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종교개혁자 얀 후스를 만나다, 토마시 부타
나는 자신의 악한 욕망 때문에, 어렸을 때 빨리 사제가 되어 좋은 집에 살며 화려한 옷을 입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성경을 알게 되면서 그것이 악한 욕망임을 알았다.
얀 후스는 선지자 사무엘처럼 그의 어머니에 위해 소년 시절부터 주 하나님께 바쳐졌다. 그의 어머니는 빵을 구워서 교장 선생에게 갖다 주기 위해서 아들을 데리고 피라하티체에 있는 학교로 가는 도중에 길에서 일곱 번 무릎을 꿇으며 기도하기를, 자신의 아들이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찬양을 돌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하였다.
양 후스는 시골 후시네츠를 떠나 프라하로 떠납니다. 거기서 카렐 4세가 세운 프라하 대학 총장이 되었다. 총장 연설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진실로 저는 두려워 떨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저분만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그래야 합니다. 모두가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기대해야 하고, 어느 누구도 자신의 힘을 믿고 자만해서는 안됩니다.
1402년에 베들레헴 채플에서 당시에 이미 인정받는 대중적인 설교자가 되었다. 149년이 후스의 명성이 절정에 달한 해였다면 그의 인생에서 두 번째 중요한 전환의 시점은 1412년이 된다. 갈등과 불화의 해였다. 후스는 프라하를 떠나 도피할 것인지, 아니면 프라하에 남아 있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 앞에 서게 된다. 결국 후스는 푸라하를 떠나 사골로 내려간다.
프라하에게 있는 사람들에게 쓴 편지 가운데,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억압받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후스는 11월 3일에 콘스탄츠에 도착했으나 11월 28일 체포되어 여러 곳에서 수감생활을 한다. 후스는 공의회에 의해 이단으로 선고를 받아 1415년 7월 6일 콘스탄츠 화형장에서 화형을 당한다. 그의 유골은 라인 강에 뿌려졌다.
이 도시의 모든 시민이 무장을 하고 그가 죽음을 향해 갈 때 동행했습니다. 교수대로 와서 무릎을 꿇고 팔을 펴고, 하늘을 향해 눈을 들고 매우 경건하게 특히 시편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님 안에서 나는 소망하였습니다. ”주님 당신의 손에“를 반복하여 그 주위의 사람들을 들을 수 있도록 기도하며 기쁨의 얼굴로 즐거워하였습니다.
콘츠탄츠 공의회에서 후스의 폭력적인 죽음은 체코 왕국에서 전 민족적인 분노와 폭동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크리스찬 교육의 핵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가장 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령칠은
지혜(슬기), 이성(지식), 의견(사리판단), 일깨움, 용기(견인, 굳셈), 통찰(깨달음), 선함(친밀 공경 받듦), 경외(두려워 함)
일곱 가지 영혼을 돕는 영적 자비
어리석은 자를 가르치는 것, 의심하는 자를 권면하는 것, 죄인을 치리하는 것, 슬픈 자를 위로하는 것, 죄를 용서하는 것, 불쾌한 것을 인내하는 것, 친구와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것
여덟 가지 행복
첫 번째 영적 가난, 두 번째 침묵, 세 번째 애통, 네 번째 공의에 대한 갈망, 다섯 번 째 자비, 여섯 번째 깨끗한 마음, 일곱 번째 영혼의 평화, 여덟 번 째 공의를 위해 혐오의 인내(온유).
육체를 섬기는 일곱 가지 자비
굶주린 자를 먹이는 것, 나그네를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는 것, 병든 자를 방문하는 것, 갇힌 자를 방문하는 것, 죽은 자를 장례하는 것
칠죄종
이것은 중대죄라고 한다. 왜냐하면 모든 죄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그 죄는 교만, 탐욕, 음욕, 질투(시기), 인색, 분노, 나태이다.
