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 왕의 십자가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정확히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제시한다. 하나는 만왕의 왕이라는 정체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목적이다.
마가복음에서 우리는 주로 행동하시는 예수님을 만난다.
이 책의 목적은 예수님의 삶이 우리의 삶과 얼마나 깊은 연관이 있는지를 그분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주님과 춤 추는 순간 영혼이 살아난다(막 1:1-4), 예수님은 춤이다
Christos란 헬라어로 ‘기름부음을 받은 왕족’이란 뜻이다.
신학자 코넬리우스 플랜팅가는 “하나님 안의 세 위격은 서로를 영화롭게 한다. 하나님 안에 있는 각 위격은 서로를 높이고, 서로 교제하며, 서로를 존중한다. 서로에게 찬양과 사랑을 아낌없이 주기 때문에 삼위 일체 하나님은 지극히 행복하시다.
나에게 도움이 된다면 섬기겠다고 말한다면, 사람을 진정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통해 자기를 섬기는 것이다. 그를 이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삶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진다.
하나님은 기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해서 우리를 지으신 게 분명하다.
너는 나를 중심으로 살도록 창조된 존재다.
부르심을 따라가는 삶이 진짜다(막 1:14-15), 예수님은 부르심이다
여타 종교의 본질은 조언이지만 기독교의 본질은 소식이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스스로 왕이 되기로 결심한다. 이 자기 중심주의는 관계를 파괴한다. 스스로 중심이요 왕이 되려고 하는 순간 육체적, 사회적, 영적 심리적으로 모조리 무너져 버린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려 모으셨다. 유대문화에서는 선생이 제자를 부르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대개는 제자가 랍비를 선택했다. 예수님이 먼저 부르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개인의 정체성이 가족에게서 출발한다. 가족보다 나를 더 생각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충격 그 자체다.
나를 알고 살아하고 닮아가고 섬기는 일을 인생의 최우선 사항으로 살아야 한다. 인생의 다른 모든 관계를 미워하는 것처럼 보일만큼 정열을 다해 나를 따르라.“우리의 왕은 해야 할 일을 지시하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해야 할 일을 대신 하신 뒤에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분이다.
영혼의 속살까지 그분께 맡기라(막 1:35-38), 예수님은 치유자다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근본 문제는 죄란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가장 큰 죄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가장 큰 문제를 밝힘으로써 그의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신다. 내가 몸만 고쳐주면 평생 행복 할 것 같지? 하지만 두어 달만 지네 봐라. 그런 행복은 오래지 않아. 불만족의 원인은 더 깊은 곳에 있다.
진정한 문제는 우리 각자가 예수님 외에 다른 것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라(막 2:23-28), 예수님은 안식이다
둘 다 안식일을 잘 지키려고 하는데 한 사람에게는 순종이 짐이요 속박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기쁨이요 선물이다. 종교의 본질은 충고이다. 다른 패러다임은 소식으로 전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모든 종교의 이면에는 공통된 논리가 있다. 내가 잘 해야 비로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은 이 논리와 완전히 정반대 입장을 취한다. 먼저 예수님이 나를 온전히 받아 주셨기 때문에 내가 순종하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사랑의 삶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법을 공부하고 순종하는 것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죄의 결과로부터 구속해 주신 분을 기쁘시게 하고 닮아가기 위해서이다.
영화, 불의 전차에서 에릭 리델은 크리스찬이었기 때문에 안식일에 경기에 뛰지 않기로 결심했다. 리델과 에이브러햄스의 목적은 모두 금메달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에이브러햄시의 목적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다. 에이브로햄스는 자신이 뛸 경기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내 존재 가치를 증명할 시간은 10초 안에 있다. 반면 리델은 여동생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나를 빠르게 만드셨어. 달릴 때마다 그분이 기뻐하시는 게 느껴져.”
우리가 예수님이 이루신 일에 의지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 흡족해 하신다.
인생의 배가 침몰해도 두려워하지 말라(막 4:35-38), 예수님은 능력이다
사실 보통은 풍랑이 그쳐도 파도는 아주 오랫동안 계속해서 출렁인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바람이 그칠 뿐 아니라 바다까지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고대 문화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바다를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힘으로 본다는 것이다.
