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예수(마태복음 1:21), 김덕선 목사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다소 위로가 되는 말이긴 하지만 핵심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은 하나님의 용서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희생 없이는 진정한 용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분기점은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을 (B.C) 주전이라고 하고 예수님이 오신 이후를(A.D, Anno domini, 주님의 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성경의 예언대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천여 년 전에 오신 것은 때가 차서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약 1300년간 율법아래에 있었습니다. 마침내 때가 찼습니다. 때가 찼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입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1.때가 차매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갈라디아서 3장 23, 24절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율법이 우리를 어떻게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고 또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우리를 이끌 때까지 안전하게 지키며 감시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이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갈 3:24, 25). 당시에 부유한 가정에서는 여섯 살 때부터 청년 때까지 아이들은 초등교사의 보호와 감독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청년이 되는 순간 초등교사에서의 감독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 율법이 마쳐지고 믿음의 시대가 오게 된 것입니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창고에 쌓인 먼지를 빗자루로 바닥을 쓸었더나 얼마나 먼지가 많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그 광경을 지켜 본 사람이 물 뿌리개로 먼저 물을 뿌리고 먼지를 쓸었더니 깨끗하게 치워졌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을 몰랐을 때는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는데 율법의 거울에 비추어 보면 자신의 더러운 죄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먼지가 일어나다가 다시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물을 뿌리고 먼지를 쓸어내었더니 깨끗해 졌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당시에 여러 가지 정황이 때가 찼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복음의 확신을 위해 로마는 도로망이 확보되었습니다. 헬라어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일상적인 단어와 문화를 제공해 왔습니다. 이전에 로마의 신화들에 식상하여 도처에서 전정한 신앙을 갈망하던 때였습니다.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이 무거운 멍에에 얽매여서 진정한 신앙의 자유를 갈망하던 때였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은 두 가지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 때가 차매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4, 5절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이 세삳에 오시기 전까지; 우리는 율법 아래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우리를 구속하시고 입양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 아래에 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기 위함입니다. 율법 아래에 나신 것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율법의 형벌,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예수님이 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만 했을까요?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함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마태복음 1장 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어디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일까요? 그들의 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먄 했다는 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죄에서 구원함을 받으셨습니까?
우리의 죄가 얼마나 심각하기에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을까요?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만 하셨습니다. 왜 인간에게 갖가지 고통과 불행과 죽음이 찾아온지 아십니까? 로마서 5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듷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인류의 최초의 조상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 17절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만약에 예수께서 사람으로 오시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우리를 구속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인인이 아니셨더라면 그분은 불의한 사람들을 구속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그분은 사람들을 구속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수 있었을까요?
이사야 53장 6절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죄는 자기 고집대로 자기 욕심대로 그릇되게 살아가는 것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당신과 나의 죄악을 위해 에수 그리스도에게 죄악을 다 담당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4 절입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우리의 직병과 고통을 십자가에서 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습니다.
이사야 53장 5, 6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장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손봐 발과 옆구리가 찔리심은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상하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의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는 사람은 불안과 긴장가운데 살아갈 수밖애 없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동안 목회를 하면서 이 말씀을 선포할 때 죽음의 그림자가 떠나가고 천사와 같이 환한 평화가 찾아오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이재완 집사님 처남이 용인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했을 때의 일입니다. 한영성 권사님의 남동생이 군대에 갔다가 군악대에 들어갔다가 제대하고도 계속해서 트렘펫을 불려고 부모님께 부탁을 드렸지만 당시에 팡파레한다는 것을 싫어한 부모님의 반대로 방황이 시작되어 수십년간 그렇게 지내다가 말기 암환자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술을 하도 많이 드셔서 필름이 끊겨지곤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용인 호스피스에 가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님, 한 번도 인생의 꿈을 펼치지 못한 채 암으로 죽어가는 아들이 있습니다. 제가 가서 복음을 전할 때 의식이 왔다갔다 하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여서 환한 모습을 보고 싶다고 기도라고 방문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그 처남의 얼굴에 어둠이 걷히고 참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개가 완전히 변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이렇게 변화되도록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던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의 아픈 부위에 손을 얹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아무개의 질병이 나음을 입었다고 믿고 선포할 때 주님이 기적적으로 낫게 하셨습니다.
3. 때가 차매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5절 하반절입니다.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간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아들의 명분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우리를 어떻게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을까요?
갈라디아서 4장 6절입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아들이 영, 성령을 우리 마음에 보내셔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로마서 8장 15, 16절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자녀인 것을 증언하십니다. 많은 신자들이 아들의 믿음이 아닌 종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받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지 자신을 어떻게 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끔찍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인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특권을 누립니다. 갈라디아서 4장 7절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이제는 더 이상 우리는 죄의 종이 아니라 아들이요,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입니다. 유산은 종을 위한 것이 아닌 아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종의 신분은 없고 아들의 신분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시행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 주십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권세를 사용해 보시면 어떨까요? 아빠 찬스, 엄마 찬스가 아니라 하나님 아빠 찬스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