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자녀 이렇게 대화하라(엡 6:4), 김덕선 목사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우리 가정이 건강한 가정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가정이 축복의 가정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뭔지?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먼저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자녀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져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의 최고의 모델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떠한 관계로 묘사하고 있을까요? 마태복음 3장 17절 말씀입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아버지가 자녀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녀, 내가 기뻐하는 자녀라고 불렀으면 좋게쑈습니다.
시편 127편 3절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독특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니라". 자녀는 부모가 짊어져야 할 짐이나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요 상급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잘 키우라고 맡겨주신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상급입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신 축복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은혜로 잘 양육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귀하고 복된 자녀를 주셨는데 어떻게 잘 양육할 수 있을까요?
에베소서 6장 4절 말씀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어떠한 경우에도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해서는 안됩니다. 골로새서 3장 21절 말씀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하지 말찌니 낙심할까 함이니라".
이것은 무조건 자녀들에게 잘 해주라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책망하고 징계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녀의 마음에 오랫동안 고통이나 상처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격한 분노를 유발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강요하거나 낙심케 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저는 "부모와 자녀의 대화 이렇게 하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며 고통을 준 사람이 누구인가?
기독교 가정사역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나에게 상처를 주며 고통을 준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40.7%가 아버지, 32.1%가 어머니, 27.2%가 집안식구를 뽑았습니다. 1, 2, 3위가 다 가족이었습니다. 소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기쁨을 주어야 할 가족에게서 우리는 가장 많은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고통의 주범이 바로 언어입니다. 가족 간에 오가는 언어가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주범이고 부정적 자아상을 만드는 주범입니다.
언어는 사람의 자아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만약 자녀들에게 " 이 병신 같은 놈". 어디 마음에 드는 곳이 한군데라도 있어야지", 네가 잘하는게 뭐냐"는 식의 말을 들으면 자아상이 부정적으로 형성됩니다. 그러나 "야, 참 잘 한다", "대단한데", "수고했다", "네가 제일이다", "넌 소중한 존재다", 넌 하나님의 자녀고 귀한 존재야"라는 말을 들으면 긍정적 자아상이 형성됩니다.
잠언 27장 21절 말씀입니다.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 도가니는 은을 만들어 냅니다. 풀무는 황금을 만들어 냅니다. 칭찬은 사람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간혹 어떤 부모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에게 칭찬할 게 있어야 칭찬을 하죠".
칭찬에는 두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는 칭찬을 찾아서 하는 것입니다. 조그만 장점이라도 발견되면 계속 칭찬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하나는 문제가 있는 것을 더욱 칭찬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못하는 것이 있고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못하는 것만 문제 삼으면 더 못하게 되고, 잘하는 것마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잘하는 것을 찾아 칭찬하면 더욱 잘하게 되고, 못하는 것도 잘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실수와 허물이 많은 사람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예수님은 그것을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 말씀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는 흔들리는 믿음을 가졌지만 앞으로 반석을 가진 믿음의 소유자가 될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칭찬은 잘하는 것만 부각시켜서 수고했다고 말해야 합니다. 한번은 부부가 밖에 나갔다가 돌아왔는데 아들이 부엌이 깨끗하게 씻어 놓았습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칭찬합니다. 다른 것은 제대로 하는 것이 없는데 그릇 하나는 잘 씻어 놓았네!. 옆에 있는 어머니가 공부를 그렇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은 칭찬이 아닙니다. 칭찬을 할 때에는 칭찬만 해야 합니다. "부엌을 깨끗이 해 놓았구나, 수고했다."
또한 부모는 자녀와 대화를 할 때 마음을 닫히게 해서는 안됩니다. 마음을 닫히게 하는 언어란 일방적, 지시적, 명령적, 위협적, 단정적 언어입니다. 간혹 거리에서우는 아이를 부모가 달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뚝 그쳐", "입 다물어", 그러면 두고 갈꺼야", "매맞는다", ""혼날 줄 알아", "아빠한테 이른다". 이렇게 위협하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 어머니들의 자녀교육법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녀들이 울음을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서러워서 울게 됩니다. 아이는 속으로 "엄마는 내 마음은 이해해 주지 않고 협박만 한다고 생각해서 억울하고 분해합니다. 물론 아이들은 논리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지 못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을 품게 되고 마음에 분노가 생겨서 더 크게 웁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아이들은 결국 마음의 문을 닫게 됩니다.
우는 아이는 울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누나 집에 놀러가서 너무 즐거웠는데 이제 집에 가자고 하니 울고 싶은 겁니다. 그때 부모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누나가 더 놀면 좋겠지만 이제 누나도 숙제를 하고 씻고 자야 돼, 내일 다시 오면 누나가 놀아줄꺼야, 누나에게 안녕해 봐. 아이가 그럼 내일 또 올거야. 그럼. 누나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누나랑 손가락 걸고 약속하자.