정말로 예수님이 풍랑의 주인이시라면, 세상과 삶이 어떠하든 그분 안에서 필요한 모든 치유와 쉼, 그리고 능력을 얻을 수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권능과 사랑을 제대로 알았다면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너희는 무엇에 믿음을 두느냐로 해석하고 싶다. 이 물음은 믿음의 강도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조지 맥도널드의 공주와 고블린 이야기에서, 요정 할머니가 아이린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을 수 있는 것만 믿는단다. 그러나 많이 믿는 사람이 덜 믿는 사람을 너무 몰아서는 안돼. 너도 직접 보지 않았으면 맏지 못했을지도 몰라.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믿음은 자질이 아니라 선물이기 때문이다.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을 때는 안을 보지 말고 예수님을 찾아가야 한다.
주님의 타이밍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막 5:21-22), 예수님은 기다림이다
예수님의 인내의 본을 따르길 원합니다, 토머스 크랜머, 부활전 종려주일에 사용하려고 쓴 기도문이다.
인내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참아내는 것이다. 인내는 당장 결과가 나타나지 않아도 계속해서 열심을 다하는 것이다. 인내는 어떤 상황에서도 분노하지 않고 고통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예수님을 만져 치유를 받았다(막 5:27-30).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아셨다.
예수님은 능력이 빠지는 느낌을 받고 치유가 이루어진 줄 아셨다. 예수님이 힘을 잃은 덕분에 치유가 이루어진 줄 아셨다.
예수님이 지체하신 덕분에 야이로와 여자는 둘 다 원하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받았다.
야이로와 제자들이 볼 때 예수님이 만성 질병환자를 고치느랴 여자 아이를 죽게 만드신 것은 엄연한 의료과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 위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다. 예수님에게는 죽은 여자 아이를 살리는 것이나 열병을 치료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 또 예수님은 미신적인 요소를 가진 여자의 몸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영혼까지 고쳐 그분의 제자로 삼기 원하신다.
자끄 엘룰의 명저, 기술의 역사, 현대서구 사회는 인생의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은 우리의 손을 잡고 칠흑 같은 밤길을 함께 걸어주신다.
날마다 보혈로 속사람을 깨끗케 하라(막 7:1-5), 예수님은 거룩이다.
카프카는 한 일기에서 죄책감이 있든 없든 오늘날 우리 모두의 상태는 악하다.
인간 마음속의 자기 중심주의가 문제다. 죄가 문제인 것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악들이 우리를 지독히 불결하게 만든다.
성경학자 제임스 에드워즈, 수보니게아 여인은 이스라엘 메시야의 목적을 이스라엘의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여인의 담력과 끈기는 예수님의 족하심과 풍부하심을 굳게 믿는다는 증거다.
이 여인은 분명한 목적과 열정을 갖고 주님을 찾아갔다.
복음이 무엇인가? 이 여인처럼 우리도 생각보다 훨씬 더 악하지만 감히 소망할 수도 없는 사랑과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삼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너무 교만해서다. 우월감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의 직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유는 열등감이다. 자의식에 사로잡혀 나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사랑하실 리가 없어라고 말한다.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은 자신이 그분의 용서를 받을만큼 잘못한 것이 없다는 말만큼이나 큰 잘못이다.
우리가 착해지려고 아무이 발버둥을 쳐도 우리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종교는 자기 의와 자기중심주의, 자기애를 전혀 제거하지 못한다.
그렇다 설교로 의로워지려는 자는 주일마다 죽을 것이다(스펄젼).
열정을 갖고 자비로운 분께 과감히 나아가라(막 7:31-37), 예수님은 자비다
당신은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는가? 먼저 옛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피에 굶주린 독재자였다. 선행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을 달래야 했다. 반면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은 뭐든 요청하면 아무 말 없이 ㄷ르어주는 영적 힘이다.
십자가를 따라 세상과 반대방향으로 가라(막 8:27-30), 예수님은 그리스도다
윌리엄 반스톤, 사랑의 현상학,
모든 인간 심지어 어릴 적에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까지도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을 구분할 수 잇다고 한다. 가짜 사랑의 목적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것이다. 가짜 사랑에는 조건이 붙는다. 진짜 사랑의 목적은 남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내주는 것이다. 이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진짜 사랑은 위험을 무릅쓰는 사랑이다. 아낌없이 전부를 내주는 사랑이다.
반 스톤은 진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우리의 사랑은 어느 정도 가짜다. 모든 관계에는 어느 정도 이해타산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는다.
조건 없이 파격적으로 사랑해 줄 분, 우리에게 아무 것도 바라는 것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해 줄 분, 이런 사랑을 받고 나면 우리 안에 자존감이 충만해져 비로소 우리도 그런 사랑을 나눠 주기 시작할 수 있다. 이렇게 사랑해 줄 분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이런 사랑은 나눠 줄수록 커지는 사랑이다.
