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마음으로부터의 자유, 샌드라 월슨
샌드라 윌슨, 진정한 회복은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을 열 때만 가능하다는 진리를 체득한 상처입은 치유자.
우리의 상함(brokeness)이 우리의 사명(mission)이 된다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는 수치심 지향적 문화권이다.
슬프게도, 많은 수치심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
수치심은 문화적인 현상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라고 믿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어딘지 모르게 결정적인 결함투성이라고 느끼게 하며, 스스로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게 만든다.
수치심은 죄책감과 다르다. 수치심은 실수했다고 스스로를 지적하지만, 수치심은 내 존재 자체가 실수라고 떠벌인다.
변화는 평생동안 마음을 새롭게 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롬 12:2).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상한 마음은 자신이 다른 사람과는 아주 다르며 그들보다 못한 존재로서 자신을 희망이 없는 인간이라고 굳게 믿는 감정이다. 수치심을 갖게 되면 다른 이들로부터 고립되고 소와되었다고 느낀다.
수치심의 배경에는 세 가지 요인이 있다. 생물학적인 수치심, 성경적인 수치심, 속박적인 수치심 등이다.
생물적인 수치심이란 어린이와 어른 사이에 당연하게 나타나는 차이로 인해 보이는 한시적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성경적인 수치심이란 본질적으로 건강한 반응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다르며, 그분이 우리를 창조하셨던 의도에 미치지 못하는 존재인 데다가, 죄로 인하여 주님과 분리된 것을 인정할 때 형성되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인 수치심의 해결책은 성장이지만, 성경적인 수치심의 해결책은 은혜다.
속박적인 수치심은 어린 시절 가정에서 얻은 경험들과 그걸 해석해 내는 능력이 결여돼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먼저 아이들을 실족하게 만드는 원인을 알아야 한다(마 18:6, 시 56:13).
첫 번째 원인, 부모의 그릇된 행동, 두 번째 원인 모든 문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 원인은 학대당하는 것은 자신이 그럴만한 짓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
수치심은 가정에서 만들어진다
가정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1. 유지 : 의식주 및 의료적인 관리 등 신체적 필요를 충족시킨다.
2. 양육 : 용납과 애정, 격려, 시간 함께 보내기 따위의 정서적, 관계적 욕구를 채워 준다.
3. 지도 : 신발 끈을 매는 방법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가르침으로써 지적, 영적 필요를 만족시킨다.
병든 자아상을 만드는 가정의 나쁜 규칙들
규칙 1 : 못본 척 해
아이들더러 스스로 상황을 인식하고 파악하지 말라고 한다
규칙 2 : 아무 말도 하지 마
다른 사람이 심어준 인식에 대해 옳으니 그르니 판단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규칙 3 : 아무런 느낌도 갖지 마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으니 아무 것도 느끼지 마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신체적, 성적, 지성적 자기 영역을 침해당한 이들은 스스로 거기에 무감각해지려고 애쓰고, 분명한 사실조차 모르는 척 할 뿐 아니라, 학대받앗던 사건들 하나하나를 감추려고 노력하게 마련이다.
규칙 4 : 경계를 늦추지 마
일관성 없는 부모 아래서 자란 아이들이 신뢰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네 번째 규칙 때문이다.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규칙은 본질적으로 신뢰의 문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규칙 5 : 착한 아이가 돼야 해
건강하지 못한 가정에서 “착한 아이가 된다‘는 말은 완벽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어머니한테 착하다는 칭찬을 들으려면 아이로서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어른처럼 행동해야 했다.
마음이 아픔 자녀를 만드는 가정들
신체적인 학대, 성적인 학대, 정서적 근친상간, 성적학대와 신체적 학대의 결합, 사탄 숭배 의식에 끌어들이는 학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인정이 없는 칭찬을 듣고 자란 사람은 겉으로는 내실있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텅 비어 있다.
크리스찬 자녀들도 마음에 멍이 든다
예수님을 믿는 남녀가 결혼했을 때 그들이 만들 수 있는 가정은 두 가지다.
성경적인 가정을 세울 수도 있고, 바리새인적인 가정을 만들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 부모들 가운데도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선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교묘하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자녀들을 학대하는 이들이 있다.
바리새인적 기장의 부모는 비록 그리스도인일지라도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일에 신경을 쓴다.
