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 신드롬에서 벗어나자(눅 7:31-32), 김덕선 목사
마을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목동이 있었습니다."늑대가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어!"두 번인가 세 번쯤은 소년의 거짓말이 통했습니다. 마침내 어느 날 늑대가 정말로 나타났습니다. "늑대가 나타났다! 정말 늑대가 나타났다!" 소년은 진심으로 외쳤습니다. "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겠지 뭐 ~"마을사람들은 그곳으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양떼들은 늑대에게 모두 잡아 먹히고 말았습니다. 그제서야 양치기 소년은 거짓말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후회를 해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늑대의 신드롬에 빠져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거짓말에 속는 것이 계속되다 보니 사실을 말해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진실이 드러나도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늑대 신드롬은 거짓에 만연되어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신자들 역시 늑대 신드롬에 빠져 있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1992년 다미 선교회에서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했다고 거짓말로 드러났습니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가 입은 폐해가 엄청나게 큽니다. 종말신앙이 약화되는 순간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1.그들이 이렇게 반응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상대방의 행동에 반응하지 않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의도적으로 싫어하는 경우입니다.
둘째,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서 반응하지 않고 참여하지 않습니다.
셋째, 잘못 알고 있거나 다르게 알고 있는 경우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장터이 비유는 세 번째 경우에 해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의 사람의 특징을 아이들의 놀이에 비유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세대의 사람이란 당시의 종교적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상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 평일날 장터에서 두 편으로 나누어져 놀고 있는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에 비유하십니다. 한 편이 피리를 불면 다른 편이 곡조에 맞추어 춤을 춥니다. 한 편이 장례 흉내를 내어 슬피 울며 곡을 하면 다른 편도 그 곡소리에 맞추어 울면서 가슴을 칩니다. 아무리 설득해도 그들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결혼식놀이는 예수님의 복음의 메시지를 전했을 때를, 장례식 놀이는 세례 요한의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했을 때를 각각 가리킵니다.
수님께서는 당시에 놀이의 비유를 들면서 놀이가 제대로 잘 되지 않을 때를 말씀하십니다. 한 쪽 아이들이 상대편의 행동을 따라 주지 않습니다. 그때에 아이들은 불평하고 서로에 대해 가 나무랍니다. 같이 반응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해주지 않기 때문에 재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은 어떠한 경우든 그냥 앉아 있을 뿐 참여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반응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은 위대한 메시야의 영광과 승리를 기대했지만 그렇지 않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슬피 우는 것은 장례식 놀이인데 금욕을 강조했던 세례요한의 사역을 말합니다.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하에서 해방될 것을 기대했지만 오히려 더욱 절제된 생활을 강조하자 실망하여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메시야를 기대했고, 자신의 생각과 목적을 이루어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자 전혀 반응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2. 이래도 저래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시에 종교지도자들은 세례요한의 회개의 메세지에도 슬픔으로 응하지 않고, 예수님의 복음 메세지에도 기쁨으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래도 저래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비난만 일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태도를 정죄하셨습니다. 그들은 냉소적이고 회의적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는 다니지만 회개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심령이 왜곡되어 있고 뒤틀려 있습니다.
본문 30절입니다.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느니라". 그들은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 욕심을 채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고대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은 가족이었습니다. 대부분이 대가족이었습니다. 어떤 가족 공동체 안에서 슬픈 일이 생기면 모든 가족이 슬퍼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가족이 슬퍼하고 있는데 혼자서 즐거워하고 있다면 그는 가족 공동체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대안이 제시된다 하더라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실상 이들은 회개와 구원에 관심도 없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습니다. 결국, 이 세대의 사람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만 옳고 확고해서, 도무지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굽힐줄 모른채 상대방만을 탓하며, 상대방이 바뀌기만을 요구하는 태도가 바로 이 시대의 바리새인적 태도입니다. 아직도 내 주장, 내 이익, 내 습관, 내 경험, 내 자존심, 내 감정만을 앞세워, 말씀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요?
이와 같이 당시 유대인들도 자기 의를 내세우며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비난하고 멸시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와서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그를 귀신들린 자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광신적이고 귀신이 들렸다고 조소했습니다. 마치 장터의 아이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따라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평하고 비난하는 모습이 이 세대 사람들도 그와 같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도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 보다는 자기 편에 서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세상 안에 서 있지 않은 사람들은 공공의 적으로 여깁니다.
한편 인자가 와서 먹고 마신다고 먹기를 참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경멸하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자기들처럼 금식을 하지 않고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폭언을 일삼았습니다. 이는 예수를 정죄할 뿐만 아니라 그를 이단자로 취급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사람이 될 뿐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 자체를 거부합니다.
