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

기독교와 히브리 유산

liefd 2024. 2. 13.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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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뿌리와 가지(11:18)

1.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은 셈족으로서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이었다(11:10-32). 족장 아브라함은 성경에서 히브리인라고 불리운 첫 번째 사람이었다(14:13). 모든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히브리 민족의 조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도 그의 에언자를 통해 이렇게 선포하였다. 너희는 너희를 파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생각하여 보라(51:1-2).

신약 성서는 이방인 기독교들이 비록 혈통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3:7). 신약 성서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임을 강조하고 있다(8:31-41, 2:23).

 

2. 아덴인가, 예루살렘인가?

바울의 가르침-그뿐만 아니라 성서 전체-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그이 배경과 그가 편지를 썼던 당시의 상황을 이해해야만 한다.

바울은 그 당시에 많이 사용하던 헬라어 방언으로 썼다. 그러나 그의 내적인 정신셰계는 무엇보다 자신의 유대적 유산을 반영하고 있으며, 본래 예루살렘을 통해 흘러 나온 것들을 통해 형성되었다. 비록 바울이 헬라어 편지를 썼을지라도 그의 신학의 핵심은 근본적으로 히브리적인 것이었다.

 

바울의 서신뿐만 아니라 성서 전체의 제1차적인 문화적 배경은 히브리 민족의 셈족 세계이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사람들은 모두가 유대인이었으며, 히브리적 인생관과 세계관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근동 세계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그들의 히브리적 배경을 잘 이해해야 한다.

구약은 신약의 기반이다. 신약 성서의 메시지는, 헬라 전통에 반대되는 것으로서의 히브리 전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우리의 안내자는 모세와 예언자들이지 플라톤이나 학술원이 아니다.

 

3. 성서의 세계

히브리 민족이 다른 문화를 수용함에 있어서 여러 민족들과는 확연히 다른 한분야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히브리 민족의 종교로서 이방 종교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 보다는 신적인 계시에 근원을 두고 있다.

히브리인들은 모든 사상과 모든 삶의 관점들을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의 맥락 안에서 새롭게 해석했던 것이다.

성서는 놀라우면서도 신비한 방법으로, 인간의 언어(문화적인 제약을 받는)로 표현된 하나님의 음성(신적인 영감에 의한)이기에 성서의 세계에 나오는 여러 민족들과 종교적인 것들을 이해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이다.

 

4. 감람나무 뿌리와 가지

초대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기독교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곧 히브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의미했다.

바울은 이방인들은 단지 참 감람나무(이스라엘)에 접붙여진 돌 감람나무 일뿐이다고 비유하고 있다(11:17, 24, 11:16, 14:6, 52:8). 여기에서 바울은 이스라엘(나무)과 이방인(접붙여진 가지)사이의 연합에 대하여 구약 성서의 잘 알려진 원에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올리브 나무의 뿌리는 놀라만치 강해서 바위틈이나 뜨겁고 건조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매우 오래된 올리브 나무뿌리(11:18) 주위에는 연한 작은 올리브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와 같다고 시편 기자는 노래했다(128:3).

더 나아가 올리브 나무는 여러 세기 동안이나 열매를 맺는다.

 

5. 이스라엘에 접붙여짐

먼저 바울은 이방인을, 잘 가꾸어진 감람나무에 접붙여진 야생 감람나무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11:17, 24). 그러나 이방인들은 올리브나무 뿌리인 이스라엘로부터 모든 진액을 공급받기 때문에 자랑하거나 거만하거나 자부심을 가질 수가 없다(11:20).

 

2: 이방인과 유대인, 그리고 유대적인 유산

 

로운 영적 가족

바울은 아브라함의 영적 가족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기(4:11) 때문이다.

바울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다고 하는 진정한 표식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2;28-29).

모든 탈무드 학자들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결론을 맺고 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다양성

반율법주의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에서 일단 믿음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매젝 되면 더 이상 율법에 매이지 않으며 마음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는 주장을 논박하고 있다.

 

도덕법 준수주의

 

유대교의 도덕법은 지키되 모든 제의 법규들은 거부했다. 헬라파 유대인들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할례를 제외한 율법의 모든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러나 유대인의 율법을 가장 지지했던 이방인 개종자들은 소위 유대화된 사람들이었다. 바리새인에게 영향을 받은 이방인들은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하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15:5)

 

바울과 율법

예수가 율법 아래 나시고(4;4), 전생애를 통하여 율법의 권위를 인정하셨던 것처럼(15:8), 바울도 율법의 유효성을 지지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3:31). 그는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7:12). 그는 율법은 선한 것이며(딤전 1:8), 영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7:14).

 

그러나 바울은 다른 곳에서는 율법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부정적으로 보는 것 같다(고후 3:6, 3:25, 5:1). 그러나 그것은 율법을 자기 의의 근거로 사용하려는 사람들을 논박하려는 의도로 그렇게 한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다고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 아래 있는 자와 같이 되어 유대인과 같이 행동하는데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였다(고전 9:20). 바울은 할례(16:3), 나실인 서약(18:18), 정결예식(21;20-26) 같은 모세의 율법 규정들을 준수한 것이다.

