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의 탕자 비유(눅 15:25-32), 김덕선 목사
누가복음 16장 11-32절은 탕자의 비유로 잘 알려져 있는 본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탕자는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챙겨서 먼 나라에 가서 허랑망탕하여 재산을 낭비하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자 허기진 배를 움켜 잡고 아버지 집으로 톨아오는 둘째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집 안의 또 다른 탕자가 있습니다. 큰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둘째 아들은 집으로 돌아왔지만 큰 아들은 집으로 안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집안의 탕자인 것입니다. 그동안 탕자의 비유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오늘은 집 안의 탕자의 비유에 관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사실 이 비유에 중요한 분은 사랑이 많은 아버지입니다.
1. 예수께서 왜 이 비유를 하신 지 아십니까?
누가복음 15장 1, 2절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따라서 탕자는 세리와 죄은들을, 큰 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킵니다.
큰 아들은 어떻게 보면 시키는 대로 하는 범생입니다. 그러나 살아 돌아온 동생에 대한 걱정이나 연민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 날도 맏아들은 밭에서 일하다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미 상속을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위해서 밭에서 일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 것입니다.
집 가까이에서 풍악와 춤 추는 소리를 듣고 도대체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한 종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종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된 것을 보고 너무 기뻐서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2. 잘 하면서도 불행한 사람
이 종의 말을 듣고 큰 아들은 어떤 반응을 나타냈을까요? 당신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그는 화가 잔뜩 나서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돌아와서 들어가자고 권합니다. 그러자 큰 아들은 아버지께 섭섭한 마음을 토로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무엇이든지 말씀하시면 그대로 지켜 왔습니다. 그동안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친구와 즐거워하도록 해주신 적이 있습니까?
둘째 아들과 첫째 아들을 비교하면 누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까? 첫째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둘째 아들과 비교해서 억울하다고 투정을 부리는 것입니다. 자기 동생이 사고 치고 돌아왔지만 보고 싶은 마음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도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오래하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가?
그들은 죄인들에게 베풀어지는 죄 사함과 구원의 은총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우리는 자신보다 훨씬 악한 죄인으로 여기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하시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얼마나 쉽게 분노하는가? '나한테 뭐 해준 게 있느냐?'고 따지는 사람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당연히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헤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철저히 인정하기 때문에 구원의 은혜를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반면에 첫째 아들은 자신은 대우를 받는 것이 마땅한데 왜 나한테는 그런 은혜를 주시지 않느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재산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렸다고 표현합니다. 둘째 아들에게 나중에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을 말하는데 마치 아버지의 살림 전체를 말아먹은 것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살아계시기 때문에 2/9정도 받고 큰 아들은 2/3를 받게 될 것입니다(신 21:17)극단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아들이 돌아왔다고 어떻게 살진 송아지를 잡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큰 아들의 이런 지적은 정당한 것처럼 보이고 설득력이 있지 않습니까?
3.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
큰 아들은 자기 동생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일지 몰라도 내 동생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가장 위하는 것 같지만 아버지를 가장 모르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아들이었습니다. 큰 아들은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간 후에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어 하고 고통스러워 하시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네 동생이라고 부릅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아버지는 죽었던 아들이 돌아온 것 자체로 기뻐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지만 큰 아들은 동생이 잘못된 행동을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동생을 위해서 아버지가 기뻐하고 잔치를 벌인 것 자체가 화가 났던 것입니다. 큰 아들은 동생이 돌아온 곳에 대해 전혀 반가워하거나 기뻐하지 않습니다.
큰 아들에게는 동생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합니다. 이러한 큰 아들의 반응에 대해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잖니 큰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자신이 희생당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못마땅해 하는 큰 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 내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람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것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오는 것과 같이 기쁜 일입니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벌인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일차적으로는 아버지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너무 기뻐서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둘째 아들을 위한 것은 이차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이 잔치가 동생을 위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동생을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면 자신에게 돌아올 몫이 적어진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동생은 아버지를 떠나 먼 곳에서 방황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항상 집에 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몸은 집에 있지만 마음은 항상 밖에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아버지께로 돌어가야 할 때입니다.
”큰 아들은 자기 중심에서 판단하고 생각할 뿐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집안의 탕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한 집에서 두 아들이 자라고 있는데 한 아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다른 아들이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데 부모님이 걱정하실까봐 얘 어른이 되다 보니 우울증으로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큰 아들이 동생이 돌아온 것을 누구보다도 기뻐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렸더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여기서 큰 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킵니다. 큰 아들은 자기 의를 내세우는 우월감과 자만심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사랑을 받으면서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첫째 아들의 이러한 태도로 미루어 보건대, 내적으로는 오히려 그가 '잃어버린 아들'입니다. 자기 동생을 향하여 당신의 이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는 사랑의 관계를 느끼지 못합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편애한다고 불만을 터트립니다. 두 아들 모두를 한결같이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아들을 잃어버리면 가장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잃어버린 아들일까요? 아들을 잃은 아버지일까요? 아버지를 떠난 인간이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 주님은 인간들보다 더 고통을 당하십니다. 셋째 아들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