용서란 고통스런 결단이다. 남이 잘못한 대가를 나 혼자 감당해야 한다. 상대방이든 나든 누군가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고통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으니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내가 인류의 죄를 용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고통이라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너희 아니면 내가 죄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목숨을 구원하려면 목숨을 잃어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여기서 목숨은 남들과 구별되는 개인의 정체성이나 개성, 자아를 의미한다. 개성을 버리라는 말쑴이 아니라 세상적인 것에서 정체성을 얻으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존경과 가문의 유산, 자식을 얻지 않으면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된다. 개인주의적인 사회에서는 돈과 명예, 지위를 얻지 않으면 헛산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같이 성과가 삶의 전부라는 말이다.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해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것도 역시 성과 중심의 방식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성과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짓은 그만둬라. 내가 전혀 새로운 방식을 알려 주마. 낡은 정체성을 내던져라. 그리고 나와 복음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라.” 삶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열쇠는 바로 사랑이다.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자기를 비우고 그분을 채울수록 더욱 진정한 자신이 되어 간다. 그리스도께 나아가 나 자신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진정한 자신을 얻는다.]
진정한 자신을 잡으려고 하면 오히려 더 멀어지는 대상이다. 예수님을 추구할 때 진정한 자신은 덤으로 따라온다.
C.S. 루이스는 목숨을 얻기 위한 버리기에서 자신을 포기하면 진정한 자신을 얻으리라. 그 무엇도 움켜쥐지 말라.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은 진정으로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
영광의 죽음을 이겨 낼 힘을 얻으라(막 9:2-8), 변화산에 서다
마가복음의 절반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나머지 절반은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주로 다룬다. 처음 절반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며 영원한 왕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예수님은 용사요 쉼이며 능력이요 무한한 사랑이시다. 마가복음의 후반부는 십자가의 필요성과 목적을 밝혀준다. 그분의 삶 속에서 십자가와 영광이 하나로 연결되었으니 우리의 삶 속에서도 그래야 한다. 이것이 마가복음의 후반부에 흐르는 주제다(막 9:2-8).
시내산 사건에서 모세는 달리 태양을 반사하듯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극한 영광을 스승로 만들어내셨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을 한 하나님 영광 자체였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십니다(히 1:3).
베드로와 요한은 호렙산에서 바로 예배를 경험한 것이다. 예배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내면 깊은 곳에서 갈망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지극히 아름다움 앞에서 근신이 녹아내리고 소망이 솟았던 적은 없는가?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아가야 한다. 머리로 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몸으로도 느껴야 한다. 영광스러운 창조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지켜주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느끼고 경험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무엇이든 실제로 맛보아야 거기서 영양분을 얻고 강해질 수 있다.
예배, 우리를 강하게 하는 하나님의 포옹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산을 내려오기에 무섭게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을 알려 준다. 서기관과 군중, 산에 올라가지 않은 제자들 사이에 격렬한 설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막 9:14-18).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기도 없이 애를 썼다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세상의 악과 고통을 다룰 수 없다는 서실을 왜 모르는가? 제자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약하고 교만한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악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자신들의 힘은 과대평가했다.
소년의 아버지처럼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하고 인정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갈 수 있다. 소년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믿음이 없습니다. 제 안에는 의심이 가득합니다. 제 도덕적 영적 능력은 보잘 것 없습니다. 그래도 저를 도와주세요. 이렇게 자신이 아닌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바로 구원하는 믿음이다.
회개하고 자복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면 바로 그것이 예배다.
손에 쥔 것을 모두 내려놓으라(막 10:18-22), 부자 청년을 만나다
저명한 기독교 역사가 앤드류 월스는 다른 종교들 경우에는 하나같이 발생지가 지금까지 중심지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이슬람교는 아바비아의 메카에서 시작되었고 지금도 중동이 이슬람의 중심지로 남아 있다. 불교의 중심지도 여전히 발원지인 극동이다. 힌두교도 마찬가지이다. 인도에서 발생한 힌두교는 여전히 인도의 제일 종교다. 그런데 기독교읮 우심지는 예루살렘에서 헬라 지중해 세계로, 북 유럽인들에게로, 20세기에 이르러 남미와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이동했다.
다른 종교들의 중심지는 그대로인데 기독교 중심지가 끊임없이 변하는 이유는 뭘까요? 이에 대해 윌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기독교의 중심에는 낮아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윌스는 기독교의 중심이 권력과 부를 떠나 끊임없이 이동한다고 말한다(막 10:17).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 대해 낙타가 바늘 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문화는 부를 착한 행실의 결과로 보았다. 제자들은 착하게 살면 하나님이 재물을 복으로 주신다고 믿었다.
