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야고보서 강해

liefd 2025. 1. 10.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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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서신 연구과제, 곽은옥,

 

1. 야고보서의 저자 야고보

 

(1) 야고보서의 저자 문제

야고보란 이스라엘 민족 조상의 이름으로서 유대인에게는 흔한 이름 중의 하나이다. 신약성서에서 야고보라 불리우는 사람으로는 세베대의 아들이요 요한의 형제(10:2; 3:17; 6:14), 알패오의 아들인 사도(10;3, 3:18, 1:13), 주의 형제(13:55, 1:19), 마리아의 아들이며 요세의 형제인 작은 야고보”(15:40, 27:56, 24:10), 사도 유다의 아버지(또는 형제, 6:16, 1:13), 유다서의 저자의 형제(1) 등이 있다.

 

위의 아고보들 중에 알패오의 아들과 작은 야고보는 동일의 인물로 믿어지고 있으며, 유다의 아버지는 별로 저명하지 않으므로(또는 제롬의 주장처럼 그가 알패오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본서의 저자로 문제가 될 수 없으며 결국 문제는 세베대의 아들, 알패오의 아들, 및 주의 형에 중의 어느 야고보냐에 있다.

 

()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이 설의 근거는 본서의 내용이 주 예수의 교훈과 세례 요한의 교훈과 유사하므로 그들의 교훈을 친히 들은 초기의 제자일 것, 2:1영광의 주란 벧후1:16-18과 상통하므로 저자 자신이 변화산의 영광을 목격했을 것, 본서에 시기와 다툼을 반복해서 경계하고 있음은(3:14, 16 ) 저자가 주의 보좌의 우편과 좌편을 구하다가 주님의 질책을 받은 경험이 있는 까닭인 것 의 추측적 이유를 든다. 만일 이 학설이 옳다면 본서는 야고보가 주후 44년에 순교하기 전에(12:2)기록했을 것이므로 신양에서 가장 오래된 책 중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사실 그런 가능성은 거의 없으므로 따라서 이 학설은 별로 지지를 받지 못한다.

 

()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만약 저자가 자신이 알패오의 아들이었다면 자신을 사도라 불렀거나 자기의 신분을 나타냈을 것이다. 그가 작은 야고보라면 이름 그대로 저명하질 못했을 것이며 따라서 본서의 저자로서 부적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를 주의 형제와 동일시하는 제롬의 학설로 인해 그는 유력한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이 학설도 근거가 희박하므로 지지를 받지 못한다.

 

() 주의 제자 야고보

이상의 다른 어떤 학설도 그 근거가 박약함에 비추어, 결국은 본서의 저자가 주의 형제라는 견해가 가장 무게있게 전해 온 학설이다. 그러나 주의 형제라는 이름아래 그 내용은 각양이었다.

 

(2) 본서의 저자 야고보

 

() 그의 인척 관계

에피파니안설(The Epiphnian theory): 이 이론은 에피파니어스가 주장한 것으로 주의 형제란(자매도) 요셉의 전처의 소생이며, 그러므로 예수의 형이라는 것이다. 이 학설은 카톨릭 교회의 마리아의 종신 동정설을 증명하려는 것으로 그 치명적 약점은 신약성서에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많은 전설 또는 그것을 반영하는 외경에 입각해 있다는 것이다.

 

히에로니머스설(The Hieronymian Theory): 제롬에 의한 학설로서 주의 아우는 알패오의 아들인 사도이며(10:3), 성모 마리아의 동생으로서 주의 이종 형제라는 것이다. 이 학설의 근거로서 1:19에 의하면 주의 형제는 사도인듯 한 것, 19:25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는 성모의 자매로 해석할 수 있고 그가 바로 알패오의 아내라는 것, 15:40에 의하면 작은 야고보의 형제는 요세이며 그 어머니는 마리아이므로 그는 바로 소위 글로바의 마리아인 것, 6:16, 1:13야고보의 아들 유다야고보의 형제 유다로 읽으면 결국 알패오의 아들은 야고보, 요세, 시몬, 유다(13:55)중의 세 사람까지 같은 이름이 되는 것 등을 든다.

