하는 것은 당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부에 대한 차별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억누르기 때문입니다(약 2:1).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부의 문제로 인해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반하는 행동입니다(6절).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의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것은 그분이 부요하셨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가난한 자, 혜택받지 못한 자, 불우한 자 억압받는 자들의 입장에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것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실천하는 것입다(레 19:18; 마 22:39). 곧 상대방을 외모로 구별하지 않는 것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5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나님은 세상에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부요함은 믿음과 사랑입니다(8절). 부의 문제로 차별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부의 문제와 상관 없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