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아버지와 아들(눅 15:11-32), 김덕선 목사

liefd 2024. 2. 14.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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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을 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장남은 사업에 크게 성공했습니다넓은 집과 풍성한 식탁호화스런 옷….남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풍족했습니다둘째 아들은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했습니다먹고 살기가 빠듯해 항상 정신이 없었습니다더구나 자녀들이 많아서 더욱 생활이 어려웠습니다그런데도 할머니는 장남 집보다는 차남 집에 머물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하루는 장남이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동생은 먹고 살기도 힘들어요어머니가 그곳에 가시면 부담스러워해요제가 더 좋은 음식과 옷으로 잘 봉양할테니 저희 집에서 사세요할머니는 넉넉한 웃음을 짓더니 이렇게 말하더란다내게 필요한 것은 좋은 음식과 옷이 아니란다네 동생은 밤마다 내 등을 긁어준단다학교에서 돌아온 손자들은 그 날의 재미있는 일들을 들려주지

 

부모를 섬기는 것을 `봉양'이라 한다봉양보다 한 단계 높은 것이 `양지'(量知:헤아려 앎)장남이 어머니를 봉양했다면차남은 양지를 실천한 것입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이렇게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나된 것은 부모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나된 것은 많은 사람들의 은혜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5월 둘째 주일 제가 사랑하는 성도들 앞에서 어버이 주일 예배 설교를 해야 하는데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그런 도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것이 진정한 효도의 열쇠다.” 자녀들의 입장에서 볼 때 아버지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공경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가르쳐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저는 기도하는 가운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아버지의 심정을 깊이 헤아려보라는 강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주님의 심정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14:35)고 하셨습니다. 누가는 바로 이 단어와 연결시켜 이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려고 나아 왔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란 단순히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심정을 헤아리라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헬렌 켈러에게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만약 당신이 시각과 청각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하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질문에 헬렌 켈러는 주저하지 않고 의사소통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청각을 택하겠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탕자는 웬지 몰라도 집안에 있는 것이 싫었습니다. 더 이상 구애받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고 싶은 충동이 생겼습니다. 결국 아버지께 떼를 써서 자기 몫의 유산을 챙겨서 먼 곳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가출의 원조입니다. 가정불화와 경제난 등으로 인해 국내 20세 이상 성인들의 가출이 해마다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1일 경찰청이 내놓은 `전국 성인 가출자 현황'자료에 따르면 20세이상 성인의 가출은 982613명에서 9932727, 지난해 4657명으로 증가했고, 올 들어 10월까지는 3648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경찰청이 컴퓨터를 통해 자료분석을 실시한 올 7월부터 10월까지 성인 가출자는 15503명으로, 이중 내국인 15324, 외국인 138, 교포 41명 순이었습니다. 특히 이 기간중 주부 가출자는 3888명으로 매달 1천명 가까운 숫자가 집을 나 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이는 같은 기간 성인 여성 가출자 9417명의 41%, 전체 성인 가출자 15503 명의 25.1%에 달하는 수치입니다. 경찰 관계자는 "이 통계는 경찰에 신고된 가출자들의 현황을 분석한 것으로, 실제 성인 가출자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탕자가 그렇게 나쁜 아들일까요? 자기 나름대로 성공해 보려고 이전에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이루어 보려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그래도 카드 빚을 갚기 위해서 강도, 폭행을 일삼지 않았습니다. 남의 집에 들어가 돼지쥐엄 열매를 먹을 정도면 괜찮은 사람입니다. 자기 행동에 책임질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 큰 죄를 지었다고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생활방식이 싫었고, 자기 나름대로 꿈을 펼치고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론 재산을 허비하고 인생을 낭비하는 그런 잘못은 있었지만 그래도 기본이 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에는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온 동기가 무엇일까요? 어떤 의미에서 순수한 동기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배고품을 채우기 위해서 아버지께로 돌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17).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그 순간들이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 집에 있다는 그 자체에 대해 부담이 되고 매이지 않고 나름대로 생활해 보고 싶은 충동 때문에 그 동안 교회를 멀리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분들이 계십니까?