 

그러나 본설이 가합하지 못한 이유로서 주의 형제들은 처음은 주를 믿지 않다가(7:35, 12:46) 주의 부활을 목격한 후에야 믿게 되었으나(고전 15:7; 1:14) 알패오의 아들은 처음부터 제자였다는 것,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작은 야고보로서 사도들 중에서 그 지위가 미미하였으나 주의 형제는 예루살렘교회의 기중으로서 교회의 중진이었던 것, 19:25의 주의 이모는 살로메(16:1)로 본 것으로 그를 알패오의 아내로 보기 어려운 것, 성서에는 알패오의 아들들과 주의 형제들은 늘 따로 기록되고 혼돈되어 있지 않은 것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본설의 성경적 근거는 극히 애매함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지지자를 가지고 있다. 그대에서는 크리소스톰, 데오도렛, 어거스틴, 중세에 와서는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다 본설을 받아 카톨릭의 정설을 형성하였고 근대에 와서도 개혁자 루터같은 자도 이를 지지하고 있다

 

헬비디어설(The Helvidian Theory): 이는 주의 형제와 자매(13:55)를 요셉과 마리아의 자녀로서 주님의 동생들로 보는 가장 자연스러운 견해이다. 오리겐이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공언에 의하면(그들은 이 설을 지지하지 않았으나) 2세기의 신자들의 대다수는 이 설을 따랐다고 한다. 이와 같은 학설은 고대의 터툴리안, 헤게십푸스, 등의 정명한 지지자가 있었고, 4세기의 반대설이 대두하여 중세에 카톨릭의 마리아의 종신동정설에 의에 압도를 당했으나, 근대에 와서는 프로테스탄트 학자 간에 지배적인 정설이 되어 있는 것이다.

 

() 저자 야고보의 사상과 생애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고(12:17 ; 15:13 ; 21:18 ; 2:12) 바울은 그런 그를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교회의 기둥 중의 한 사람으로 소개했었다(2:9). 초대교회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야고보도 예수의 생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없었다가(1 3:55 ;  6:3 ; 7:5), 이처럼 예수에 대한 신앙이 없던 그가 주님의 제자가 된 것은 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이다(1:14). 그리고 사도 야고보가 순교하고 베드로가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후 팔레스타인을 떠났을 때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권을 넘겨받았던 것으로 보인다(12:17).

 

바울은 회심 후 3년 만에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왔을 때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기록하였다(1:19). 이것은 야고보가 초대 교회 초기부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또한 그는 이방인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문제로 모인 예루살렘 총회 때의 의장이었다(15:13).

 

그리고 제3차 전도여행을 끝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서 이방인 가운데 사역하신 것에 관하여 장로들과 함께 있던 야고보에게 상세히 보고하였다(21:18,19). 이처럼 초대교회의 영적 생활에 영향을 미칠만한 실질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야고보는 믿음의 실천을 외면하던 자들을 향하여 실천적 신앙을 촉구하기 위하여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

 

야고보가 편지를 보내는 대상은 로마제국(특히 수리아 지방)내에 흩어져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들의 유대적 색채는 야고서의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그들은 외부로부터의 박해와 내부로부터의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시련을 통과하고 있었고, 야고보는 그들을 격려한다. 공동체 내부에는 죄와 분열이 있었으므로 야고보는 그들이 죄를 고백하도록 도우려 한다. 야고보는 그들에게 완전함과 영적인 성숙을 요구한다.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문제에 관해서 야고보와 바울 사이에는 아무런 상충이 없다. 바울은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설명하며(3-4), 야고보는 사람의 믿음이 행위로 증명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죽은 것이라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야고보는 바울이 주장하는 믿음을 기초로 하여 말하는 바 신앙과 행함을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열매로서의 행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지만 우리를 구원한 그 믿음은 선한 행위로 우리를 이끌어 가며 사랑의 행위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2.올바른 기도와 잘못된 기도(야고보서 1:5-8)

 

(1) 올바른 기도(1:5-6b)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1:5a)

 

지혜를 구할 것

 

본문은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부족한 존재이므로 부족한 것이 많이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부족한 것들 가운데서 특히 부.권력.명예, 쾌락 등을 추구한다. 그러나 본문은 정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이 지혜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부족한 것이 지혜인 줄을 모르고 살아간다.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으며, 그 지혜 속에 장수와 부귀가 있고 평강이 있으며 생명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참조. 3:14, 16-18).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최선의 선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삶을 조정하는 가장 근원적인 원리의 공급자이기 때문이다. 이를 가장 잘 안 사람이 솔로몬이었다. 솔로몬은 왕에 즉위하자 꿈에 나타난 하나님께 이 지혜를 구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총명한 왕이 되어 부와 영광을 누렸다. 지혜는 지식을 가장 선용하는 주체이고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값진 선물이다.

