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바로 알기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요일 3:9)
요한일서 3장 9절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곳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직도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거듭나지 않은 것일까요? 거듭난 사람들 가운데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요한일서 1장 8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요한일서 1장 10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라.”
우리는 서로 대립되는 이 본문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본장에서 하나님께서 난 자마다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은 영지주의에 대한 경고입니다.
당시에 영지주의자들 가운데는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영지를 깨달은 자는 완전한 자가 되었으므로 죄를 지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사람들에게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은 스스로 속이는 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다른 한 부류는 영지를 깨달은 자에게는 영혼이 깨끗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범죄하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범죄하지 않는다고 경고하였던 것입니다.
1.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계속해서 짓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죄를 계속해서 짓는 자마다 법을 어기는 것이요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계속해서 짓지 아니하니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씨가 그속에 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심기워져 있고, 성령이 내주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죄를 계속해서 짓는 자는 자신이 마귀가 가진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며, 아직 그리스도가 갖고 계신 새로운 본성을 받지 못한 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특정한 문제들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시키려고 노력하라는 가르침을 제시하기보다 우리 자신이 근본적으로 바로설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마틴 로이드 존스, 요한일서 강해). 우리의 삶이 진리에 의해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 의해 지배받을 때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단번에 받되 주님의 형상을 닮는 데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있어야만 됩니다. 마귀는 죄의 유혹을 갖고 성결의 길을 막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이란 일평생 죄와 죄를 짓게 하는 마귀와의 전투입니다.
2. 왜 죄를 지으면 안될까요?
죄는 불법이요 형벌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법을 어겼을 때 가차 없이 형벌이 찾아 왔습니다. 죄의 결과가 너무나 엄청나서 아담과 하와는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범죄하는 순간 벌거벗은 것으로 인해 수치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빨리 무화과나무를 엮어서 앞치마를 해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창세기 3장 10절입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그렇게 하나님과 다정하게 지내던 그들이 죄를 짓자마자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하나님이 두려워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반갑고 즐거웠는데, 죄를 짓자 하나님이 두려워지고 무서워지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서 숨을 수밖에 없는 비극이 찾아온 것입니다.
죄의 결과는 당장 그들 생활 속에 수고와 고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입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오늘날 우리의 삶속에 말할 수 없이 수고롭고 고생스러운 것은 저주의 결과인 것입니다.
결국 육체적인 죽음이 찾아온 것입니다. 질병과 노쇠와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9절입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즐겁게 지내며 죽음이란 그림자도 없던 그들에게 갑자기 죽음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들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선언을 받을 때 그 비극적인 심정은 말로 다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우리의 양심이 벌거벗게 되면 마음에 고통이 다가오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의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번뇌하고 있습니다.
시편 32편 3절입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나이다.” 입을 열어 죄를 고백하기 전에는 종일 마음에 고통이 있어 뼈가 쇠하여질 지경이 되었다 하니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많은 육신의 병이 다가오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 39절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 죄가 마음속에 평안과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죄가 들어왔는데 평안할 리가 없습니다.
죄로 인해 탄식하면 마음이 평안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행복의 가장 조건이 평안입니다. 돈 많다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권력 많다고 행복하지 안구요.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자동차 타고, 좋은 옷 입고 산다고 평안하지 않습니다. 죄가 있으면 평안이 산산조각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는 마음속에 두려움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언제나 죄를 지은 사람은 바깥의 문풍지 소리만 나도 간이 덜컹 내려앉는 것입니다. 다리를 펴고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전화벨만 울려도 간이 덜컹 내려앉는 것입니다. 언제 내 죄가 폭로되고 내가 사정당국에 조사를 받고 체포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가운데 떨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죄의 결과로 형벌을 받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으면 두려움이 떠나가게 됩니다.
