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말로 인한 상처를 극복하는 지혜(약 3:8), 김덕선 목사

liefd 2024. 9. 1.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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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너무 많이 해서도 안되고 너무 간략하게 해서도 안됩니다. 상처주는 말을 너무 많이 해서는 안됩니다. 격려와 위로의 말은 너무 간략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책에서 무심코 내뱉는 말로 사라지지 않고 우주의 어느 공간에 저장된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123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서 31절에도 말을 많이 하는 선생이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을 경고합니다. 그렇다고 선생이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 인해 상처를 주는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말로 인해 세우고 격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야고보서 38절에 보면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입니다. “ 즉 혀는 언제나 잠시동안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다가 갑자기 사납게 돌변합니다. 야고보서 126절은 경건한 사람은 자기 혀를 재갈 물려야 한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하며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 것이라.“공격적인 말에 익숙하거나 유머를 한다고 하면서 남에게 쉽게 상처를 주거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말로 인해 끼치는 해로운 영향력은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 남아 있습니다. 귀신은 말로 인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하고 부홀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만류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이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왜 우리는 말로 상처를 줄까요?

 

본문 2절에 보면 우리는 다 말에 실수가 많습니다.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말의 실수를 대수롭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말로 인한 상처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혀의 영향력을 말의 재갈, 배의 키, 나무에 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재갈이 말의 방향을 정하고 키가 배의 방향을 정하는 것럼 혀는 인간의 삶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재갈과 키가 맹렬한 말과 폭풍을 제어하는 것처럼 혀는 삶을 제어하는데 핵심 요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혀를 제어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말로 상처를 받을 때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저렇게 말할 수 있지? 그것 자체가 인정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볼 때는 그렇지만 상대방이 볼 때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람이 한 말에 묶이지 아니하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효과적인 대응은 하지 못하면 고통과 불안이 상당히 오래갈 수가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다음부터는 이렇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가 있고 말로 이한 상처에서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그 마음의 의도를 헤아리면 충분히 이해가 되고 녹아지게 됩니다.

 

야고보는 혀의 페해를 불에 비유합니다.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지 모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선불로 인해 서울 면적 2배가 잿더미가 되고 44명이 사망자가 속출했다고 합니다 원인은 전력선에 불이 튀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원인은 더 축적해야 한다고 합니다. 불길이 얼마나 거센지 400킬로 떨어진 우주에서도 연기 기둥이 포착된다고 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혀가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혀는 이 세상의 악의 축입니다. 혀는 온몸, 전인격을 더립힙니다. 혀는 계속해서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릅니다. 젊었을 때는 징징거립니다. 나이가 들면 비판을 합니다. 실패를 할 때는 변명하고 다른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삶의 모든 고비마다 우리는 말로 악을 토해냅니다. 야고보는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온다고 심각하게 다룹니다.

 

우리는 수족관에서 돌고래, 바다 표범들이 사람의 명령을 따르는 것을 봅니다. 서커스에서 새, , 낙타 코끼리, 심지어 호랑이가 틀에 박힌 연기를 하는 것을 봅니다. 동물이 제대로 하지 못하면 조련사가 다시 소리쳐 명령하면 따라 합니다. 그런데 혀는 길들일 사람이 없습니다. 인류는 모든 종류의 동물을 정복했지만 자신은 정복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혀를 통제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본성은 혀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혀로 내뱉는 말은 쉬지 않는 악을 내뿜는 것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혀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씩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실 이로다하루 세 번 외운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 험담과 저주를 토해냅니다. 이러한 이중적 언어의 부당성을 샘과 나무에 빗대어 지적합니다. 샘은 일관됩니다. 샘은 동일하게 깨끗한 물을 뿜어냅니다. 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을 한꺼번에 낼 내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무화과나무에서 감람열매를, 포도나무에서 무화과를 맺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말을 고치기가 어려운 것은 마음으로 쌓아온 것을 말로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234-35절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그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평소에 마음에 쌓아온 것을 말로 표현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운명에 대해 이렇게 토로합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 망하게 되었다고 탄식합니다(6:5). 시편의 저자는 훌륭한 삶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조언합니다.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내 혀를 악에서 금하며 내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쓴 말은 쓴 마음에서 나오는 거입니다. 비판적인 말은 비판적인 정신에서 나옵니다. 비방하는 말, 무정한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는 혀를 제어할 수 없지만 성령에 의해서 지배되며,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과 은혜로 말미암아 제어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거룩함을 열망하려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우리가 말로 실수하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힘입으십시오. 우리가 말로 실수하지만 하나님은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의 혀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반드신 사람들을 축복합시다.

 

말로 상처를 받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마음이 상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선입견을 가지고 폭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19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에 신경을 쓰지 말고 상대방의 의도를 헤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상처주는 말을 계속 되돌리지 말고 의도를 파악하는 것으로 멈춰야 합니다. 말에 실수가 있으면 사과하고 다음부터 고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평소에 우리가 말하는 습관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서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려야 합니다(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를 용서함 같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같이 우리도 사람을 그렇게 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지배와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만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과 친절을 베푸는 말로 격려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을 하는 데 있어서 특별히 신경써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말은 아무리 좋은 의견이고 사실이라 하더라도 덕을 세우는 힘에 힘써야 합니다. 불필요한 말은 최대한 자제하고 꼭 필요한 말을 해야 합니다. 실제 상황에 유익을 끼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용서전문가인 버지니아대학의 에버레트 워딩턴 교수는 '상처의 기억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떠올리고, 입장을 바꿔 상대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용서치유의 핵심 키워드라고 합니다. 그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용서의 시작인 '이해'의 마음이 생기게 되고, 차츰 연민의 감정도 생기며, 나아가 진심으로 축복해주고 싶은 마음까지 생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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