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음 버스 기사(김덕선 목사)
2005년 10월 2일의 일이었다. 이른 아침 거제도에 있는 산상기도회에 다녀오겠다고 아내가 길을 재촉했다. 뭐 그렇게 멀리까지 가서 기도해야 하냐고 만류해 보지만 산상기도회에 가본 적이 많지 못했노라 하며 간곡하게 부탁하는 아내 앞에서 혼자 다녀오라고 허락하며 못내 아쉬웠다. 거절 못하는 내 성격도 성격이지만, 10월 2일임을 선명히 기억하는 이유도 그렇듯 다음날이 내 생일인데 그래도 미역국이라도 한 그릇 얻어먹어야 하는 데 하는 서운함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내가 준비하는 동안 불현듯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아내가 타고 가던 버스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불길한 장면이 나타난다. 이번에 보내면 다시 못볼 것 같다는 불안감이 나를 엄습한다. “이번에는 내가 직접 운전해서 같이 다녀오자”고 했더니 아내는 영문도 모른 채 너무 좋아한다. 한술 더 떠서 당신도 이번 생일을 맞이하여 목회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는 기회로 삼으면 좋겠다며 짐짓 이번 기도회의 의미를 덧붙이며 대견해하기까지 한다.
평소 같으면 아내가 이런 식으로 주도하는 것이 썩 즐거운 기분이 아니었겠지만 아내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실실 웃으면서 좋게 받아들인다. 그러다 아내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철야기도 후에 긴 장거리 운전은 무리일 것 같다며 고속버스를 타고 가자고 한다. 순간 다시 불길한 장면이 떠올라 갈등이 일어났지만 그러마 하고 선선히 허락하고 길을 나섰다.
나서고 보니 50번째 생일 기념으로 아내가 제안한 산상기도회가 의미 있다 생각하니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아침 8시 20분, 고속버스에 올라타서도 불길한 장면이 떠올라 운전석 바로 뒤의 자리를 부탁해 앉았다. 아내에겐 굳이 안전벨트까지 챙기며 좌석을 뒤로 젖히고 철야 기도를 위해서 잠을 청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갑자기 눈을 떠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일어나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옆 좌석의 아내는 고단하게 잠에 빠져있고 차안에는 열 두세 명의 승객들 역시 다들 한밤중이다. 그때 갑자기 고속버스는 차선을 벗어나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아내 머리위로 떨어지는 그 무언가를 막기 위해 한 손으로 아내의 얼굴 부위를 가리고, 다른 한 손은 손잡이를 굳게 잡았다. 잠시 후 고속버스가 중앙분리대를 다시 들이받으면서 버스는 다시 크게 흔들렸다.
비명 소리와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의 고통 소리로 이미 차 속은 아비규환이 되어 있었다. 고속버스 기사는 안전벨트를 느슨하게 맨 상태로 복도에 주저 앉아 졸도한 상태였고 사람들은 고통과 두려움으로 어떻게 할 줄을 몰라 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내게 침착한 마음을 주셨다. “네가 이 고속버스를 안전하게 정차한 후에 승객들을 보호하라. 운전자가 이탈된 상태로 흔들리는 고속버스를 그래도 둔다면 차가 통째로 전복되거나 충돌하여 대형사고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눈을 뜨고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한 번도 고속버스를 운전해 본적이 없습니다. 지금 핸들이 어떻게 감겨있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이 승객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도록 침착성과 지혜를 주세요.” 버스 기사는 안전벨트가 늘어진 상태에서 복도에 주저앉아 있기 때문에 운전석에 앉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달리는 버스에 선 채로 고속버스 핸들을 잡았다. 그리고 정말 차분히 신중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고속버스가 한 10미터 정도 앞으로 반듯하게 가다가 멈춰 서자 비상등을 켜고 기어를 중립에 놓았다. 정말 침착하고 신중하게, 또 지혜롭게 처신했다.
승객 가운데 누군가가 119전화를 해서 긴급구조대를 요청했다. 앰뷸런스가 도착하고 나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피투성이로 된 사람에게 가방에 있는 옷을 꺼내 닦도록 하고 날아간 책들과 지갑, 옷, 안경테들을 하나씩 주워갔다. 부상자들을 태운 앰뷸런스가 청주 하나병원에 도착했다. 승객들은 응급조치를 마치고 병상에 누워있고 환자 보호자들이 소식을 듣고 여러 저기서 달려오기 시작했다. 보호자들은 가장 덜 다친 나에게 사고 경위를 물어 왔다. 30분 정도 기절했다가 깨어난 운전기사는 자신이 졸음 운전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지 난데없이 차량 앞 유리가 깨어져 있냐고 불평을 터트릴 뿐,
다른 환자들은 입을 모아 나를 가리키며 내가 핸들을 잡아 차를 서게 하지 않았다면 큰 사고가 날 뻔했다고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버스 회사측에서도 오늘 큰일을 해주셨다고 감사해 했다. 그 순간 나는 뭉클한 감동과 커다란 도전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 아버지! 졸음운전을 한 운전사로 인해 많은 승객이 죽을 뻔했던 상황 속에서 부족한 저를 도구로 사용해 주셔서 오늘의 대형 사고를 막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앞으로 제가 목회하면서 저 졸음 운전했던 운전자의 자리에 서지 말고 이 사람 덕분에 살게 되었다는 고백을 듣게 하옵소서.”
환자들은 대부분 가까운 병원, 또는 서울로 이동했다. 그러나 나와 아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보내신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부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내와 함께 칠흑 같은 밤을 뚫고 플래시를 비추면서 구간구간 로프를 잡고 가파른 산 정상에 도착했다. 그 밤에 기도회는 특별한 은혜와 나의 목회시간들을 돌아보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밤새도록 뜨겁게 부르짖은 후에 해가 뜨기 시작했다. 새벽 산 정상에서 뒤죽박죽 된 케이크와 함께 한 50번째 생일날 아침은 정말 감격스러웠다.
토요일이었던 생일날 저녁 집에 도착하니 그때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아내는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얼굴에는 맞은 상처와 가슴의 통증으로 괴로워하고 나 역시 목이 삐끗하였는지 돌아보기조차 힘들었다. 다들 정형외과, 흉부외과를 얘기하며 병원에 입원해야 보상 문제나 후유증이 없을 거라 걱정해주었으나 나는 마음 한 구석에 이 사건의 모든 전후를 알려 주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걱정이 되지 않았다. 더욱이 교회에 자리를 비우면 안 된다는 생각이 병원 행을 결정하지 못했던 더
큰 이유인지 모른다. 아내 역시 교회를 섬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통원 치료를 하기로 했다.
이번 고속버스 사고를 통해 나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우게 되었다. 과연 나는 지금까지 졸음운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사고로 몰아가는 고속버스 기사와 같은 사람은 아니었던가? 이제 저 사람 덕분에 우리가 살아났다는 그런 역할을 하는 인생을 살아야 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죽을 뻔 했다는 비난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저 사람 때문에 살게 되었다는 감동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