시편 107편 10~12절입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고 죄를 짓고 반역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고통이 마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죄를 짓고도 뻔뻔스럽게 살도록 내버려 놓으면 그 영혼은 영원이 버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고통스럽고 괴롭기 때문에 복음을 듣게 되고 회개하게 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슬프게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을 슬프게 합니다. 요한일서 3장 1절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이사야 1장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자식이 부모를 거역하고 나븜ㄴ 친구과 사귀면서 사고만 치고 다닌다면 부모의 마음이 어떨까요?
우리가 죄를 지으면 예수님의 사랑을 짓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 박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고난 받아 죄를 다 청산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용서를 주님의 은혜의 선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하시고 구원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망각하고 자꾸 죄를 지으면 주님의 십자가 고통을 헛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짓밟아서는 안 됩니다. 죄에 이끌려 주님을 배신해서는 안됩니다. 죄는 주님을 거역하고 마귀를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을 따라 죄를 짓게 만듭니다.
마태복음 26장 28절입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우리에게 자신의 살을 찢어주고 피를 흘려 주신분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 이외에 그런 사랑을 베풀어 주신 분이 어디 있습까? 죄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배신이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을 짓밟는 것입니다.
3. 어떻게 하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을까요?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 단호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요한일서 3장 6절입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엘리야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갈멜 산에 다 모아놓고 난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엘리야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열왕기상 18장 21절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 지니라.” 결단을 머뭇거리는 순간이 위험합니다. 죄를 과감히 끊어버리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는 두리 뭉실하게 섞어서 살고 싶어 합니다. 의도 행하고 죄도 행하고 거룩도 행하고 불법도 행하면서 그저 세상을 둥글둥글하게 살아야 된다고 합니다. 너처럼 그렇게 모나게 살아서 되느냐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보고 이래도 욕을 하고 저래도 욕을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기쁘고 즐겁게 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온 세상이 다 욕을 하더라도 예수님이 칭찬하고 기뻐하고 행복해 하면 그 길이 우리가 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에게 종이 되지 말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6장 16절입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죄의 종이 되면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고, 의의 종이 되면 결국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끊임없이 육체의 정욕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세상에 사는 이상 우리는 죄의 유혹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온 세상은 악한 자에게 속했기 때문에 마귀와 귀신들이 매일같이 우리를 둘러 진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를 입고 있는 이상 육체를 통한 육신의 정욕이 우리에게 항상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싸우지 않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귀와 우리를 둘러 진치고 세상이 우리를 둘러 진치고 있고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5~8절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 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돈, 지위, 명예, 권세, 쾌락, 이생의 유혹이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을 굳게 하여 대적해야 합니다.
로마서 8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는 해방을 받은 사람이고 끊임없이 해방을 누려야 하는 이유는 성령이 같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거기서 해방을 얻은 사람인 것입니다. 마귀를 바라보지 말고 성령을 바라보고, 육신의 정욕을 바라보지 말고, 나와 함께 계신 성령을 바라보십시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우리가 결단할 때 성령깨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연약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도우는 자가 와서 계신 것입니다. 연약하지 않은 자가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사람 없습니다. 스스로 죄악을 이기고 스스로 거룩하고 성결하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다 죄에서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 항상 마귀와 귀신의 공격을 받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의 유혹을 받고 있는데 여러분 이곳에서 인간의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십자가 없이 구원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성령 없이 우리가 거룩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보혈과 성령의 도우심은 끊임없이 우리가 추구해야 되고 의지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계속해서 지을 수 없으며 죄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성품이 이를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죄에서부터 일어나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빛 가운데로 되돌아가서 그 안에서 살려고 노력합니다”(마튼 로이드 존스, 요한일서 강해).
