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대하는 신자의 태도(창세기 18:19), 김덕선 목사
가장 뜨거운 한낮에 이브라함은 가나안의 헤브론 지역, 자기 집 문 앞에서 앉아서 밖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에 세 사람이 맞은편에서 지나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창세기 18장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아브라함은 자기의 집 맞은편을 지나가는 나그네를 보는 순간 달려가서 영접합니다. 아브라함은 세 사람을 어떤 태도로 대했을까요? 부르는 호칭 역시 남다릅니다. 본문 3절입니다.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1. 아브라함은 세 나그네를 향하여 “주여”라고 부릅니다. 자신은 “)”이라고 부릅니다. 지금 내가 당신들에게 섬길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을 드립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감동적이고 극진합니다.
4-5절입니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이제 우리도 새로운 달을 보내면서 지치고 상하고 휴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상쾌하게 하고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섬기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한 달 동안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저 지나치지 말고 기회를 포착하여 섬기는 기회로 삼기를 원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남은 떡을 갖다 드리지 않고 급히 달려가 아내에게 부탁하여 새로운 떡을 만들어서 대접합니다. 6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더구나 아브라함은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은 손님을 대접하는데 있어서 달려가서 가장 좋은 것으로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2. 구약 시대에는 종종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대접하였지만 사실 그 사람들은 천사들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2절입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신약시대에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25장 45절에 보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는 것이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잘 해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는 몇몇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기회를 포착해야 합니다.
전도서 11장 1-2절입니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여기서 떡을 네 물 위에 던지라는 것은 그냥 흘려 보내라는 것입니다. 즉 아무 조건이나 이해 관계없이 사랑의 손길을 베풀어야 합니다. 사랑을 베푼 후에 인정을 받거나 대가를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적어도 일곱 사람이니 여덟 사람에게 사랑의 손길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세 사람의 나그네의 대접을 통해서 두 가지의 놀라운 축복의 기회를 갖게 됩니다. 그 한 가지는 사라에게 자녀가 태어날 것이라는 약속을 받게 됩니다. 창세기 18장 10절입니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다른 말씀에 대해서는 믿었지만 자녀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다 아는 말씀이라고 지나쳐서는 안됩니다. 계속해서 그 말씀을 주실 때에는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창세기 18장 11-13절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우리의 생각과 처지와 형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시키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입장을 내세우며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찾아오셔서 또 다시 한번 확인해주십니다. 본문 14절입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나님께서는 너무 어려워 성취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3. 우리가 항상 잊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요,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창세기 17장 19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통해서 이삭이 태어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상황에서 볼 때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또 다시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말씀을 또 다시 주실 때 다 아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쳐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내가 믿고 그대로 순종하여 축복을 누리는 단계에 까지 나아가게 될 것을 원하신다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세 사람의 나그네를 극진하게 대했을 때 또 다른 축복의 기회를 갖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세 사앙의 나그네를 전송하러 함께 나갑니다. 본문 16절입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손님을 극진히 집에 모시고 대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웅도 극진히 잘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대할 때 끝가지 잘 해야 합니다. 만약 전송하지 않았더라면 아브라함을 향하여 주시는 너무 소중한 말씀을 우리가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본문 17-1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4.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하시고자 하시는 것을 나타내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른 사람의 죄를 알아맞히고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게 될 것을 미리 알려주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있는 헤브론 지역에서 소돔 까지는 거리가 30킬로쯤 떨어져 있습니다. 19장 1절에 보면 소돔으로 갔던 사람들 가운데 두 사람은 천사요, 한분은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너무나 커서 그 땅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하십니다. 본문 20-2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려고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든지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합니다. 하나님, 소돔과 고모라에는 그래도 의인이 있는데 함께 멸하려고 하십니까? 그 성중에 의인 50명이 있어도 멸하시겠습니까? 만약 5명이 부족해도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겠습니까? 그러면 40명이면 어떻습니까? 30명이면 어떻습니까? 20명이면 어떻습니까? 마지막으로 10명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0명이라도 있다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지 않겠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고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시면 안된다고 호소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때때로 우리 주위에 부주의한 일로 인해 발생하는 사건으로 인해 고통과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욕심과 죄악의 결과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면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막아보려고 했지만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5.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을, 육체의 욕심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심판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과 그리고 우리 모두가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창세기 18장 19절입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본문은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6.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것처럼 우리는 축복을 받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본질은 축복을 받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 22장 12절입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가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자식이라도 아끼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2장 18절입니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셨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태도와 자세를 말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물질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2-3절입니다.“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