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

성경과 5대 제국

liefd 2024. 3. 4.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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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집트

 

요셉이 총리 9년차에, 아버지와 가족이 애굽에 내려 옵니다.

야곱의 장례는 70일장이었습니다. 이는 거의 국장급입니다. 이때는 요셉이 14년의 총리를 마치고도 12년이나 지난 시기입니다.

요셉의 해골은 400여년이 지난후 출애굽 때에 파서 들고 나가 그들 조상의 무덤인 헤브론 막벨라 굴에 장사됩니다.이는 요셉의 유언 때문입니다(50:25, 13:19, 24:32).

 

유월절은 9번째 협상 결렬후 10번째 재앙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 사건이다. 이 유월절은 그 후 1400년이 지난 후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시고 성찬식으로롷 바뀝니다.

 

출애굽 후 약 500여년 만에 이집트의 왕과 솔로몬 사이에 국제정치의 꽃인 정략 결혼이 이루어진다(왕상 3:1).

당시 솔로몬은 1400대의 병거와 12000명의 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유다의 여호야김 왕은 바벨론의 압력으로 3년간 바벨론을 섬깁니다. 그러다가 애굽의 압력이 거세지자 이번에는 또 다시 바벨론을 배신하고 애굽으로 돌아선다. 그러자 여호야김 왕 4년째에 바벨론이 애굽을 치러 직접 나서게 된 것입니다. 이 전쟁을 역사는 갈기미스 전투라고 말합니다. 이때 바벨론은 애굽을 완전히 정복하고 이어서 유다로 진격해 온 것입니다.

므깃도 전투는 애굽과 남유다의 전쟁 중에 있었던 전부를 말하고, 갈그미스 전투는 바벨론이 애굽을 완전히 점령하게 된 전쟁을 말한다.

 

2. 앗수르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하면 앗수르가 520년간 상() 아시아의 지배자였던 것입니다.

앗수르의 존재 여부는 영국의 고고학자 레이어드의 1846년부터 약 7년에 걸친 니느웨에 대한 발굴로 모든 의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대영박불관의 전시물은 앗수르-바벨론-페르시아-헬라-로마 순으로 정리가 되어 있다.

 

요나서는 앗수르와 관련된 성경입니다(주전 8세기). 선민 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요나서의 기록에 의하면 니느웨는 3일 길을 걸을만큼 큰 도시였습니다(3:1-2). 그런데 요나는 하루 만에 대충 그것도 아마 살살 전한 것 같습니다(3:4).

 

150년 나훔 선지자에 의해 결국 앗수르의 멸망 선포를 듣게 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40년간 광야 생활과 5년간의 정복 전쟁을 거쳐 가나안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사사 시대를 약 300년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 왕정 500년이 시작된다. 처음 120년은 통일된 한 나라로 40년의 사울시대, 40년의 다윗시대, 40년의 솔로몬 시대를 보냅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어 약 200여년을 한 민족 두 국가로 보내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은 200년 만에 결국 앗수르에 의해 문을 닫고, 이후 남유다는 150년을 더 지내게 되지요. 그리고 남유다도 바벨론에 점령당하고 70년간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200년간의 이 시기, 즉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나뉜 시기를 성경은 열왕기상과 열왕기하 두 권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역대기상하 두권의 역사책은 다윗으로부터 시작해서 남유다의 역사만을 정리한 것이다.

 

북이스라엘은 200년간 나라를 유지하면서 7번의 쿠테타를 통해 19명의 왕이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16번째 왕인 므나헴이 왕위에 오르자(주전 752년부터 10년 재위), 국내의 혼란을 오히려 앗수르 욍에게 은 1000 달란트를 조공으로 바침으로 자신의 왕위를 튼튼하게 하는데 이용합니다. 백성들 가운데 큰 부자들에게 은 50달란트씫 제로 빼앗았다고 기록하고 있다(왕하 15:19-20). 이때 앗수르 왕은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주전 745년의 잔혹한 티글락-빌레셀 3세이다.

 

므나헴의 아들이었던 북이스라엘의 왕인 브기하야(주전 742년부터 2년간 재위)를 죽이고 쿠테타로 18번째 왕이 된 베가 때에는 앗수르는 더욱 노골적으로 북이스라엘을 점령해 가며 백성을 앗수르로 잡아가기 시작했다(왕하 15:29).

베가 왕은 발빠르게 아람과 동맹을 먼저 맺습니다. 그리고 남유다에게도 동맹을 맺자고 제안합니다. 그래서 세 나라가 앗수르를 대적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런데 남유다는 힘이 빠질 대로 빠진 북이스라엘과 아람과의 동맹보다는 오히려 친 앗수르 정책이 국가에 더 유익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립니다.