예수님은 막대한 부가 꼭 착치의 결과가 아니다. 그렇다고 부가 꼭 선행과 복의 증거인 것도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자청년에게 도둑질 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훔친 적이 있느냐, 착취한 것이 있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이에 청년은 제 모든 재산은 정의롭고 공정하게 쌓은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돈에 눈이 멀면 자신의 진정한 영적상태를 보지 못한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예수님의 이 한 마디에서 부자 청년이 공허감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잇다. 행위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리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어도 공허함과 불안감과 의심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정말 영생을 얻고 싶으냐, 그렇다면 내가 받은 선물을 지금과는 다르게 사용해야 한다. 너는 좋은 것들을 잘못 사용해 왔다. 좋은 것들로 하나님과 남들을 조종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이 모든 재산을 포기하라고 하자 청년은 비탄에 잠겨 떠났다. 예수님쎄 아버지가 전부라면 청년에게는 돈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부자 청년에게 돈을 잃는 것은 곧 자신을 잃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나님을 주세주로 삼고 잇다면 현재의 구세주를 버려야 한다. 모든 사람이 구제주를 갖고 있다. 당신은 구세주는 누구인가? 돈인가? 하나님인가?
인생의 좋은 것들을 하나님 자리에 놓았다는 것을 회개해야 한다. 이 청년의 문제는 재물이라기보다는 도덕성이다. 청년은 나름대로 도덕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를 얻기 위해 큰 것을 전부 내놓았으니 너도 나를 따르기 위해 작은 것을 전부 내놓아라. 예수님의 희생에 진정으로 감사하면 돈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능력은 돈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나처럼 권력과 돈을 아낌없이 나눠 주는 사람들에게로 흘러간다. 너는 어떻게 살려느냐?
사랑할 수 없어서 사랑을 멈추지 말라(막 8:31-32), 대속을 결심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목숨을 내주러 오셨다. 여느 종교 창시자들의 목적은 모범적으로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목적은 희생 제물로 죽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돌아가셨던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대신 희생해 주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해리 포터의 엄마 릴리 포터를 아는가? 사악한 볼드모트는 해리를 죽이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나중에 해리가 스승 덤불 도어를 찾아가 묻는다. 그가 왜 저를 만지지 못햇죠? 그러자 덤불도어가 말한다. 네 어미가 너를 구하기 위해 죽었단다. 네 어머의 사랑처럼 강한 사랑은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지. 상처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ㅇ낳는 표시야, 하지만 깊은 사랑을 받으면 영원한 보호막이 생기지.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는 것뿐이었다.
CS 루이스는 사자와 마녀의 옷장에서 대속의 개념을 이렇게 풀이했다. “반역과 상관없는 자발적인 희생자가 반역자 대신 죽엇다. 그 순간 탁자가 갈라지고 죽음 자체가 뒷걸음하기 시작했다.
야고보와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임박한 그리고 필연적인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최소한 세 번은 들었다. 그런데도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리석은 요청을 한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잔과 세례 이야기를 하신다. 구약에서 잔은 대부분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상징한다. 내가 모든 악에 대한 공정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한다.
교만은 자신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린다. 교만의 가장 흔한 표현은 걱정이다.
진정한 겸손은 안식이 아니라 영혼에 안식을 준다. 진정한 겸손은 자기를 비판할 줄 아는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 마음속에 이런 종류의 겸손을 심어준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권력을 통해 영향력을 얻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너희는 전혀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희생적인 사랑을 퍼부으라. 진정한 영향력은 남들에게서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자발적으로 주는 것이다. 이런 영향력은 모델은 누구인가? 물론 예수님 자신이시다.
2007년 1월 7일, 뉴욕 타임즈, 행복의 기본, 행복의 증진에 가장 좋은 방법은 이타적인 마음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하지만 이타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의무감이나 도덕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행복을 위해서다. 요컨대 이기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참덕 미덕의 본질]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복음을 믿지 않고 자기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으면 순수한 사랑으로 남을 도울 수 없다고 말한다. 어떻게 해야 이기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이타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바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니콜라스 진젠도르프 백작은 모라비안 교회 창립자 중 한명이다. 그는 재산이 거의 바닥이 날 때까지 남을 도왔다. 왜 그랬을까? 19세의 청년 그는 학업을 마치기 위해 유럽의 수도들을 방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뒤셀도르프 미술관에서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을 그린 도메니코 패티의 “이 사람을 보라”를 보았다. 고난 받는 주님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림 아래를 보니 화가가 쓴 글이 보였다. “내 너를 위해 이 모든 일을 했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려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