역기능 가정에서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부모는 하나님의 성품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카멘 베리, 메시야 컵플렉스에서 벗어나는 일이라는 책에서 메시야 콤플렉스는 내가 나서지 않으면 되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남의 필요를 먼저 채워주어야 한다는 두 가지 거밋말로 구성된다고 설명한다.
상한 마음은 회복될 수 있다
오늘 당신은 변화될 수 있다
완벽주의는 자주 애용되는 자기 방어의 수단이며 거짓을 대물림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여기서부터 형성된다.
엣 중국 격언에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당초 애정되어 있던 곳에 이를 수밖에 없다.”
더 이상 결점 때문에 수치스럽지 않다
역기능 가정에서 수치심에 얾매인 채 자란 성인들을 관찰하다 보면 한결같이 자기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란다.
속박적인 수치심은 평생 희생자들을 심판대 위에 올려놓고 예외없이 유죄판결을 내린다. 이에 반해서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수치심의 경우에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범죄로 규정하고 사형 아니면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완벽주의에는 관계적인 차원과 개인적인 차원이 있다. 전자는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결전을 숨기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후자는 은폐보다 보상의 차원이 강하다. 일을 잘해서 칭찬을 듣거나 유명해짐으로써 내면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보상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마음에 은혜의 날개를 달라
죄가 세상에 들어온 순간, 두려움은 인간을 가장 강력하게 사로잡는 감정이 되었다(창 3:10). 건강한 두려움은 뜨거운 난로에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게 하거나 과속으로 달려드는 자동차 옆으로 걸어가지 못하게 예방해 주는 식의 역할을 한다.
하나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가득한 두려움은 의도적으로 죄의 길을 선택하지 않도록 보호해 준다.
두려움의 종류와 강도는 대단히 다양하다. 당황스러운 상황, 거부, 실패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성공까지 두려워한다.
가장 파괴적인 두려움은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외롭다고 느끼는 순간 버림받음에 대한 공포감이 몰려온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순간, 주님께 버림받았다는 강력한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버림받음에 대한 공포감을 뿌리채 뽑아 버리는 비결은 예수님을 깊이 신뢰하는 것뿐이다.
버림받지 않을 까 하는 두려움에 시달리다 보면 정서적으로 고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피해자가 화를 내는 것 당연하지만 습관으로 굳어진다면 적절한 분노의 한계를 넘는 태도는 죄에 해당한다.
더 이상 의존적으로 살지 말라
과잉의존 성태에 바지면 한편으로는 타인의 무시와 지배를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을 멸시하고 통제하는 관계에 얽매이게 된다. 그것이 바로 대인중독이다.
정상적인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서로 존중하는 관계를 맺도록 가르친다.
과잉의존적인 관계에 있는 이들은 서로 수치심을 심어 주고 상대방을 무시한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
1.무자비하고 변덕스러운 하나님
유년기에 신체적, 성적 학대를 경험한 이들은 하나님도 그런 모습일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 결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건 당연한 일이다.
2. 요구가 많고 용서하지 않는 하나님
주로 엄격하고 완벽주의적인 부모 밑에서 성장한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한 치의 용서도 없이 무자비한 징계를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 가깝다.
3.편파적이고 불공평한 하나님
수치심에 묶여 사는 어른아이들은 하나님을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랑이 많으시고 언제나 동일하며 죄를 용서해 주시지만, 유독 자신에게는 냉정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4. 소원하고 무관심한 하나님
우주를 다스리는 원대한 사업에 너무 바빠서 자녀들을 보살피거나 그 사람에 관여할 여유가 없는 하나님이다. 부모가 사망하거나 이혼, 질병 군 복무 등의 이유로 오랫동안 집을 비운다든지 무작정 자녀를 방치한 경우, 피해를 입은 아이는 성장한 뒤에도 하나님은 멀리 계시며 감히 다가설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5.친절하지만 혼란스러운 하나님
세상의 모든 혼돈을 해결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무능력하고 혼란스런 하나님이다. 부모가 개인적인 삶이나 가정생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들은 하나님을 혼란스러운 분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개념을 수정해 나가는 작업은 그리스도인들이 일평생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중요한 과제다(시 50:21, 9:10).