 

지혜의 본질

 

그러나 지혜에는 참 지혜와 거짓 지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참조. 고전1:20-21). 참 지혜는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지혜이고, 거짓된 지혜는 인간에게 허무와 생명을 주는 지혜이다. 성경은 참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참조. 고전 1:24).이는 하나님께서 영원 속에 감추어 놓으셨던 하나님의 지혜인데 십자가를 통하여 이 세상에 드러내신 지혜이다(참조. 고전 2:6-8). 인간이 참으로 구해야 할 지혜가 바로 이 십자가로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알아야 한다.

 

() 누구에게 구해야 하는가?(1:5b)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구할 것(1:5b)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들을 보존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당신의 공장과 창고로 보신다. 육신을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하늘에서 비와 햇빛을 주시고 대기로부터 공기를 공급해주시고 땅으로부터는 모든 자원을 생산해 내신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 계신다(참조. 24:1).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영적으로 부요케 해주시는 분이시다(참조. 2:4 ; 13:52). 이와 같이 구하는 자에게 넘치도록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구할 것(1:5b)

 

야고보는 시험을 당하여 지혜가 부족할 때 간절히 그것을 구하라고 명령하면서 그 간구에 하나님께서 분명히 응답하여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는 말은 구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응답하신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다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참조. 7:7-8).

 

자기 정욕을 위해 구하는 자에 대해서는 부당하게 여기실지라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성장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성장하기 위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자에 대해서는 기쁘게 여기신다. 하나님은 빈부의 귀천이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필요한 지혜의 부족을 느끼고 그것을 구하는 자에게는 멸시하거나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조건없이 단순하게 주시는 분이다.

 

() 어떻게 구해야 하는가?(1:6a.b.)

 

 

믿음으로 구할 것(1:6a)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는 성도들에게 일상의 생활에서 필요한 것을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믿음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물이다.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은 죄악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는 유일한 방편입니다. 하나님을 만유의 주재이신 절대자인 동시에 인간에게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아버지로 확고히 믿는 것은 인간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의 자리에서 은혜를 받아 누리는 성도의 자리로 올려놓는다. 즉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통하며 부족함 없는 삶을 살도록 보장해 주는 능력의 원천인 것이다.

 

의심하지 말 것(1:6b)

 

야고보는 믿음으로 구하는 명령과 함께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는 권면을 덧붙인다. 여기서 의심이란 분리하는 것”, 나아가서 서로 다투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단순한 불신앙과는 다르다. 신앙과 불신앙, 신뢰와 주저 등 양단간에서 헤매는 마음을 상태를 뜻한다. 의심은 하나님의 실존과 기도의 능력 그리고 자신의 신앙에 대한 분명하고 확고한 믿음을 갖지 못했을 때 생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의심은 신앙의 상실이며 포기라고 할 수 있다.

 

(2) 잘못된 기도(1:6c-8)

 

() 의심하는 자의 기도(1:6c-7)

 

야고보는 의심하는 자의 모습을 바람에 밀려 이리저리 밀려 흔들리는 바다 물결 같은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바다 물결이라고 비유한 것은 어느 때는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잔잔하다가도 이내 요동치며 험상궂게 변모해 버리는 바다의 물결은 참으로 그 잔잔함을 믿을 수 없는 불안정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의심은 외부적인 요인인 바람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의심하며 기도하는 자는 그의 신앙이나 기도가 결코 완전한 것이 될 수 없다.

 

()두 마음을 품은 자의 기도(1:8)

 

본문에서는 하나님께 구하는 자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는 권고와 아울러 의심하는 기도는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것이므로 기도의 응답을 받을 리 만무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두 마음을 품어란 뜻의 디스마음’, ‘영혼이란 뜻의 프쉬게로 이루어진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두 번의 마음이나 망설이는’, ‘동요하는’, ‘의심하는또는 시련의 때에 필요한 믿음의 일관성과 결의가 부족한이란 뜻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은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마음으로, 일관성있는 태도를 기대하기 힘들다.