 

지나고 보면 그래도 아버지 집에 있을 때가 행복한 순간입니다. 그동안 작은 아들이 고생했겠습니까? 아니면 큰 아들이 고생했겠습니까? 아버지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작은 아들이 얼마나 고생했을까? 눈에 선했습니다.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열심을 내는게 때로는 힘들게 보이지만 놀고 먹는 것처럼 힘든 게 없었습니다. 일에 좇겨서 바쁘게 사는 것보다 아무런 목표도 없이 어영부영하는 것이 훨씬 더 힘이 듭니다. 큰 아들은 자기 동생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했는지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의 기준에서 볼 때 도저히 이해가 안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큰아들은 동생이 집으로 돌아온 것에 대해 반가워하는 마음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이제 모든 재산은 다 자기 것인데 그것으로 잔치를 배설하는 것 자체가 속이 상했습니다. 앞으로 자기 동생이 집 안에 골치덩어리가 되지 않겠나 머리를 굴리니 짜증이 났던 것입니다. 그러니 허랑방탕하고 돌아온 동생에서 잔치를 베풀어 준 그 자체에 대해 그는 분노를 터뜨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집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조차 생기지 않아 밖으로 나갔습니다. 아마 그 사이에 아버지는 큰 아들의 반응에 대해 내심 걱정이 되셨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서 그 아들을 달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입장에서 자신의 재산을 다 허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어준다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요? 내가 그동안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 그렇게 다 없애버리다니 너무 속상했을 것입니다. 또한 지금까지 열심히 일해온 큰 아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서운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부모의 입장에서 어떤 자녀에게 잘 해주고 싶을 때 고민이 되는 것처럼 그런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동네 사람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베풀만큼 그렇게 자랑스런 일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아버지는 다른 어떤 생각보다 그저 아들을 찾았다는 기쁨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나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라도 잡아서 내 친구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베풀어주신 적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해버린 저 못된 자식에게 그렇게 대우할 수 있습니까? 큰아들 역시 아버지가 그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그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작은 아들은 사용권이 아버지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산을 아버지의 동의없이 마음대로 처분하였고, 큰 아들은 당시의 규례에 따라 그 사용권을 여전히 아버지께 두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큰 아들을 달래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우리 집안에 있는 모든 재산은 다 너의 것이지 않느냐? 하지만 너의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잃었다가 얻은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보실 때 그 사람의 재산 상태나 신분, 명에나 능력을 보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잃어버린 존재로 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바라보시고 우리를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본문에 나타난 둘째 아들은 물론 큰아들 역시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모두 잃어버린 자로 간주하시고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과연 큰 아들이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했을까요? 아마 그는 자신이 전형적인 효자인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부모를 위해 수년 동안 열심히 노예처럼(29) 일해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를 해왔지만  아들의 심정과 같이 아버지를 위해서 노예와 같이 일했다고 부담을 느끼는 분들이 계십니까? 안식년을 통해서 주님의 의 몸된 교회를 섬길 수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귀한지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큰 아들이 밭에서 일했던 것은 (25) 사실 아버지를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일한 것입니다. 이제 노예와 같이 부담스럽게 일하시지 맗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놀라운 특권으로 알고 감사하고 보람으로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큰아들은 아들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아버지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왜 그다지도 기뻐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자녀가 부모님에게 효도할 때 대부분 있는 한도 내에서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무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은 언제나 무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은 합리적인 것으로 결코 따질 수가 없습니다.

