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예배를 드리고 싶다, 양명호
진정한 예배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경험했다(단 3:28-29). 느부갓네살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많은 신중에 능력있는
한 신에 불과했다.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섬길 신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통해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이 아니라 금을 부어서 만든 금신상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나 능력이나 사랑을 경험했다고 해서 그 자체만으로 진정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예배를 드리기 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누가복음 4장 43-41절에서 회당이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귀신의 외침이 진정한 예배가 되지 못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내가 아무런 관계없이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은 예배의식을 행하고 있는 것아다(막7:6-7). 관계성을 잃어버린 곳에서는 참된 영성이 사라지고 공허한 종교성만 생겨난다. 예배의식에 도취해 우리 마음이 크게 감동할지는 몰라도, 그는 이미 헛되이 경배하는 자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바로 이런 관계였다. 예배는 이런 관계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은 에배에 앞서 예배자들과 그런 관계를 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분이 기르시는 백성이기 때문이다(시 95:6-7).
우리가 하나님과 이런 관계에 있을 때에만 우리는 그 어떤 다른 이유나 목적에서가 아닌 오직 하나님으로 인하여 예배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예배가 기대지향적인 의식이 되거나 혹은 결과지향적인 일이 되고 만다. 예배가 기대지향적이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뜻하는 바를 이루는 데에 예배의 동기가 있다는 말이다. 필요를 채운다든지, 성공을 이룬다든지,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든지, 우리가 바라는 무언가를 성취할 목적으로 예배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예배가 결과지향적이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얻은 후에나 그것으로 인하여 감사하며 예배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욥은 10남매 자녀가 모두 죽고 자신의 소유를 다 잃어버리고 나서도 욥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분의 이름을 찬양한다.
진정한 예배는 예배자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충실한 예배다. 욥이 하나님이 예배하는 근거는 주신 것이나 다시 거두어 가신 것에 있지 않았다. 주신 이와 거두신 이에 있었다(욥 1:21).욥은 그가 누린 복이나 그에게 닥친 상황이 아니라, 그가 예배하는 근거를 하나님께 두었다.
예배의 이유는 사건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 있다. 예배의 동기는 내 감정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 있다.
간증은 성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처한 상황에 몰두해서 지금까지는 나는...나는..나는 말라 가는 풀과 같습니다(시 102:3-11). 라고 한탄하던 것이 나 자신과 그 상황에서 눈을 떼고, 그러나 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본다(시 102:12).
우리를 예배하도록 하는 것은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진정한 예배는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는 주의 백성이라는 고백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고백이 우리가 예배하는 근거이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모든 것이 주관자가 되심을 인정하며 그의 선하신 섭리 안에서 예배할 수 있도록 한다. 그것에 근거할 때만 우리는 상황을 넘어 하나님께 집중하며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다.
진정한 예배는 환경에 기인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견한,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는 정체성에서 진정한 예배가 기인한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왜냐하면 그는 우리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가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다(시 95편).
예배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길 때 예배가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우상을 향한 갈증을 드러냈고, 온 힘을 다해 물이 새는 터진 웅덩이를 팠다. 결국 멸망이라는 어리석은 결말을 맺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우리 마음 속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으면 삶의 행동들 속에서 자연스레 그것이 드러난다.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는 아브라함의 고백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없이는 결코 선포할 수 없는 말이다(창 13:9).
다윗의 마음을 가진 예배자가 있고, 미갈처럼 생각하는 예배자들이 있다(삼하 6:21-22).
오늘날 사람 지향적인 예배로 탈바꿈해 가는 모습을 경험한다. 예배자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만들어 주고 소위 은혜를 끼치도록 하려는 지극히 인간적인 동기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예배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만남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실재하는 특별한 만남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행하신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그 예배의 자리에 함께 계시며 우리의 예배를 받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준비하고 예배해야 한다.
또한 믿음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우리가 예배의 자리를 떠나 있는 곳에서의 삶, 즉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신 것처럼 나와 나의 찬양을 받으신다. 나와 분리된 나의 찬양만으로 기뻐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그런 예배는 받지 않으시고 헛된 것이 된다(사 1:11-13).
하나님 보시기에 나는 과연 어떤 예배자인가?
만약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살다가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린다면 우리도 우상숭배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된다.
사울 왕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나 순종에 관심이 없었다. 사울이 사무엘의 책망을 받고 나서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 하나님을 거역한 일에 대하여 엄히 말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를 높여달라고 사무엘에게 부탁하고 있지 않은가? 사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조건없는 순종으로, 즉각적인 순종으로, 온전한 순종으로 응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창 22:12).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그에 맞게 대접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온 우주의 통치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에 맞게 우리가 그를 의지하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한 신뢰,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순종으로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을 말한다.
순종의 결과에 눈이나 마음도 두지 말고, 오직 말씀하신 하나님에감 두고 기꺼이 순종하자.
왜 우리는 주일이 되면 교회로 모이는가?
예레미아 7장 8-10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오면서 기대하는 것이 있었다. 성전에 나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만 하면 내가 어떻게 살았든 상관없이 모든 것이 괜찮아지리라는 기대다. 이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안전하게 될 것이고 모든 일이 잘 되리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나서 다시 동일한 삶을 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다음에 와서 또 제물을 드리면 되겠지 하고 생각한다.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성도답게 살아야 하지만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으로 그런 것들을 대신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들에게 예배는 참 좋은 수단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잘못된 거짓말을 의뢰한다고 책망하셨다. 예배는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수단이나 방편으로 사용될 수 없다. 여로보암은 왕이 되었지만 예배를 이용해서 백성들을 자기에게 묶어 두기 위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다.
예배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다른 목적을 이루려는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예배는 복을 받기 위해서든, 사업의 번영을 위해서든, 진학이나 결혼이나 건강을 위해서든, 안전을 위해서든 무엇인가를 바라는 것들을 위해서 예배한다면 그것은 예배가 수단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