수치심에 토대를 둔 대인관계를 지속해 온 사람은 주님과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이끌어 가기 쉽다. 믿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만들어 낸 규칙과 의식들을 열심히 따라 가면서 자기 힘으로 무언가 대가를 치르고 싶어한다.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왜곡하지 말라(롬 6:22). 가장 흔한 예로 하나님은 자녀들이 누군가의 밑에 들어가서
밤낮없이 종처럼 일하기를 원하신다. 이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나타나는 강박적 과잉의존 현상으로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헬라어를 연구하는 언어학자들은 진정한 아가페란 누군가의 감정이나 기호가 아니라 행복을 추구하는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주려면 먼저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
문제 1 : 수치심에 기반을 둔 섬김은 하나님 대신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한다.
뮨제 2 : 수치심에 기반을 둔 섬김은 자기부인이라는 오해를 낳는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행실을 똑바로 하고 교회와 관련된 일에 더욱 힘쓰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세상에 속한 곳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일도 중요하다 (요일 2:15).
부인하다는 단어는 사물이 아니라 사람에게 아니오 라고 말하거나 돌아선다는 뜻이다. 예전에 충성을 바치고 복종하던 사람들로부터 등을 돌릴 때 사용하는 말이다.
문제 3 : 수치심에 기반을 둔 삼김은 변화된 삶이 아니라 물려받은 삶의 산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과거의 생각과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생각을 새롭게 하라는 명령의 참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평생에 걸쳐 자기를 부인하라는 절차를 거치면서, 충성의 대상을 세상과 가족의 규칙에서 그분의 진리로 바꾸어 간다.
부모의 이지지에서 유추해 낸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성경에 계신된 하나님을 바라보라.
예수님의 용서를 선포하라
용서는 무척 힘든 중노동이고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다.
용서의 이유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의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용서해야 한다(엡 4:23, 32).
용서하시는 하나님과 더욱 닮아갈수록 자신에게도 더 큰 유익이 돌아올 것이다. 이것이 용서하지 않으면 안되는 두 번째 이유다.
용서해야 할 세 번째 이유는 미래에 초점을 맞춘 삶을 살기 위해서다 자신을 향해 상처를 들쑤실수록 증오심이 커질 뿐이다.
용서에 대한 오해
첫 번째 오해
용서한다는 것은 과거에 아무 일도 없었다거나 다소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심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쳐준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생각이다.
두 번째 오해
용서한다는 것은 자동적이고 즉각적이며 무제한적으로 화해한다는 의미다. 용서는 자발적이고 일방적인 행위다. 상처를 주었던 가해자를 진정으로 용서한다 하더라도 전적인 화해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 정서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거나 상대방의 생활방식에 변화가 없다면 화해는 대단히 제한적이기 마련이다.
세 번째 오해
용서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준 가해자나 상처 자체에 대한 고통이나 기억이나 불편한 감정을 전혀 갖지 않아야 한다. 용서는 일회적인 사건인 동시에 평생 지속되는 과정이다. 용서는 긴 항해이다.
용서의 원리
원리 1 : 용서는 가해자의 피해 사실에 대한 실질적인 인식을 말한다(창 50:20).
요셉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거나 아버지의 편애를 핑계삼을 수도 있었지만 사악한 결정을 내린 형들에게 책임이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원리 2 : 용서는 복수할 권리를 포기하는 결단이다.
용서가 불공평하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에 학대하던 이들에게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누가 선뜻 용서하겠다고 나설 수 있겠는가? 용서는 그런 것이 아니다. 용서는 상처애 속박되어 있는 자신을 풀어주는 것이다. 용서는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다. 치유는 용서의 여부에 달려있다. 증오, 분노, 격노의 감정에 휩싸이는 것은 가해자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공의는 마땅히 받아야 할 것 받는 것이고, 사랑은 당연히 받아야 할 대가를 받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은혜는 도저히 받을 수 없는 걸 받는 사건을 말한다.
원리 3 : 인간에게 용서란 어려운 일이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창세기 45장 8절에서 요셉이 형들의 잔인한 처사와 그로 인해 겪었던 모진 고초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잊을 수 있었던 건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은 까닭이었다.
먼저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우라. 하나님은 모든 빚을 탕감해 주셨을 뿐 아니라 스스로 벌 주려는 욕망에서도 해방시켜 주셨다.
더 이상 쓴 뿌리를 키우지 말라. 쓴뿌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때 자라난다.
꾸준히 말씀을 공부해서 용서에 대한 오해를 털어 버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