다른 사람의 죄에 동의함에서 오는 여섯 가지 죄
첫 번째, 다른 사람의 죄를 변호하는 것, 두 번째, 다른 사람의 죄를 돕는 것, 세 번째, 죄를 권고하는 것, 네 번째, 다른 사람의 죄를 승인하는 것, 다섯 번째, 다른 사람의 죄를 막는 것을 돕지 않는 것, 여섯 번째, 다른 사람의 죄를 처리하지 않는 것
신학자 그리고 교회 개혁자
얀 휴스는 주로 교회에 대한 주제를 연구했던 신학자였다. 서방교회의 분열시기가 되어서야 교회에 대한 신학적 글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 주제는 강력하게 종교개혁의 출발의 선두에 등장한다. 종교개혁은 교회의 내적 본질을 강조하였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인 영적육체이다. 에베소서에 나온다(엡1:22-23). 종교개혁 위해 특별히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비의 몸이라고 할 때, 로마 카톨릭은 종교개혁에 대하누 대응으로 교회의 성직위계제도적인 면과 법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얀 후스는 지상의 교회와 하나님의 교회를 구별하고 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교회와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에 대한 주제로 표현되고 있다.
참 하나님이시며 참인간이신 그리스도는 자신의 교회와 그의 모든 지체에게 영적인 삶과 활동을 하게 하신다.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골 2장).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골 1장).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사도는 교회의 몸의 일치를 보여준다. 우선적으로 은사와 섬김과 사역의 다양성은 모든 것 안에서 활동하시는 한분 영적인 주님으로부터 온다.
평화에 대한 이야기에서
인류의 구속자는 제자에게 두 가지 방법으로 평회를 제안하였습니다.
하나는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제자들과 작별하는 그날밤에 마지막으로 자비를 죽음 직전에 보여주었으며,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가장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선물로서 평화의 말씀을 남겼습니다.
두 번째는 누가복음 24장 36절과 요한복음 20장 19절에서 예수님이 부활한 이후에 여러 차례 “평강이 있을지어다” 며 평화의 축복을 합니다.
두 개의 평화가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입니다(요14:27).
이 평화는 세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자신과의 평화, 그리고 이웃과의 평화입니다.
이러한 모든 평화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평화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선함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평화의 하나님을 간구하십니다.
얀 후스는 영국 종교개혁자 존 위클리피의 영향을 받았다. 1412년 그는 흡사 100년후 마르틴 루터처럼 공개적으로 교황의 면죄부 판매, 성직매매와 당시 교회 부패 확산에 맞섰다. 그 때문에 교황에 의해 교회로부터 추방을 당하고 프라하에서 설교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후스의 추종자이자 변호사인 에로님 프라주스키는 역시 1416년 콘스탄츠에서 화형을 당한다. 스트로즈비의 야코우백은 후스의 후임으로 베들레헴 채플 설교자와 대학총장이 됩니다. 펠흐르지모프의 미콜라시는 초대후스파 감독이며 신앙 고백 저자이다. 페트르 헬치치키는 영향력있는 민중 사상가이다. 안 로키 차나는 초대 후스파 대 감독이며, 유명한 신학자이자 피라하 틴 성당의 설교가였다.
후스파의 종교개혁 프로그램은 1420년대의 4개 프라하 조항이라는 제목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사제들에 의해 자유롭게 선포될 것, 둘째 이종 성찬(평신도들에게 떡과 포도주를)시행할 것, 셋째 제들로부터 모든 세속적인 지위를 박탈할 것, 넷째,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죽음을 면치 못할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을 것.
후스파의 종교개혁가들은 당시 종교적, 세속적인 권력 양쪽으로부터 극심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들 개혁자들은 1420년부터 1431년까지 교황의 군대의 공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단순한 무기로 무장한 후스파 군대는 얀 지슈카 장군과 사제 프로코프 홀리의 지휘 아애 전 유럽으로부터 조직된 무장한 십자가군과 승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