그러자 북 이스라엘과 아람이 앗수르와의 대적에 앞서 오히려 남유다를 공격해 온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당시 남 유다 왕 아하스가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하는 급박한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북이스라엘은 다시 쿠테타가 일어나 베가는 살해되고 호세아가 이스라엘의 19번째 마지막 왕이 된다(주전 732년부터 9년간 재위후, 주전 722년 북이스라엘 멸망).

이때 아하스는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앗수르 왕에게 예물을 보냅니다. 그러자 앗수르 왕이 그 청을 듣고 곧 올라와서 아람의 수도 다메섹을 점령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고 또 아람 왕 르신을 죽입니다(왕하 16:7-9).

 

유다의 아사 왕 31년에 오므리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12년 동안 왕위에 있으며 디르사에서 6년 동안 다스립니다. 그는 은 2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사고 그 산위에 성읍을 건축하고 그 성읍 이름을 그 산 주인이었던 세멜의 이름을 따라 사마리아로 일컬었습니다. 바로 이 오므리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합니다(왕상 16:23-26).

 

이와 같이 남유다의 오므리 왕과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다스리는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아합 왕의 악정이 계속되는데도 불구하고 엘리사가 엘리야의 뒤를 이어야만 했습니다.

 

이합 왕이 통치하던 때에 앗수르는 제국주의의 야망을 꿈꾸며 살만에셀 3세가 유브라데 강을 넘어 세력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북이스라엘은 다메셋과 하맛 3개국의 힘을 합하여 앗수르를 견제합니다.

 

북이스라엘과 다메셋과 하맛의 3개 연합국은 앗수르와 카르카르에서 큰 규모의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이 전투에서 3개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때 북이스라엘은 2000 대의 전차와 1만명의 군사를 보냈습니다.

 

오므리와 그의 아들 아합 왕 때에 북 이스라엘은 경제력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습니다. 아합의 부인 시돈의 공주 이세벨은 바알과 온 나라에 바알과 아세라 산당을 짓고 각을 세우고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어서 엘리야의 갑절의 영감을 요구했던 엘리사, 그렇게 요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시대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 이스라엘은 죄악의 길에서 도대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를 보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1:1). 당시 북 이스라엘의 부자들은 여름과 겨울을 별장에서 지낼 정도였고, 촤고의 바산의 소고기를 먹으며, 가난한 자들의 이불과도 같은 겉옷까지 빼앗았습니다. 온 나라는 우상으로 가득하고, 하나님과는 담을 쌓고 살아가면서 선지자들의 말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 호세아 선지자를 보냅니다(1:1). 주전 8세기에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에 아모스와 호세아 선지자를 보내시고, 남유다에는 이사야와 미가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호세아 왕은 앗수르의 살만에셀이 공격해오자 호세아가 그에게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칩니다. 그러다가 호세아는 애굽의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면서 해마다 하던 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보내지 않습니다. 이에 앗수르 왕은 호세아가 배반함을 보고 그를 옥에 감금하고 사마리아에 올라와 삼년 간 에워쌉니다(왕하 17:3-6).

 

호세아가 왕이 된 지 9년째에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완전히 멸망합니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잡아다가 앗수르 제국의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게 했습니다. 그곳에 다른 침략당한 사람들을 들어와 살게 합니다. 이것이 앗수르 제국의 식민정책입니다. 혼혈정책을 실시함으로 민족의 싹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혼혈족이 바로 사마리아인입니다(왕하 17:24).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의 공격에서 피하기 위해 친 앗수르 정책을 폈던 남유다의 아하스 왕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끊임없이 외교노선을 바꿀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사야가 아하스 왕에세 친 앗수르 정책을 내려 놓으라고 한 것은 첫째, 형제국 북 이스라엘이 멸망당하는데 어떤 빌미도 제공하지 말라는 것이며, 둘째, 결국 앗수르와 가까이 하면 앗수르의 종교적 영향을 받는 것이 문제될 것이며, 셋째, 앗수르는 반드시 침략적 속성을 드러내는 제국주의의 본질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렇게 앗수르는 하나님께서 잠시 사용하시는 몽둥이에 불과하다고 아하스 왕에게 아무리 알려 주어도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남유다는 이후 150년을 더 버티다가 앗수르가 아닌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앗수르 왕에게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다하는 굴욕적인 편지를 썼던 아하스 왕은 자기 마음대로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과 금을 앗수르 욍에게 놔물로 바쳤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성전에 있어야 할 것들을 앗수르 왕에게 바쳤습니다. 나아가 아하스 왕은 앗수르의 왕 디글랏 발레셀 3세를 만나러 갔다가 다메섹의 제단을 보고 우리아에게 그렇게 만들라고 요청합니다(왕하 16:10-16).

