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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을 소유한 사람, 라영환

liefd 2024. 2. 21.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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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들은 3명에게는 상황을 바꾸는 힘이 있다고 주장한다. 비전을 같이하는 사람 3명이 함께 모이면 세상을 바꿀 수가 있다는 것이다.

 

아둘람 굴에서 다윗을 따르던 400여명은 환난 당하고 소망이 없고 , 빚진 사람들이었지만 믿음의 역할로 새시대의 주역이 된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변화시켰는가? 그들이 자신이 누구인가를 자각할 때, 즉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때 가능한 일이었다.

 

팔복은 복을 받는 조건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자신의 오늘을 재해석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불행했던 과거를 다시 보고 미래를 소망의 눈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예수님께서도 흩어진 백성들, 반목과 불화를 일삼던 사람들, 자신의 처지를 비판하며 슬픔에 빠진 사람들, 목표를 상실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시고 하나로 모으신 것이다. 그 모으시는 방식이 “...한자는 복되다.”라는 선언이다.

 

팔복은 이러한 면에서 신자들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복이 있다는 것은 이미 소유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심령이 가난한 사림은 천국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했기 때문에 비록 심령이 가난하다고 할지라도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는 의미다.

 

팔복은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의 특징이다. 헬라어 성경에 두 번째부터 일곱번째까지는 미래시제로 되어 있다. 그런데 첫 번째와 마지막 여덟 번째는 현재시제로 되어 있다. 왜 마태는 첫 번째와 여덟 번째 복을 현재시제로 표현하고 동일한 복의 내용을 기록했을까요?(5:3, 10).

 

마태복음 53절부터 12절에 있는 내용이 서로 다른 여덟 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임을 가르쳐 준다. 3절과 10절에서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표현함으로써 팔복이 우리가 받아야 할 여덟가지 복이 아니라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의 삶의 특징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행복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천국백성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의 자녀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을 추구하고 살아간다. 팔복은 우리가 처한 다양한 환경 속에서도 천국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살아가야 할 것을 역설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복이라고 말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팔복이 가난과 박해로 시작해 동일한 형식으로 끝을 맺는다는 점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 의는 하나님의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의를 추구해야지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의인의 고난을 통해 이 세상이 축복을 받는다. 믿음은 단순한 지식적 동의가 아니다. 삶속에서 부딪히는 현실적인 고난의 문제이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불의로 인해 슬퍼하는 자이다.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심어야 한다.

 

우리는 이익을 따라 가는 사회 속에서 옭고 그름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익과 명분사이에서 명분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엘리야처럼 나혼자라고 절망하지 말라. 내가 움직여야 세상이 움직인다.

우리에게 용기있는 한 사람과 그것에 동조하는 두 번째 사람 그리고 희망을 품고 함께 하는 세 번째 사람만 있다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팔복은 하나님 나라 복음의 핵심이다.

팔복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팔복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핵심은 산상설교가 윤리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관한 메시지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누가복음 620절에서 22절은 여덟가지 복이 아니라 네 가지 복만이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신 그 자체가 고통이다. 필리핀에는 발룻(balut)이라는 음식이 있다. 이것은 부화 직전의 오리알을 삶아서 먹는 일종의 스테미너 음식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당하신 고통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의인의 고통을 통해 이 세상을 축복하신다.

팔복은 너희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너희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심령의 가난은 성육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수님이 스스로 낮아지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낮아지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와 위치를 포기하는 것이다.

 

애통은 하나님 앞에서 우는 것을 말한다. 

구약시대의 애통의 의미(61:1-3), 시온의 슬퍼하는 자란 이스라엘의 황폐함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자신을 위해 울지 말고 공동체를 위하여 울라. 애통하는 자는 개인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를 부조리하게 만들어간 시스템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이다.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상실 때문에 애통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 때문에 애통하는 것이다. 즉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우리는 것, 시대를 아파하는 것이 애통이다. 기도하면서 많이 우는데 대부분 나와 관련된 이유들 때문이다.

리더는 시대를 아파하는 사람들이다.

 

온유는 심령이 가난한 상태의 또 다른 표현이다.

온유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을 비우는 사람이다. 교회는 주인의식이 아니라 종의 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곳이다. 교회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곳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힘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섬기는 곳이다.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더하신다.

 

구약에서 "의"란 단어는 체다카(공평)와 미쉬파트(정의)가 있다. 전자는 관계적인 의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게를 맺는 것,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의로운 삶이라는 것이다. 후자는 주로 공정한 판결과 관련해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 만들어지는 올바른 사회질서를 의미한다. 공평함과 정의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외모에 근거해서 혹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대하는 것을 말한다.

