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 부음 받은 종을 해하지 말라(사무엘상 24장), 김덕선 목사
본문 1절과 2절의 기록을 보면 사울이 온 이스라엘 전국에서 선발된 최고 정예병들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 일행을 제거하려고 엔게디 광야의 험한 산지에 이르렀습니다. 다윗을 따르는 사병들은 600명 정도이니 이보다 다섯 배가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일시에 다윗 일행을 섬멸하려고 작정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 때 사울이 생리적 현상을 해결하려고 동굴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3절에 보면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 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뒤를 본다는 말은 '용변을 보다'란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한편 사울이 바로 이 같은 생리 현상을 해결하기 위하여 들어간 그 굴 안쪽에는 다윗과 그 일행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아무튼 사울은 자기가 들어간 바로 그 굴에 숨어있던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발견치 못했습니다. 그 까닭은 동굴 입구는 볕이 드는 관계로 식별 가능하지만, 동굴 내부는 볕이 차단되기 때문에 캄캄했습니다. 따라서 동굴 내부의 다윗 일행은 사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었지만, 사울은 전혀 동굴 내부의 사정을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때 다윗의 부하들이 하나님께서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 주셨다고 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들먹이며 사울을 제거하겠다고 하였습니다.
4절에 보면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1.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사울을 해치지 않습니다.
다윗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절호의 찬스' 라고 말하며 사울을 죽이자고 하였습니다. 사울이 죽으려고 제 발로 걸어 들어왔으니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하들의 말은 설득력이 있는 말입니다. 다윗은 죄도 없이 사울의 미움을 받아 억울하게 도망 다니고 있고 다윗을 따르는 부하들도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울은 이미 경거망동한 짓을 많이 하여 인심을 잃었고, 그는 악령이 들어 종종 제 정신이 아닌 짓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이미 사무엘을 통해 차기 대권주자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백성들의 민심이 이미 다윗에게로 기울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겉옷자락만 살짝 벤 것 그것만 가지고도 마음 아파합니다. 그 일 자체가 여호와께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결례라고 생각하여 죄책감을 가진 것입니다. 이는 다윗의 순수하고 민감한 신앙 양심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그는 사울을 죽이자고 하는 부하들을 제지합니다. 6절과 7절에 보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고 하였습니다.
역대상16:22절에는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에게 손을 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해하지 말라 하셨도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시편105:15절에도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하셨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사울을 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요 불법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 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불법을 행해도 결과만 좋다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기주의/ 편리주의/ 성공주의에 빠진 세상의 처세술입니다.
다윗은 주어진 상황이 사울을 죽여도 누구하나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할 상황이 아니었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사울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말하였지만 사울을 해치지 아니한 근본 이유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일이기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행동원리입니다.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일이라면 자기의 감정과 욕심을 억제하고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다윗의 행동원리였습니다.
2. 다윗은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사울을 선대합니다.
굴에서 나온 사울을 향하여 다윗이 소리쳐 부른 다음 땅에 엎드려 절하고 외쳤습니다.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왜 들으십니까? 굴에서 부하들이 왕을 죽이라 하였지만 난 여호와의 기름 부은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내 손에 있는 옷자락만 베었을 뿐입니다.”라고 말한 후 이렇게 말합니다.
12절에는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하였고, 다시 15절에 보면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 보면 전 후 사정을 안 사울은 사실을 인정하고 다윗이 자신을 선대하였다고 말합니다.17절에 보면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고 하였습니다.18절과 19절에도 사울이 동일하게 다윗이 자신을 선대하였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사울을 해치지 아니하였을 뿐 아니라 사울을 선대하였습니다. 우리들도 이렇게 악을 선으로 갚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3. 다윗의 선한 행위는 원수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다윗의 진심을 안 사울은 일시적이지만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소리쳐 울었습니다. 16절에는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런 악한 자라도 다윗의 사랑에 감동을 받아 울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다윗을 향하여 복을 빕니다. 19절에 보면 “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변하게 하는 것은 교육이나 논리나 설득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감동을 받을 때만 심령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들이 권위적 명령이나 지적하는 것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며 흘리는 눈물이나, 가슴으로 끌어안는 사랑을 통해 변화가 일어 날 것입니다.
악한 사울도 선한 다윗의 선한 행실 앞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힘은 실로 놀랍습니다. 사랑만이 모든 악을 이길 수 있는 능력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원수인 사울을 선대한 것처럼 우리도 사랑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원수도 사랑하는 사랑의 행동이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