 

부모의 지나친 사랑에 대해 코맨트하지 마십시오. 깊이 감사하고 격려하십시오. 물론 부모의 입장에서 올바른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탕자를 대우하는 방식을 보십시오, 어떤 송아지를 잡았습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어떤 옷을 입혔습니다. 막입는 작업복입니까? 최고로 좋은 옷을 준비했습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겼습니다. 게다가 이웃 사람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벌렸습니다. 게다가 풍악을 울리기 위해서 악단을 초청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두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둘째 아들은 그렇게 속을 태우더니! 큰아들은 자기한테는 너무 한다고 불평을 하고 있으니! 부모의 심정을 그렇게도 이해하지 못할까? 아버지는 마음 한 가운데 심란하고 허전한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심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은혜의 대변자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에 관심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안전과 건강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자신의 입장에만 관심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잃어버렸던 아들을 찾았다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최고의 효도는 부모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생애에 비록 치명적인 실수를 10번이나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언제나 그의 심장은 주의 율례를 통해서 교훈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복음의 귀한 사역자가 될 수 있었던 노하우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특징 가운데 하나 역시 아버지의 심정을 가졌다는데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그분은 언제나 확인하셨습니다. 요즈음 저는 이런 기도를 자주 드리곤 합니다.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주님 내 심정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 심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바꾸어 주세요. 가슴을 치면서 기도합니다. 나의 심장을 주님의 심장으로 심장이식 수술해주세요.

 

당신은 몇째 아들이 되고 싶으십니까? 유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무 것도 받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큰 아들입니까? 아니면 아버지의 유산을 자신을 위해 다 써버리고 아버지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입니까? 아니면 차라리 딸이 된 것을 감사하십니까? 이제 우리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서로를 대할 때 그 사랑의 잃어버린 부분을 찾아 주는 그런 관계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잃어버렸고, 어떤 사람은 기회를 잃어버렸고, 어떤 사람은 건강을 잃어버렸고, 어떤 사람은 사람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잃어버린 사람은 그때 그순간을 그리워 하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고 조차 하지 않습니다. 탕자처럼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도다 절규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제 마음 둘 곳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을 찾고 계십니다. 이제 아버지의 넓은 사랑의 품에 안기십시오. 이제 당신의 방황은 끝나야 합니다. 당신을 그토록 기다렸던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십시오.

 

아버지는 아들이 다른 곳에 가서 비록 성공을 해서 자기 마음대로 살기보다는 졸땅 망해서라도 집으로 돌아와서 올바른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이 돌아오기를 매일 학수고대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그날부터 아들이 어떻게 될 것을 미래 내다보면서 기다렸습니다. 아들에게 닥칠 최악의 상황까지 내다 보면서 그래도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매일 집 밖으로 나갔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들이 자기 아들처럼 보이는 순간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바로 그러한 은혜와 사랑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빌려 달라고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냥 줍니다. 아들이 저에게 아빠 1만원만 빌려 주세요. 그러면 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냥 주는 거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주는 거란단. 이것이 바로 은혜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 그렇게 대한 적이 없습니까? 마치 하나님께 잠시 도움을 요청했다가 갚아야 하는 부채의 관계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탕자처럼 감히 아들이라고 부를만큼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최고로 가치를 인정해 주시고 최상의 대접을 해주십니다.

 

나같이 이렇게 힘들게 사는 사람까지도 하나님은 사랑해 주시겠는가?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 당시에 사회에서 가장 비참하고 소외된 사람들인 세리와 창기들을 가까이 해주셨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찾고 계십니다. 아버지의 심정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고 잃어버린 자를 찾는 자가 되십시오.

 

우리 모두는 탕자와 같습니다. 돌아온 탕자입니다. 새로 교회에 찾아오신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으로 잔치를 베풀고 기뻐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형제들간에 서로 원망하고 불평한 적은 없었는지. 다른 형제에게 잘 해준 것 때문에 부모의 마음을 서운하게 하고 힘들게 하지는 않았는지. 이제 아버지의 심정으로 서로 대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나는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잔치 한번 베풀어 준 적이 없는데 저 사람은 그렇게 힘들게 했는데도 사랑과 인정을 받고 있으니. 그런 것 때문에 배가 아픈 적은 없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특권과 축복을 감사하는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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