성경에 짝이 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사 34:16)
모든 성경은 짝이 있다는 말씀을 입증하기 위하여 본문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이 짝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지나치게 영적으로 해석하고 짜 맞추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전에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 개역한글에 보면 본문 15절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대부분 이단들이 이 본문을 그성경에 다 짝이 있다는 근거로 삼습니다. 과연 오늘 본문이 이런 의미일까요? 성경을 해석할 때 문맥을 무시하고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러한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구약과 신약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전체 문맥을 무시하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오늘 저는 본문을 통해서 성경을 해석하는 두 가지 원리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1.성경을 해석할 때 전체의 맥락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이사야 34장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택한 백성들을 대적하는 나라들을 멸망시킨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하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은 열방을 심판하실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열방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로하고 구원하신다는 약속을 시사합니다.
본문 1절입니다. “열국이여 너희는 나아와 들을 지어다 민족들이여 귀를 기물일지어다 땅과 땅에 충만한 것, 세계와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이여 들을 지어다.” 여기서 말하는 열국은 어떤 나라들을 가리킬까요? 하나님의 백성들을 거스리는 나라들을 가리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합니다. 땅과 땅에 충만한 것, 세계와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것을 촉구합니다.
본문 2절입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진노하시며 그들의 만군을 향하여 분내사 그들을 진멸하시며 살륙당하게 하셨은즉”. 하나님께서 열방을 진노하시며 진멸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의 범죄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것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만을 사랑하고 다른 열방들은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한 백성들을 통하여 열방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다만 열방이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자신의 택한 백성이라 하더라도 복음의 메시지를 거부하면 심판하십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2.성경을 해석할 때 전후 문맥을 살펴서 연결시켜야 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그 살륙 당한 자는 내 던진 바 되며 그 사체의 악취가 솟아오르고 그 피에 산들이 녹을 것이며”. 살육당한 자의 수효가 너무 많기 때문에 매장하지도 못하고 내어 던지게 됩니다. 사체가 부패하면서 풍기는 악취가 천지를 진동시키고, 흘러내리는 피로 인해 산들이 녹아내립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살륙을 당할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본문 4절입니다.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 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같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라.” 하늘의 만상이 사라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별들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가 같이 말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나타나는 현상을 방불케 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0절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만물의 쇠잔함이 극심하게 나타나는데 포도나무와 잎이 마르고 무화과나무의 잎이 떨어짐과 같습니다.
5-15절은 열국 가운데 특히 에돔을 예로 들어 하나님의 심판이 어떠한 지를 보여줍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으로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훼방하고 대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의 원수 에돔 사람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여호와의 칼이 하늘에서 족하게 마셨은즉 보라 이것이 에돔 위에 내리며 진멸하시기로 한 백성 위에 내려 그를 심판할 것이라.” 이사야 선지자는 에돔의 진멸을 희생제사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여호와의 칼이 피 곧 어린 양과 염소의 피에 만족하고 기름 곧 숫양의 콩팥 기름으로 윤택하니 이는 여호와를 위한 희생이 보스라에 있고 큰 살륙이 에돔 땅에 있음이라.” 보스라와 에돔 땅에 대규모의 희생제사가 드려질 것을 예고합니다. 평민들을 위해 어린 양과 염소의 피, 기름과 숫양의 콩팥 기름으로 드려집니다.
본문 7절입니다. “들소와 송아지와 수소가 함게 도살장에 내려가니 그들의 땅이 피에 취하며 흙이 기름으로 윤택하리라.” 들소와 송아지와 수소가 함께 도살장에 내려가 희생제물을 잡으니 땅이 피에 취하며 흙이 기름으로 윤택하게 됩니다. 그들의 땅이 윤택하리라는 것은 그들이 무덤에 묻히지 못하는 치욕을 당할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범한 죄악으로 말미암아 무서운 징계를 받게 될 것입니다.
본문 8절입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보복하시는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라.”여호와께서 에돔을 이토록 잔혹하게 진멸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그것을 '여호와의 복수'라고 표합니다. 그 복수는 에돔으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고 핍박을 받아온 시온을 위한 것입니다. 에돔은 시온에 대한 그들의 범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보복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힌 감정적인 차원의 보복이 아니라 잘못을 바로 잡으려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냅니다.