 

또한 의심하는 자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오가며 두 주인을 섬김으로(6:24) ‘정함이 없는 자이다. ‘ 정함이 없는으로 번역된 아카타스타토스는 부정불변사 세우다’(12:14), ‘맡기다’(25:21) 등의 뜻을 지니는 동사, 카디스데미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문자적으로는 세워져 있지 않은이란 뜻을 지니며 주로 불안정한‘, 일정하지 않은’, 변하기 쉬운, 이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는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잃고 제대로 판단내리지 못하며 방황하는 삶을 의미한다. 이런 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열심히 기도하는 듯하다가도 곧 마음이 변하여 인간적인 방법을 강구하는 등 변덕을 부리게 마련이다. 하나님은 비록 후히 주시는 분이지만 이런 자에게는 어떠한 응답도 하지 않으신다.

 

 

3. 성도들의 영적생활 3단계(야고보서 1:19-27)

 

야고보는 성도들의 영적생활의 1단계로 말씀을 신중히 듣는 자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1) 성도들의 영적생활 제 1단계-청종하는 단계(1:19-21)

 

먼저 성도들 각자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와 성내기는 더디 하여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 통제받아야 할 입(1:19 a.b.c)

 

야고보는 설교를 들을 때나 토론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경청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주장만을 많이 말하려는 경향에 대해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명령한다. 즉 상대방의 말은 빨리 듣되 그것에 대한 충분한 생각은 충분히 한 후에 서서히 말하라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을 참을성을 가지고 귀 기울여 경청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잘 듣지 않는 사람은 자기 의사만 드러내기에 급급한 사람이다(18:2)

 

() 천천히 소화시켜야 할 분노(1:19d-20)

 

분노를 폭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므로 말하기와 동일하게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사람이 화를 안 낼 수는 없겠지만(4:26), 성내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긋나게 하며, 상대방의 마음을 상처를 주게 되므로 할 수만 있으면 화내는 일을 자제해야 한다.

 

() 새로운 것으로 접붙이기(1;21)

 

앞 절에 나온 성내는 것과 본 절에 나오는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이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20절에 나오는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야고보는 본 절에서 이와 관계되는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으로부터 벗어나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성내지 말기 위해서는 단지 나타나는 노여움의 표시를 억제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근원인 마음의 악을 버려야 한다.

 

21절 상반절에서는 소극적인 면을 다루었으나 21절 하반절에서는 적극적인 면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는 식물의 비유를 들고 있다. 그것은 마치 마음에 뿌린 씨앗처럼(13:21)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여 굳게 심으라는 것이다. 온유란 성냄의 반대로서 팔복에도 강조되어 잇다(5:5). 그것은 이웃에 대하여 부드럽게 대하는 태도를 말한다(4:2).

 

(2) 성도들의 영적 생활 제 2단계-실천 단계(1:22-25)

 

() 들은 것을 실천으로 연결되어야 함(1:22)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전제로 하는 것은 들은 대로 행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아무리 말씀을 많이 듣고 주의 깊게 들어 우리 마음에 새긴다 할지라도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다. 듣고도 행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듣지 않는 것만 못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거울을 보고 잊어버린 어리석음(1:23-24)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어 23-24절에서 듣기만 하는 자에 대한 실상을 거울의 비유를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야고보는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자를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나 돌아서면 곧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다고 설명한다. 야고보는 이 비유를 사용하여 말씀을 들을 때는 자신의 실체를 분명히 직시하고서도 뒤돌아서서는 그 말씀 속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곧 잊어버리고 말씀을 따라 행하지 않는 자를 자신을 속이는 자의 모습이라고 밝히고 있다.

 

()의무를 행하는 자가 자유롭다(1:25)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을 완성시킨 온전한 율법으로 그것은 바로 자유케 하는 율법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8:2)이라고 함으로써 복음을 하나의 새로운 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만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으로서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것이다.

 

(3) 성도들의 영적 생활 제 3단계-예배하는 단계(1:26-27)

 

1:22-23절에서는 말씀을 들은 자는 실천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이어지는 26절은 참된 경건은 오직 말씀의 실천으로 입증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참된 경건과 예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 헛된 예배(1:26)

 

아무리 종교적 행위를 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혀를 제어하지 않고 자신을 속이면서 경건하다고 생각한다면 그의 종교적 행위는 헛된 것일 수밖에 없다. 역으로 참된 경건, 참된 예배는 혀를 제어하여 선행하는 삶과 말씀을 실행하는 삶에 있다는 말이다.