부모는 자녀와 대화를 할 때 마음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권면하고 설명하고 동위를 구하고 부탁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와 대화를 할 때 어떻게 마음을 여는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먼저 추궁형에서 이해형으로 대화로 바꾸어 보십시오. 요한복음 8장 1-11절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인에게 예수님은 "왜 긴음했느냐"고 추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모가 시험지를 갖고 온 자녀에게, "이거 왜 틀렸어", 혹은 이렇게 쉬운 문제를 틀리다니 말이 돼?" 라고 말하면 자녀는 민망해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다 틀렸어"라고 하면, "예, 그만 착각을 해서 잘 아는 문젠데 틀렸어요. 그래 속이 많이 상하겠구나 격려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와 대화를 할 때 해답형에서 질문형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라고 물으십니다.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예레미아,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 하더이다" 대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니밍 다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랴 하느냐?고 묻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와 같이 부모가 자녀들에게 먼저 해답을 제시하지 말고 질문을 해야 합니다. 아빠 아 특별활동을 하는데 나 축구부에 들어갈까요?, 영어회화부에 들어갈까요? 영어화회부에 들어가서 앞으로 영어를 잘해야 해. 이렇게 자란 사람은 우유부단하고 항상 누구의 지시를 받아야 하고, 의존적이 됩니다. 그러나 네 생각에는 어디에 들어가는 좋겠니, 네 생각을 좀 이야기 해보겠니? 질문형 대답은 이렇게 판단력, 결정력, 창의력을 갖게 해주며 마음을 열어주고 지속적인 대화가 가능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대화할 때 명령형에서 권면형으로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실 때 위압적이거나 명령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원어의 표현을 보면 "저를 따라 오십시오. 제가 당신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명령을 하시더라고 위압적으로 하시지 않고 권면하는 형식으로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이제 TV끄고 네 방에 들어가서 공부해? 그렇게 하면 마음이 닫혀서 자기 방에 가도 공부가 싫어지고 지겹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그만 쉬고 공부하면 어떻겠ㄴ이? 네 알았어요. 5분만 보고 공부할께요. 그렇게 하면 열린 마음이 되므로 공부를 해야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을 여는 대화를 하는게 중요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대화를 하면서 많은 상처를 받는 또 다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YOU 메시지 법에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I 메시지를 많이 사용하는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YOU 메시지는 너는 중심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I 메시지는 나를 중심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늦게 왔을 때 어머니가 "너 왜 이제 오니?"라고 말하면 대부분 꿀먹은 벙어리가 됩니다. 되풀이해서 "어디 갔다 왔어"하면 마지못해 이렇게 저렇게 되어 늦었노라고 퉁명스럽게 말합니다. 속으로는 조금만 늦으면 야단치고 잔소리한다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이렇게 YOU 메시지는 무시당하는 것 같고 추궁받는 것 같아 불쾌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늦게 온 아이에게 반갑게 맞이하면서 "이제 왔어?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느지 몰라. 오다가 무슨 사고라도 났는지 해서 말이야". 라고 말하면 아이는 "엄마는, 친구랑 좀 놀다가 왔어요"하고 미안한 표정으로 말하게 됩니다. 이럴 때 아이는 엄마가 나를 걱정하고 계셨구나 앞으로 걱정을 안 끼쳐 드려야지"라고 생각하게 되고 스스로 늦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I 메시지를 사용하면 수용적이 되고 긍정적 친근감을 갖게 됩니다.
누가복음 16장의 탕자의 아버지는 YOU 메세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 너 그 지산 어떻게 했느냐? 어쩌다 이 모양이 됐느냐? 꼴 좋다?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대신 I 메시지로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보니 너무 기쁘다. 다시 돌아오니 너무 기쁘다"고 말하면서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 보겠습니다. 아빠가 피곤해 있는데 아이가 와서 뭔가 이랴기 하려고 합니다. 아빠가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시다. "나중에 말해, 저리가". 그럴 때 아이는 알았어요, 그러면서 나는 귀찮은 존재로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는 절망, 단절, 좌절을 가져옵니다. 이것이 YOU 메시지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아빠가 아이에게 " 아빠가 지금 몹시 피곤하거든 나중에 애기하자". 그렇게 하면 아이는 "네 아빠가 지금 피곤하시구나 편안하게 해드려야지". 그래서 아이는 아빠를 이해하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이제 부모된 우리가 자녀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요 상급인 줄 알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잘 앙육하는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항상 긍정적인 자아상을 심어주는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칭찬을 통해서, 마음을 열어주는 대화를 통해서, I 메시지를 통해서 행복한 자녀로, 위대한 자녀로 양육하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