본문 9, 10절입니다. “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 그 티끌은 유황이 되고 그 땅은 불붙는 역청이 되며 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아니하고 그 연기가 떠오를 것이며 세세에 황무하여 그리로 지날 자가 영영히 없겠고.” 에돔은 사해(死海)에 인접(隣接)하여 있기 때문에 그 곳에는 역청과 유황이 많았습니다. 에돔의 시내가 변하여 역청이 되고 그 티끌은 유황이 되고 그 땅은 불붙는 역청이 된다는 것은 에돔 땅이 영원히 황폐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방불케 합니다. 꺼지지 않는 불과 끊임없이 떠오르는 연기는 세상의 종말을 암시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3절입니다.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에돔의 땅을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될 것입니다. 에돔 땅은 완전히 황무하였고 이따금 큰 건물 유적이 있는데 아라비아 사람들은 그것을 가축의 우리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헤브론에서 남쪽으로 이틀 동안 걸어가면 사람 사는 곳이 전연 없고 무서운 황무지이기 때문에 여행자들이 통과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당아새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에 살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위에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드리우실 것인즉.” 황무한 에돔 땅에 당아새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에 살게 되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오늘날 여행자들의 말에 의하면, 거기에 당아새가 많기 때문에 아이들이 막대기를 던져서 그것을 잡을 수 있는 정도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위에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드리운다는 것은 에돔이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함을 나타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그들이 국가를 이으려 하여 귀인들을 부르되 아무도 없겠고 그 모든 방백도 없게 될 것이요.” 그들이 국가를 일으키려고 귀족들과 방백들을 찾아보지만 아무도 없습니다. 이제 에돔은 왕국으로서의 에돔의 운명이 끝났음을 보여줍니다.
본문 13절입니다. “그 궁궐에는 가시나무가 나며 그 견고한 성에는 엉겅퀴와 새품이 자라서 승냥이의 굴과 타조의 처소가 될 것이니.” 궁궐에는 대신 가시들이 덮고 엉겅퀴와 찔레들이 성을 덮을 것입니다. 에돔은 시칼의 소굴이 되고 올빼미의 보
금자리가 될 것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들짐승이 이리와 만나며 숫염소가 그 동류를 부르며 올빼미가 거기에 살면서 쉬는 처소로 삼고.” 들짐승이 이리 떼와 만나며 숫염소들이 서로를 부르며 울어댈 것입니다. 오랫동안 보금자리를 찾아 헤맸던 이러한 짐승들이 궁궐에 살면서 쉬는 처소로 삼을 것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부엉이가 거기에 깃들이고 알을 낳아 까서 그 그늘에 모으며 솔개들도 각각 제 짝과 함께 거기에 모이리라.” 부엉이가 거기서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새끼들을 부화시켜 자기 날개 아래 보호할 것입니다. 거기에 솔개들도 짝을 지어 함께 모일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짝은 성경의 짝이 아니라 짐승의 짝입니다. 에돔의 파멸이 영구적인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본문 16, 17절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에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그것들을 위하여 제비를 뽑으시며 그의 손으로 줄을 띠어 그 땅을 그것들에게 나누어 주셨으니 그들이 영원히 차지하며 대대로 거기에 살리라.”
여호와의 두루마리 책에 이 짐승들의 이름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입으로 명령을 내리셔서 이 짐승
들을 모으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제비를 뽑아 줄로 재어 가나안 땅을 나누어주셨던 것처럼 에돔 땅을 각종 짐승들의 암컷 수컷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에돔 땅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황폐화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에돔(요르단, 페트라)의 모습은 성경의 예언대로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그곳을 방문한 한 사람은 에돔 땅을 가리켜 “독수리들의 울부짖음과 매, 부엉이들만이 공중을 나르며 외로운 자신들의 둥지를 지키고 있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에돔의 폐허는 먼저는 앗시리아, 느부갓네살이, 나바타의 이주민들에 의해, 유다의 마카비에 의하여, 그리고 모슬렘 군대의 공격에 의해 초토화되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성경 구절 가운데 하나가 바로 빌립보서 4장 13절 말씀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이 본문은 많은 사람들이 가장 오해하기 쉬운 본문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을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된다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은 긍정의 힘을 강조하기 위하여 면서 이 구절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긍정적인 마인드기 아니라 성경적인 마인드를 갖는 것입니다.
