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잘 처리되어야 합니다(창세기 4:1-15), 김덕선 목사
한국 사람들은 지나치게 화를 많이 내면서 삽니다. 괜히 화를 내고 괜히 인상을 쓰고 다닙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다녀도 한국 사람처럼 인상을 쓰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한국인의 의식구조는 공동체 의식이 강하면서 이웃관계가 좋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때부터인가 이런 아름다운 관계가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독 속의 게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 속의 여러 마리의 게를 집어 넣으면 독 바깥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게 한 마리만 넣으면 충분히 나올 수 있는데, 여러 마리를 놓으면 서로 먼저 뒷다리를 붙들고 늘어지기 때문에 결국 한 마리도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합니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인생철학입니다.
분노 그 자체가 죄악이 아닙니다. 분노 중에는 정의로운 분노도 있습니다. 분노는 자연스러운 감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분노가 통제되지 못할 경우입니다.
창세기 4장에 나타난 사건 또한 다스려지지 않은 분노가 초래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고 동생의 제사만 열납되자 화가 났습니다. 분노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동생을 살해했고 결국 이 일이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살인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가인은 왜 그렇게 분노했을까요? 가인이 어떻게 이 분노를 극복해야 했을까요? 왜 우리는 지금 분노하며 살아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이 분노를 국복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1. 왜 우리는 분노할까요?
왜 가인이 분노했을까요? 가인이 분노한 첫번째 이유는 자신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음으로 인해 분노하였습니다. 자신이 공평한 취급을 받지 못한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분노는 내가 억울하다. 공정하지 못하다. 자존심이 짓밟혔다, 모욕당할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화가 나면 제일 먼저 어디가 변하는지 아십니까? 안색이 변합니다(5절).
사실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았을 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먼저 질문하지 않고 무턱대고 화만내었습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가인은 자기가 원인제공을 해놓고 화를 낸 것입니다. 반면에 요셉은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화내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신앙의 관점,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불공정하게 대우받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화를 내거나 흥분해서는 안됩니다.
너 죽고 나 죽자
가인이 분노한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관계를 경쟁관계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간입니다. 가인이 아우를 바라 볼 때 아벨은 내 형제고 아우다하며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저 아벨 때문에 내가 손해를 보는구나. 그는 내 경쟁상대다. 아벨만 없었으면 내가 집안에서도 부모님께 더 대우받고 하나님의 인정도 받았을 텐데
같이 살자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 가장 많이 나오는 표현이 무엇일까요? "서로"입니다. 같이 살자는 것입니다. 소위 윈윈전략, 인간관계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 12:10),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고전 15:25),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고(엡 4:2),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히 3:6).
만약 가인이 동생 아벨을 바라보면서 비록 나의 제사는 하나님 앞에 열납되지 못했지만 내가 동생 하나는 참 똑똑하게 두었다라고 생각했다면 어땠을까요?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고 물으십니다. 헬라인들은 형제관계를 아주 조건없이 주고 받을 수 있는 관계, 조건을 초월하여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관계라는 뜻입니다.
감정조절
세 번째로 가인은 왜 본노했을까요?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화가 난다는 분노의 감정 자체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죄의 소원이 죄악의 행동까지 발전하는 것은 차단해야 합니다.
분노가 일어난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7절). 이것이 죄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에도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화를 내고 상대방에 대해 나쁜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우리는 자신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분노의 상태에서 내가 감정을 조절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에베소서 4장에서 분노의 문제를 다루다가 5장에서 성령 충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의 본질은 지배입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면 우리는 감정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 함부로 말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언이 되기 쉽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쉽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하지 않을 때 중요한 결정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분노하는 이유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는 감정을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2. 어떻게 분노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분노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첫째, 분노의 원인을 내 자신 안에서 찾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근데 우리는 흔히 분노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분명히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분노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았습니다.
분노 이렇게 풀어진다
둘째, 분노를 성경적으로 해소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분노를 부조건적으로 억제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분노를 참고 누르면 오히려 병이 됩니다. 우울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분노를 다만 참으면 축적되어서 나중에 엉뚱한 사람에게 터뜨리게 됩니다.
우리는 분노를 적절하게 해소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화가 나면 골프를 치러 간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볼링장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우리가 분노를 해소하는 방법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바로 기도와 용서입니다. 화가 났다면 주님 앞에 나아 오십시오. 다 털어 놓고 기도하십시오. 우리 나라의 통송기도가 아주 좋습니다.
기도를 위한 창조적인 냉각기
어떤 분은 목사님 저는 아무리 기도해도 안됩니다. 너무나 상처가 깊어서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좀 떨어져 있는 것이 좋습니다. 내 속에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에너지와 용기가 생길 때까지 좀 떨어져 있으십시오. 창조적인 냉각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안보겠다는 식이어서는 안됩니다. 아브라함과 롯사이에도 재산 문제 때문에 싸움이 일어났지만 어려울 때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한 때 다튼 일이 있었습니다. 마가로 인해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러나 얼마동안 떨어져 있는 가운데 다시 화해하게 됩니다.
피스 메이커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가 되셨던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화나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드는 사건을 뛰어 넘어 화해자의 모습으로 설 수 잇어야 합니다. 피스 메이커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