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하여 사는가?(고전 9:16-23), 김덕선 목사
사도 바울의 생애는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그의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7-8절에는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던 모든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위하여, 즉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생애를 온전히 드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아직도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말 당신의 삶의 목표가 복음을 위한 것입니까? 혹시 그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물론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우리같이 먹고 사는 것이 바쁜 사람은 주일날 교회 나오는 것만으로도 대단합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역시 당신과 같이 직업을 가진 자비량 선교사였습니다(9절). 그는 천막을 짓는 직업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였습니다. 자신의 직장과 가까운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이 필요한 곳에는 어디든지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단골이나 고정 거래처가 중요한데 돌아다니면서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분명한 삶의 원칙이 있었습니다. 본문 23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사도 바울은 무엇을 하던지 그것이 복음을 위한 일이라면 언제나 참예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권리까지도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12절).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주님의 명령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14절). 쉽게 말씀 드리면 복음을 전하는 자는 사례를 받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11절).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러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복음의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함입니다. 혹시 물질 때문에 복음을 전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본문 18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사도 바울은 오직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생애를 온전히 드리기를 원했습니다. 혹시 복음 전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혜택을 누리는 그런 사람으로 비쳐지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까지도 포기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복음으로 인하여 혜택을 누리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때로는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자신에게 유익하던까지도 포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이러한 자세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본문 16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렇게 복음을 전하지만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 주님의 지상 명령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 28:19)
사도 비울은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게 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가족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지 않으면 어떤 죄가 있는지 아십니까? 에스겔 3장 18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당신이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죄로부터 돌이키고 그 영혼을 구원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그 책임을 묻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했고 돌이키게 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불구하고 복음을 거절했다면 순전히 그 사람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 그 사람은 택한 백성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 피 값을 네게서 찾겠다는 것입니다. 나 하나 예수 믿고 천국 가면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나로 인하여 많은 영혼을 주께로 돌아오는 자가 되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내 부모,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 내 형제 그 영혼이 복음을 받지 못해서 지옥에 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로마서 9장 3절에서 사도 바울은 만약 내 동포가 구원만 얻는다면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27절에서 자신이 구원받지 못해 버림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자신이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구원을 얻은 축복보다 자기 동포가 복음을 받아 구원받는 것을 그토록 원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본문 19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복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반드시 사람을 얻어야 합니다. 돈을 잃어도 사람은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전에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좋아보여야 그 사람의 말도 믿으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최대의 관심사는 더욱 많은 사람을 얻는데 있었습니다. 어떻게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하여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사람을 얻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부분은 그 사람의 재능이나 능력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섬기려고 하는 종의 자세입니다. 사람은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해도 섬기려고 하는 사람을 존경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얻기 위해서 섬긴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본문 20-22절에서 “내가 여러 사람들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몇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아래 있는 자 같이, 율법없는 자에게는 울법없는 자같이,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원칙만을 고집하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람 저 사람 다 좋다는 식으로 사람을 사귄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자신의 믿음의 원칙을 가지고 살아갔습니다. 자신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되었습니다. 자신은 율법 없는 자가 아닌데 율법 없는 자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약한 자들에게는 자신도 약한 자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믿음의 원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사람의 입장과 형편과 사정을 헤아려 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믿음의 원칙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보다는 몇몇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과 말이 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 사람의 입장과 형편을 헤아려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고자세로 전해서는 안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눈높이에서 말하고 들어주고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행할 때 복음을 위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기를 원합니다. 전도대상자의 카드에 복음이 꼭 필요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여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만약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는 긴박감을 가지고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섬기는 종의 자세로 대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