1.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12절에 나오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구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일체의 비결“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11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오니.” 따라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것입니다.
자족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제러마이어 버로스의 [만족, 그리스도인의 귀한 보물]이란 책에 보면 “참된 행복이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내면으로 느끼는 깊은 만족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선하거나 강하지 않으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기에 세상 것들을 갖지 못한 때에도 지극히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데서 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만큼 자신이 행복해집니다. “자족”이란 사전적 의미는 “스스로 넉넉함을 느낌. 스스로 만족하게 여김”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자족”은 모든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1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바울이 처한 상황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본문 10절입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복음 사역을 위해 선교헌금을 보내려고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빌립보 교회가 에바브로디도 편을 통해서 바울에게 선교헌금을 보내게 되었고 이로 인해 바울은 받은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바울은 선교헌금 그 자체보다 빌립보 교회가 자신의 복음 사역을 위해 그동안 생각했던 것이 다시 싹이 나는 것처럼 감격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빌립보 교회의 사랑의 섬김에 깊은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바울이 선교 여행 초기에,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선교헌금을 보내준 교회가 빌립보 교회 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에 있을 때에도 한번 뿐 아니라 두 번씩이나 보내주었다고 감사합니다.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을 받은 순간을 기억하고 두고두고 감동을 전합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자신의 형편을 빌립보 교회에 전하면서 자신이 지금 경제적으로 어려워하는 것처럼 비쳐질까 봐 걱정합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바울은 자신이 궁핍한 가운데서도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토로합니다. 신자는 비천한 가운데서도 주님이 함께 하시므로 자족하는 기회로 삼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자는 풍부한 상황 속에서도 자족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비천한 가운데 살던 사람들이 부유해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비천한 상황이든지, 부유한 상황이든지, 어떠한 형편이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2.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본문 13절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리스도께서 내게 능력을 주실 때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족할 수 있습니다. 자족하는 비결은 스스로 초연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게 능력을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 때에 어떠한 형편에든지 만족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 8절에서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합니다. 7절에 기 이유가 나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당시에 이단들은 만족의 원천을 마음에 두지 않고 물질에 두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참된 만족은 지상의 행복과 불행에서 완전히 독립하여 마음의 평정을 누려야 한다고 했지만 실제는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직 평강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참된 만족을 누렸습니다. 자족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평강을 누리면서 사명을 감당할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예수님 안에서 충족되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주어진 상황이 좋아서 만족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인하여 만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는 아무리 채워도 결코 만족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3장 17-18절에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고 찬양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모든 것이 없어서 불편할지라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다면 당신은 복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적을 많이 목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에서 불평하며 원망하였습니다. 힘들고 불편한 상황이 생기면 원망하였습니다. 심지어 전에 받은 은혜까지 뒤집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망이라는 중독에 걸렸습니다. 각종 중독에 빠진 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마음에 채워지지 않는 부분은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중독을 치료하는 방법은 더 큰 중독에 걸려야 가능하다고 합니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에 중독되면 각종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시편 23편 4-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로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니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우리는 주일날 교회에 니와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제러마이어 버로스의 [만족, 그리스도인의 귀한 보물]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설교를 들으러 오거나 30분이나 한 시간을 기도로 보내거나 성찬을 받으러 나오는 때보다 만족을 통해 더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이런 것들은 단지 외적인 예배의 행위일 뿐입니다. 그러나 만족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기뻐하므로...영혼 자체를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영혼의 예배“라고 했습니다.