당시의 종교적 지도자들의 변덕스럽고 일관되지 않는 점들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들이 세례 요한의 금욕주의에 대해 비난했다면 반대로 예수님이 오셔서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 환영해야 했지만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일관성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싫어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메시지 자체를 받아들이기를 싫어하였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뚜렷한 이유도 없이 비난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피리를 불어도 반응하지 않고 애곡하여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육신에 속한 일에는 그렇게 반응을 잘 하면서도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별로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3. 타성에 젖어 무뎌진 신앙의 날을 어떻게 갈아야 할까요?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공동체라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슬픔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당시에 종교적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33절입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라고 비난하였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34절입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유익만을 위하는데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셰레 요한의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다고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합니다. 이들은 신앙은 가졌지만 냉소적입니다. 신앙을 가졌다고 하지만 비판적이고 생명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만족합니다. 아직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전파하신 복음의 소식을 듣고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니까 대식가요 술꾼으로 평가합니다. 그들은 영적인 일에 너무 무관심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죄악에 대해서도 눈물이 없고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도 기쁨이 없습니다. 지혜는 그 아들로 인하여 옳다 함을 받습니다. 지혜는 그 행함으로 인하여 옮다함을 얻게 됩니다. 오래 믿어왔다는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믿음의 결과로 달라진 것이 무엇인지 점검해야 합니다.
교회는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가족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이것이 불가능하지만 교회는 믿음으로 결속된 가족공동체이기 때문에 함께 반응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자들과 귀하게 여기고 함께 즐거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을 비판하고 교회의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이 교회 저 교회 옮겨다니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은 진리 자체를 미워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싫어하기 때문에 어떤 것으로도 그들을 만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신앙적인 태도가 잘못된 것입니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는다고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지혜의 자녀”란 예수님의 말씀과 세례 요한의 교훈을 따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세례와 예수님의 구원의 길을 받아들이고 기뻐할 것입니다. 성도들이 복음 때문에 세상에서 핍박을 당한다 하더라도 더 큰 위로와 기쁨을 얻게 되며 장차 복음이 세계 만방에 선포되고 옳다고 인정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소유한 사람들입니다(딤후 3:15). 그들의 변화된 삶과 의로운 삶은 지혜의 효력을 입증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예수님의 관심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면서까지 죄인들을 구원하는 데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열심이나 직분이 아니라 누구를 위한 것인가?에 의하여 차원이 달라집니다.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우상숭배에 불과합니다. 과연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섬기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아니면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일에 관심이 있는가? 자신의 신념이나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철저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의 관점에서 나 자신을 계속해서 바꾸어 가야 합니다.
톰 레이더의 교회를 부검하라”는 책에 보면 죽어가는 교회의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검한 교회들에서는 대부분의 교인들이 이런 자기희생적인 태도를 품었다는 증거를 별로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이기심과 특권의식으로 가득했습니다. 언제나 나 자신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필연적이었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교인들의 태도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은 교회입니다. 안타깝게도, 죽어 가는 교회에서는 타인 중심적인 교인들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 기능하는 신자들의 모임입니다. 교인들이 점점 각자의 취향을 주장하면 그 교회는 점점 더 교회가 아닌 곳으로 변해갑니다.
무뎌진 신앙의 날을 갈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달에 한번은 조용한 하루를 가져보는 것입니다. 존 스타트는 매월 하루를 조용한 하루라고 정하고 자신의 일정표에 Q라고 적었습니다. 그는 이 날에는 어떤 사람에게도 방해받지 않은 장소에 들어가서 12시간 정도를 홀로 보냈다고 합니다. 자신의 삶과 사역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되돌아보고 분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시작하기 전에 15분 동안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면 나중에 4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 미리 하루의 일을 생각해서 우선순위를 정하고 하루의 업무를 조직화한 사람은 아무 생각없이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제임스 보트킨(김명호, 쓸만한 도끼 한 자루 준비합니다). 지금은 도끼날을 갈아야 할 시간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나이 든 나무꾼과 젊은 나무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힘을 앞세워 쉬지 않고 나무를 팬 젊은 나무꾼과 달리 나이 든 나무꾼은 쉬어가며 나무를 팼습니다. 누가 더 많은 장작을 만들었을까요? 당연히 젊은 나무꾼의 결과물이 많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나이 든 나무꾼의 것이 더 많았습나다. 당황하는 젊은 나무꾼에게 나이 든 나무꾼은 “나는 쉬는 동안 힘을 보충한 것은 물론이고, 무뎌진 도끼날을 갈았다네”라고 충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