 

초대교회와 유대교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유대적인 믿음과 관습들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그는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며(마 1: 16), 유대교 율법에 따라 남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다(2 :21). 소년 예수는 유월절을 지켰으며(2:41-43), 청년기에는 많은 유대교 선생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배웠으며, 그들 대부분이 예수의 이해력에 놀랐다(2:46-47). 예수는 안식일마다 자주 회당에 가곤했으며, 이러한 습관은 공생애를 시작했을 때에도 변하지 않았다(4:16). 더욱이 예수의 초기 제자들은 유대인들이었다. 또한 예수의 목회의 초점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데 있었다.

 

기독교 역사의 시작을 살펴보면, 교회는 유대인들로 시작되었다. 예수의 첫 추종자들을 나사렛 당(24:5)이라고 부르는 것만 보아도 교회가 유대교의 한 종파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교회는 열두 사도와 더불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오순절 사건을 통해서 극적인 탄생을 경험하게 되었다().

베드로는 유대인 청중들에게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3:25). 예루살렘 청중에게 회개하라고 요구했다(3:19).

 

유대교의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마이모니데스는 회개라는 히브리어 명사 teshubah는 여러 가지 특별한 단계를 포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첫째 단계는 죄의 고백 또는 인정이다.

 

둘째는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한 후회나 부끄러움과 슬픔을 표현하는 단계이다.

 

셋째 단계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강한 결단을 하는 것이고,

 

마지막 단계는 하나님과 화해를 하는 것으로서, 이로써 소원한 관계가 극복되고 친교가 회복되는 단계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들의 행동과 설교는 초대교회의 유대성에 대해 풍부한 증거들을 제시해 주고 있다. 사도 시몬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했으며(3:1), 유대교의 최고판결 기관인 산헤드린 앞에서 변호했다(4;4-15). 그는 부정한 것을 잡아 먹으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거절했다(10:13-14).

 

더 나아가 유대인 사도들은 매일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쳤으며(5:42), 가말리엘과 같은 히브리 율법의 교사들과 영향을 주고 받았다(5:34), 바울은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바울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앗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3:5)라고 기록하고 있다.

 

히브리주의자와 헬라주의자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둘로 나뉘어져 있었다. 한 그룹은 히브리주의자, 이들은 히브리어와 아람아 가운데서 둘 다 혹은 그 중 하나를 쓰는 유대인들이었는데, 대부분 팔레스타인 태생이었다. 그들은 유대교 신앙과 조상들의 관습에 철저했다. 이들은 비유대주의자들의 문화의 영향을 경계하면서 예루살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 다른 유대인들의 범주에 속한 사람들은 헬라주의자들이었다. 헬라 유대인들은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유대인이었지만 헬라어와 헬라인들의 관습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리스-로마 세게의 디아스포라에 그 뿌리를 두고 있거나 그들과 유대관계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히브리주의자들보다 더 자유로운 사고 방식을 갖고 있었으며, 변화에 보다 더 개방적인 사람들이었다.

 

스데반과 헬라주의자들

스데반은 예루살렘 교회의 헬라주의자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엇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매일 매일 과부들에게 공급되는 구제의 음식들이 헬라파 과부들에게 불공평하게 주어진다고 불평을 했다(6:1).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곱 사람의 집사가 세워졌으며, 문제가 잘 해결되었다. 이들 일곱 명 모두 헬라파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스데반이 예루살렘에서 메시야 논쟁을 벌임으로써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결국 산헤드린 공회에 불려가서 성전과 모세의 종교에 대한 모독성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제소되었다(6:12-13). 더 나아가 스데반은 그의 유대인 형제들을 의로운 예수를 거절햇다고 비난했다(7:52). 이로 인해 스데반은 체포되었고 돌에 맞아 죽게 되었다. 예루살렘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흩어진 사람들은 주로 예루살렘 교회의 헬라주의자들이였다.

 

이방인에게로 퍼져나감

처음으로 복음을 예루살렘 밖으로 나간 유대인은 빌립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헬라파 유대인 지도자 자운데 한 사람이었다(6:5). 빌립에 의한 선도적인 확장은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여러 지방에서 설교할 수 있는 길을 닦아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8:25).

 

예루살렘 회의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회의는 사도행전 전체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다. 이 회의는 유대 지방에서 내려온 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때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 교회에 대표로 보내서 사도들과 이 문제를 상의하도록 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그가 회의를 주재하였는데, 주후 49년경이었다. 이 회의의 결과는 교회에 들어오는 비유대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의 원리를 강조했다.

 

신학적 충돌과 박해

초대교회는 기본적으로 중요한 세 그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쪽 그룹은 전통적인 할례주의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보수적인 유대신앙을 가진 자들로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상당히 비슷했다. 성전예배 그리고 유대교 율법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예비온주의자가가 이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 남은 자 즉 4세기경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던 그룹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중요한 그룹은 자유롭게 생각하는 헬라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한 발은 유대교의 잔디에 두고 있으며, 또 다른 한 발은 헬라적인 토양에 두었는데 이 편에 더욱 굳게 서 있었으며, 서구세계로 기울어졌다.

 

세 번째 그룹의 사람들은 중도파 사람들로서 이들이 제일 많았다. 그들은 예루살렘 회의 결정을 따랐으며 예루살렘 교회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15:22). 지도자 가운데에는 야고보, 베드,, 바울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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