욥은 자신의 전 재산을 날리고 10 남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반응을 나타낸 지 아십니까? 욥기 1장 21절입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은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충격에 빠져 있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자세를 보게 됩니다. 내가 알몸으로 나왔으니 알몸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미련이 없는 것입니다. ”존 스타트는 디모데전서 주석에서 “이 세상에의 삶은 두 알몸 사이에서 존재하는 짧은 순례길”이라고 했습니다.
3.자족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끼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본문 17절입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바울의 관심은 빌립보 교회가 보낸 선교헌금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인 성장과 유익에 있었습니다. 자족은 스스로 만족하는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상대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물질 자체보다 보낸 준 사람들(빌립보 교회)의 유익과 축복에 관심이 있습니다. 자족은 상대가 보내준 것으로 인해 내게는 모든 것 있고 또 풍부하다고 기뻐합니다. 자족은 상대의 관계에서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로 초점이 모아집니다. 빌립보 교회가 보내준 선교헌금이 하나님께 드린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받아들입니다(18절).
자족하는 사람은 상대가 어떤 상황에서 보내준 것인지 알아주고 하나님께서 그 풍성한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하게 채워줄 것을 확신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 나누었을 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회가 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보내준 헌금으로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풍부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에바브로디도편을 통해서 빌립보 교회가 보내준 것을 내가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다고 말합니다. 신자들이 서로의 필요를 위하여 공급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풍성한 대로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19절).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부족한 형편 가운데서도 바울의 사역을 도움을 제공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채워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기도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더해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바울은 무엇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일까요? 바울은 일체의 자족하는 비결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족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어떠한 문제 앞에서도 자족하는 것 자체가 최고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면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풍요를 누립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은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로 족한 줄로 알라고 권면합니다.
무신자로서 변호사였던 글레렌스 대로우가 미국이 경기가 아주 나빴을 때 시카코 남부 지역에 있던 흑인 형제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아주 궁핍한 환경에 있었기 때문에 하루하루 간신히 연명할 정도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던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환한 얼굴로 찬송을 부르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대로우는 묻기를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당신들은 모두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도대체 이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어떻게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어떤 여자 한 분이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리는 찬양할 수 있는 예수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대답에 많은 사람들이 “아멘” 면서 맞장구를 쳤습니다. 대로우는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습니다. 이들은 비록 비참한 환경 속에 빠져 있었지만 자기들이 찬양할 수 있는 예수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환난 중에도 기뻐하고 감사하고 자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감사와 자족은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구주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자족하는 인생의 구체적인 세 가지 지침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까이에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히브리서 13장 5, 6절에 보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시고 돕는 자이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 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이 아십니다.
둘째로,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십시오.
세상은 우리에게 더 높은 성공, 더 많은 안전, 더 많은 소유, 더 많은 유산, 더 큰 업적, 더 많은 친구들, 더 많은 돈을 강조합니다. 만족한다는 것은 위험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만족을 배우는 데에는 단 하나의 효과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당신의 생각을 감사로 채우십시오. 이제 우리 삶의 초점을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바뀔 때 당신의 만족감은 더욱 커집니다.