 

() 진정한 예배(1:27)

 

참된 경건, 참된 예배의 모습은 고아와 과부 등을 그들의 환난 중에 돌아보는 이웃 사랑의 모습을 통해서 나타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는 거룩한 삶의 모습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의 이웃에 대한 관심

 

하나님은 성도들이 예배의 형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선한 삶을 통해서 영광돌리기를 원하신다. 이웃을 사랑하고 불쌍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어떤 제사의 봉헌보다 큰 의미를 지니는 진정한 예배이다(참조. 9:13, 12:7). 사랑은 예배보다 더 경건한 믿음의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자기에 대한 관심(1:27c)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들 중의 하나는 자기를 지키는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다. 경건한 자는 어떤 경우에나 흔들림 없는 가운데 믿음 가운데 자신의 삶을 지켜 나갑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경건한 삶을 살고자 하는 성도는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경건한 삶은 늘 자기를 제어하며 자기 성찰을 통해 성숙하게 살고자 하는 자만이 영위할 수 있다.

 

4. 소위 잘못된 믿음과 참된 믿음(야고보서 2:14-26)

 

야고보는 1:14-20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잘못된 믿음과 1:21-26절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참된 믿음을 대조시키고 있다.

 

(1) 소위 믿음-잘못된 믿음(2:14-20)

 

믿음이란 머리의 문제도 입의 문제도 아니고 마음의 문제이다. 마음으로 불신앙의 생활을 뉘우치며,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거듭나는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행함은 자연히 따라오는 법이다. 1:14절에서 야고보고 말하는 그 믿음은 엄격한 의미에서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소위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

 

()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믿음(2:14a.b)

 

자기 스스로 믿음이 있노라하는 믿음

 

믿음이 있노라고 말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그의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그런 믿음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행함이 없는 무익한 믿음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 무익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여기에서 헛 것이란 신약 성경에서 대체적으로 사물의 헛됨에 대하여 사용되는 용어이다(4:5, 5:6, 고전15:14). 본문에서는 사람에 대해 영적인 실속과 부요가 없음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없는 믿음이며, 생산적이지도 못한 쓸모없는 믿음이다.

 

() 남에게도 도움을 못주는 믿음(2:15-16)

 

가난한 자에게 편안하라고 하는 사람

양식이 없는 자에게 배부르라 하는 사람

의복이 없는데 따뜻하라 하는 사람

말만하고 전혀 도움을 안주는 사람

 

어려운 사람에 대해 말로만 동정하고 실제로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완전히 무시하고 말로만 반응하는 그들의 반응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형제나 자매에게 베풀어주어야 하는 최소한의 사랑의 행위조차 행하지 않는 위선적인 태도다

 

() 생명이 없는 죽은 믿음(2:17-18)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단언한다. 말만 하고 행위가 없는 믿음은 외식이고 위선이고 그것은 곧 믿음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었으므로 열매가 없음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 신앙 인격에 부합하는 행위가 따르는 것으로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조롱을 당해도 보여줄 것이 없는 믿음(2:18)

 

여기서 란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는 자이고, ‘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진 자이다. 그러나 사실 후자는 여기서 성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본 절은 익명의 사람을 등장시켜 어떤 사람과 논쟁하는 형식을 빌려 믿음과 행함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런 믿음의 수준(2:19-20)

 

알기만 하는 귀신 수준(2:19a)

두려워 떨기만 하는 귀신 수준(2:19a)

허탄한 사람이란 소리를 듣는 수준(2:20)

 

이와 같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귀신처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있고 그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만 그의 뜻을 행하는 데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이제 야고보는 독자들로 하여금 행함이 배제된 믿음만으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다.

 

(2) 참된 믿음-열조들의 믿음(2:21-26)

 

() 아브라함의 믿음(2:21-24)

 

이삭을 바침으로 인정받은 믿음

온전한 믿음은 행함을 수반함

믿음의 가능성이 행함으로 말씀에 응함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직도 미완성임

 

야고보는 행함이 따르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된 아브라함의 사례를 제시한다. 그 결정적 시례로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실을 제시한다(21). 아브라함의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났으며 행함을 통해 그의 믿음은 온전케 되었다(22). 이렇게 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하는 말씀이 실현되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게 되었다(23). 이를 통해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은 지식적 믿음만이 아닌 믿음에 근거한 행함으로 이루어진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24)

 

() 기생 라합의 믿음(2:25-26)