 

구약에서체다카미쉬파트를 가장 잘 드러내는 제도가 희년이다. 세상은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통해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하면 나 때문에 저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이다. 하나님의 의는 사랑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는 공동체 안에서 사랑이 넘쳐나야 이루어진다.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의의 공동체로 살아간다면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희망을 보게 될 것이다.

의의 공동체를 볼 때 세상이 감동한다. 의인 한 사람은 수십만 명의 다른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사람을 얻는 자가 세상을 얻는다.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듣는 교회는 대개는 의사결정, 재정 투명성, 절차적 정당성 등에서 다른 교회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있다. 합리성, 투명성, 그리고 객관성은 일반 기업에서는 보편적인 원칙이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교회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것을 경험하게 하는 교회이다. 세상에서 환난당하고 빚진 사람들이 소망을 발견하고 위대한 사람으로 바뀌는 교회가 좋은 교회이다.

 

선악과를 따먹는다는 것은 인간이 선과 악을 판단한다는 의미가 있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주어진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영역이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의 위치에 올라가고자 했던 것이다. 사사기를 보면 그때에 사람마다 자기 보기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말씀이 있다. 이것이 죄이다.

 

우리에겐 판단할 권한이 없다. 자신이 옳다는 생각 때문에 상대방을 쉽게 정죄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한번더 기회를 주셨다. 이것이 은혜이다. 왕따문화는 일종의 정죄문화에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교회는 과거를 이야기하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오늘을 이야기한다.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았던 용서받고 두 번째 기회를 얻는 것이 교회이다.

 

사람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고 시대를 바꾼다. 예수님은 사람을 얻으셨다.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는 대신 기대를 품는 것을 통해서였다. 그 사람이 나에게 인긴 상처도 기억하지 않는 공동체가 교회 공동체이다. 이런 공동체가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있다. 회복이 회복을 낳고 꿈이 꿈을 낳는다.

우리는 서로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어야 한다. 두 번째 기회를 주려면 내가 손해를 봐야 한다.

의의 공동체는 나를 주장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교회는 다른 사람을 세우는 곳이다.

 

아프더라도 용서해야 한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긍휼은 무엇을 의미할까? 용서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힘이 아니라 용서가 세상을 이긴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23:34). 주님,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소서(7:60).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이다.

 

사랑하는 깊이만큼 미워하는 깊이도 깊은 법이다.

표현을 보지 말고 중심을 보라. 이해가 있어야 용서가 가능한 법이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고 신앙생활이 힘든 이유는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용서가 있어야 치유와 회복이 있다

 

구약성경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시편 73편에 기록된 아삽의 시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는 의미는 내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리라는 확신의 의미가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라, 뒤섞이지 않은 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시편 86:11절에 내 마음을 하나로 모으셔서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두 마음을 품은 것은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것이다(약 4:8).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이다(6:24)

마음이 청결한 자가 거룩한 곳에 오를 수가 있다(24:3-4)

 

키에르케고르는 성경읽기와 관련해서 왕의 칙령이란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왕이 신하들에게 조서를 내리는데, 신하들은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이 명령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말 왕이 이 명령을 내렸는지를 분석한다는 것이다. 말씀은 분석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종을 위해서 읽는 것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살롬을 경험하게 하는 사람이다.

샬롬이 있는 자가 깨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니라 자녀이다. 고아들은 버러졌다는 것에 대한 고통이 있다. 그래서 사랑을 베풀 여유가 없다. 단지 이해받고 사랑받기를 원하며 남들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기를 요구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차고 넘쳐서 흘러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샬롬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상대방의 고통을 짊어지는 것이 화평케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화평케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 같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들이다.

 

화평은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복잡하고 문제가 많은 이유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샬롬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근원이시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십자가를 기쁘게 져야 한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상대방의 고통을 내가 대신 감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헤를 체험한 사람만이 희생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손상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아파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의가 인정받지 못할 때는 힘들어 한다.

교회는 말씀을 듣고 행동하는 공동체이다.

사고방식과 습관을 바꾸기 위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그들의 정체성을 재확인시키신 것이었다. 그리고 감정적 결단과 반복적 훈련을 강조하셨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생기는 불편함을 감수하는 삶이다.

 

신앙은 우리를 현실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 그 현실을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하게 한다.

4:6-7절은 우리가 기도한 후에 상황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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