셋째로,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자 청년은 자기의 소유를 기꺼이 나누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선한 사업에 부요해야 합니다. 자신이 부족한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눌 때 자족하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자족은 갑자기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공급하심과 그분의 약속을 끊임없이 상기함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소서(합 3:2)
하박국 선지자는 1장에서 악인이 왜 처벌을 받지 않고 하나님은 왜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은가?를 질문합니다. 2장은 하나님은 정한 때가 있으므로 참고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의 범죄로 타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왜 강포한 바벨론을 들어서 심판하시는지? 하박국 선지자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반문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수년내에 부흥하게 하소서의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3장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본문 3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기도는 2절에 나오고 대부분은 찬미와 감사의 노래입니다. '시기오놋'은 열정적인 시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빠른 리듬과 열정적인 감정의 변화를 유도하는 음악의 한 형태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는 그만큼 간절함과 긴박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간절하고 절박하게 이렇게 기도합니다. 본문 2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수년 내에’란 우리 시대에, ‘부흥하게 하옵소서’는 이루소서로 번역해야 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 시대에 주님의 일(계획)을 이루소서(행하소서)”가 올바른 번역입니다. 쉬운 성경은 본문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명성을 들었으며, 주께서 하신 일을 보고 놀랐습니다. 여호와여, 우리 시대에 주의 놀라운 일을 다시 행하여 주십시오. 우리 시대에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주께서 노하셨을 때에도 잊지 마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오늘 본문은 교회 부흥을 위한 본문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의 일’이란 바벨론의 심판을 말합니다. 이것을 우리 시대에 이루어 달라고 하박국 선지자는 절규합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는 날에도 아주 멸하지 마시고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달라고 호소합니다.
3절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사모합니다.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산에서 오시는도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갈망하는 표현입니다. 데만은 에돔의 주요 거주지 가운데 한 곳으로 에서의 후손들이 거주하던 사해 동남쪽 지역을 가리킵니다. 바란 산은 에돔과 시내 산 사이에 산이 많은 지역입니다. 이 지역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할 때 70인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입니다.
민수기 11장 16, 1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에 네가 알기로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자 칠십 명을 모아 내게 데리고 와 회막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내가 강림하여 기가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4절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의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의 손에서 나오니 그의 권능이 그 속에 감추어졌도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인한 광채가 햇빛 같고 하나님의 권능이 은밀한 것에 감추어져 있음을 나타냅니다.
5-6절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타난 직접적인 결과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본문 5절입니다. “역병이 그 앞에서 행하며 불덩이가 그의 발 빛에서 나오는도다.” 각종 전염병과 불 심판의 참혹함을 시사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그가 서신 즉 땅이 진동하며 그가 보신즉 여러 나라가 전율하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나니 그의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심판하심으로 땅이 진동하고 하나님이 바라보시니 여러 나라가 떱니다. 영원한 산과 무궁한 작은 산들이 무너집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만 예로부터 영원합니다.
7-12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민족들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 하박국 선지자가 보니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미디안 땅의 휘장들이 흔들리는 모습이 보입니다. 구산과 미디안은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괴롭혔던 민족들인데 그들이 공포와 겁에 질려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말합니다. 8절에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신다는 것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오는 개선 장군에 비유한 것입니다.
9절에 주께서 활을 꺼내시고 화살을 바로 쏘시고 주께서 강들로 땅을 쪼개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주께서 회개하지 않은 자들을 향하여 심판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8절 하반절에 의하면 주께서 시내들과 강과 바다에 분노하셨습니다. 본문 10, 11절입니다.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 날아가는 주의 화살의 빛과 번쩍이는 주의 창의 광채로 말미암아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 이는 자연계 전체가 흔들리고 우주적인 격변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본문 13절입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의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바닥까지 드러내셨나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원수들이 완벽하게 진멸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그들이 회오리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 바벨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회오리바람처럼 흩으며, 가난한 자를 삼키기를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의 용사의 우두머리를 주의 창으로 찌르셨습니다. 실제로 바벨론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바사 왕 고레스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본문 15절입니다.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이는 주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신 것을 말합니다. 본문 16절입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하박국 선지자는 바벨론이 남 유다를 공격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두려워서 떨고 있었습니다. 마치 창자가 흔들리는 것 같고 입술이 떨렸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러한 극도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견디며 인내했습니다.
본문 17절에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여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이는 예루살렘의 멸망의 때를 가리킵니다. 본문 18절입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과 재앙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다 잃었다 하더라도 하빅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실 것을 확신하며 기뻐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생존권이 박탈될 정도의 현실적인 위기에서라도 하나님을 향한 확고한 신앙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의인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는 그의 확신 때문입니다.