 

그는 믿음을, 사자를 접대하여 보였음

만약 그가 실천하지 않았다면 죽었을 것임

 

야고보는 아브라함과 같은 위대한 인물만이 아니라 비천한 신분의 기생 라합 또한 그녀의 증명된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하심을 인정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실로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실천이 뒤따르는 믿음은 그들 자신이 의롭다함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야고보는 이러한 사례들을 통하여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의 원리가 모든 사람의 경우에 동일하게 보편적인 것임을 보여 주는 동시에 믿음과 부합하는 행함이 있어야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5. 왜 성도들의 입은 통제되어야 하는가?(약 3:5-12)

 

혀는 신체 중에서 작고 보잘 것이 없지만 그 위력은 실로 대단하여 온 몸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혀를 제어하면 몸 전체를 제어할 수 있게 되고 만일 혀를 제어하지 못하면 인생 전체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갈 가능성이 커진다.

 

(1) 혀의 파괴력(3:5-6)

 

혀는 신체 중 작은 일부이나 크다고 자부함

혀의 파괴력은 불과 같음(3:6a)

혀는 우리 몸 중에 악의 세계임(3:6b)

혀는 전인격을 오염시킴(3:6c)

혀는 전생애를 불사름(3:6d)

혀는 그 사르는 것이 지옥적임(3;6e)

 

야고보는 혀를 파괴와 파멸, 황폐를 일으키는 도구로 말하고 있다. 혀는 몸에서 지극히 작은 지체에 불과하지만 큰 파멸을 일으킨다. 그래서 야고보는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3:6)라고 표현하고 있다. 혀는 불꽃과 같다. 혀에서 나오는 거짓말과 잡담과 허탄한 이야기는 불의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야고보는 말의 파괴성을 혀는 우리의 지체에 붙어있으면서도 온 몸을 더럽고 삶의 바퀴를 불태운다표현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옥에서 나오는 불꽃인 것이다.

 

(2) 혀의 비통제성(3:7-8a)

 

인간은 외부에 있는 것을 통제함(3:7)

각종 짐승: , , , 원숭이, 사자 등

: 앵무새, , 타조, 비둘기,

벌레: , 귀뚜라미, 여치

해물: 물개, 고래, 해표

그러나 자기 입 안에 있는 혀는 길들이지 못함(3:8a)

 

혀를 길들여 악을 말하지 못하게, 불의를 뱉어 내지 못하게 할 수는 없을까? 혀를 길들인다는 것은 말을 조절하는 것이요, 말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마음을 통제하는 것을 뜻한다. 야고보는 이것이 아주 어렵다는 것을 이렇게 말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들, 벌레, 해물은 길들일 수 있다. 그러나 혀는 길들여지지 않는다.(7)

 

(3) 혀의 악독성(3:8b, c)

 

혀는 악을 쉬지 않고 쏟아냄

혀는 살인적인 독이 있음(3:8c)

 

혀에서 쉬지 않고 악이 나오며 죽이는 독이 나온다‘. 앞에서 야고보는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기구에 대한 예(굴레와 키)의 비유를 사용했는데 여기서는 더 적극적으로 길들임, 다스림에 대한 비유를 사용한 것이다. 말을 만들어 내는 혀, 마음의 문제는 단순히 조절하지 못함에 있지 않고 길들이지 못함에 있다.

혀는 적극적으로 의에 길들여지고 선한 말, 선한 것에 길들여지지 않는 한 쉬지 않고 악을 토해내고 죽이는 독을 뿜어낼 수밖에 없다.

 

(4) 혀의 이중성(3:9-12)

 

() 혀의 이중성의 모순

 

찬송과 저주의 이중성

하나님에게는 아부하고 사람을 능멸함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이것은 불가함

 

() 샘물도 그렇지 아니함(3:11)

 

() 나무도 그렇지 아니함(3:12)

 

유대 그리스도인은 한 입으로는 아버지를 찬송하고 한 입으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하고, 또한 한 입으로는 기도와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께 축복을 돌리면서, 또한 분노와 인내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저주한다.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비방이며 마귀적이다. 사단이 사람을 죄악으로 이끌듯이 저주로 비방하는 자 또한 지옥불에서 나는 혀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혀를 통제받도록 노력해야 한다. 혀는 독을 내어 사람을 죽이지만 신령한 혀는 양약과 같다(12: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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