본문 19절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박국 선지자의 기쁨과 소망의 근거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즉 전쟁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땅에 농작물과 가축이 다 없어진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박국 선지자는 생존의 위기 가운데서도 자신의 발을 사슴의 발처럼 만드시고 나를 높은 곳에 뛰어다니게 하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의 일이 우리 시대에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 3:19)
베드로전서 3장 19절 다시 읽겠습니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오늘 본문에 대해서 오해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셔서 노아 시대 당시 죽은 사람들의 영에게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은 자들에게 선포하신 것은 복음으로 그들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더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옥에 있는 영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가톨릭은 이 옥을 연옥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죽은 자들을 위한 정화의 장소로 생각하여 이 본문을 연옥교리를 뒷받침하는 구절로 삼고 있지만 이것은 성경을 곡해한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어 지옥에 가신 적이 있다’고 해석합니다. 장로교 개혁교회에서는 ‘지옥에 가는 일은 결단코 없었다’고 봅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핵심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1.옥에 있는 영들이란 누구를 가리킬까요?
그동안 지옥에 갇힌 죽은 자들의 영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지옥에 내려가서 노아 홍수 때 멸망 당한 사람들의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어서 오늘날에는 이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경 어디에서도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오직 살아있는 자들에게만 전파됩니다. 사람이 한번 죽으면 복음을 듣고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죽은 뒤에는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히 9:27). 그러면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베드로전서 4장 6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본문은 지금 죽어 있는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즉 그들이 살아 있을 때,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음을 말합니다. 즉 지금은 죽은 자들이지만 살아 있었을 때에 복음을 들었던 자들”을 가리킵니다.
옥에 있는 영들이란 어떻게 보면 타락한 천사들이란 말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4, 5절에 의하면 타락한 천사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그러나 옥에 있는 영들을 천사라고 해석하면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3장 20절입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여기서 옥에 있는 영들이란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을 메시지를 듣고 복종하지 아니하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옥에 있는 영들을 천사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해석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되었다는 것은 노아를 통해 불순종하는 죄인들에게 선포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칼빈은 베드로전서 3장 19절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성령님을 통하여 구약 성도들에게 그 구속 사업의 완성을 선포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옥에 있는 영들은 성도(聖徒)들이 아니고 불순종하던 악도(惡徒)들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헤르만 바빙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시사 하늘에 올라가신 것은 옥에 있는 영들에게 하나의 선포사건입니다. 그
의 부활과 승천이야말로 옥중의 영들에게 대한 그의 부요, 능력, 개선의 선포이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여기서 ‘전파’는 복음을 전했다(유앙겔리조)는 의미가 아니라 선포했다는 단어(케루소)로 봅니다. 즉 전파는 복음전도(벧전 1: 12, 25; 4:6)가 아니라 부활 승천에 대한 선포입니다. 우리 성경도 과거에는 ‘전파’(개역한글판, 현대인의 성경)로 했다가 근래에는 선포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는 언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는가?
성육신 하시기 한참 전이었는가, 노아 시대였는가?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이었는가? 아니면 그분이 부활하신 이후였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으니”(3:18)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은 죽었지만 그 영은 계속 살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국면의 생명으로 부활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신 시점은 부활하신 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전체의 주제와 본장의 전후 맥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7-22절에서 베드로는 신앙 때문에 고난과 핍박을 견뎌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격려의 메세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승리하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 시대처럼 오래 참으시는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심판을 보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 시대에 방주를 제공하심으로 노아와 그의 가족을 홍수 심판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출애굽 사건과 마찬가지로 모든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것에 대한 상징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임을 강조하는 데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신자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구원의 엄청난 실상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써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속에서 오히려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과 고난 가운데 하나가 되어 영광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