 

앗수르의 개선식에 참여했던 아하스 왕은 그곳에서 큰 감명을 받고 돌아와 예루살렘에 앗수르의 신을 수입하고 제단을 세우며, 앗수르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성전 앞에 있던 놋단을 앗수르 신정과 성전 사이에 옮겨다가 단 북편에 두고 앗수르 신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왕하 16:17-18).

 

히스기야는 25세에 남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의 초반기 국가정책은 자주국방과 반 앗수르, 친애굽 외교노선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같은 히스기야 정책을 비판합니다.

첫째 자주국방에 대한 노력보다는 오히려 가난한 자를 위한 배려같은 율법규정 준수에 국가 행정력을 집중할 것을 주문합니다.

둘째 친애굽 노선을 철회할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강대국 중심의 국가 경영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세계 경영을 믿고 따를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반앗수르-친애굽 노선을 붙들고 있는 히스기야 왕의 자세는 결국 앗수르에게 남유다 침공의 빌미를 제공합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된지 14년째인 39세에 앗수르 와 산헤립이 다시 남유다의 예루렘을 제외한 모든 성읍들을 빼앗아 갑니다(36:1-3). 랍사게의 무지만 말로 인해 앗수르 군대는 185천명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37:6-7).  

 

150년 전에 요나의 전도를 받고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았던 잇수르는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그후 바벨론에 의해 (1:8) 이미 점령되어 있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나훔의 에언대로 홍수로 물이 범람해 도시 위로 6미터나 토사가 쌓여 주전 609년부터 주후 1846년까지 2450년 이상 그 존재를 깊은 땅 속에 묻어두게 됩니다.

3. 바벨론

애굽은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의 자리에서 내려 오게 하고,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을 남유다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여호야김은 초기에는 애굽에 조공을 바차다가, 나중에는 바벨론에게 조공을 바칩니다. 3년만에 여호야김은 바벨론을 배신하고 다시 친애굽으로 돌아섭니다. 여호야김이 바벨론을 배신하자, 바벨론은 아람과 모압과 암몬 동맹군을 이끌고 남유다를 치러 올라옵니다.

 

바벨론은 이때 남유다보다 먼저 애굽을 공격해서 애굽을 바벨론의 속국으로 만듭니다. 이 전투가 바로 갈그미스 전투입니다.

주전 605년에 애굽을 점령한 바벨론은 남유다에 들려 당시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천재 청소년들을 인질로 끌려간 것이 1차 바벨론 포로입니다. 이때 끌려간 천재 소년들이 다니엘과 세 친구들입니다.

 

그후 여호야김이 죽고 주전598년 그 아들인 여호야긴이 18세의 나이로 왕이 되지만, 왕이 된 지 3개월만에 에스겔을 포함한 1만여명의 우수한 예루살렘의 인력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 여호야긴도 끌려 갑니다. 이것이 제 2차 바벨론 포로입니다.

 

바벨론은 여호야긴의 숙부인 시드기야를 남유다의 왕으로 세웁니다. 그가 바로 남유다의 마지막 왕입니다(대하 36:6-7, 10). 3차 포로는 예루살렘에 포도농사나 지을 최소한의 인력만 남기고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을 잡아간 것입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꿈을 통해 제국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됩니다.

 

1만여명의 남유다 포로들은 자신들이 끌려온 이유가 첫째는 하나님께서 힘이 없으셔서 자신들을 내어 주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조상들이 잘못을 했는데 처벌은 자신들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은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생각을 가진 이들을 에스겔은 설득해야 했습니다.

에스겔이 바벨론으로 끌려간지 12년째 되던 해에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33:21-22).

 

포로로 끌려간 곳에서 태어난 에스라는 그곳에서 율법을 공부하여 자신이 아론의 16대손임을 알아내고 남유다로 귀국해서는 유대의 3대 율법학자 중에 한명입니다(7:5-6).

 

바벨론제국의 경영 키워드는 교욱이었습니다.

 

3. 페르시아

테헤란은 이란의 수도이지요. 1977년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의 시장이 방문하면서 삼를로였던 길이 테헤란 로로 바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란의 엣날 이름이 페르시아입니다.

페르시아는 구약 성경 39권 중에 7권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다니엘, 학개, 스가랴,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말라기.

 

1차 귀활 때 남유다 사람들이 성전을 건축하려다가 방해하는 세력이 있자, 16년간이나 성전 건축을 중단했다. 그때 성전 건축을 다시 독려한 선지자가 바로 학개, 스가랴입니다.

그리고 1차포로귀환과 2차포로귀환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 바로 에스더의 부림절 사건입니다.

2차포로귀환의 지도자는 학사 에스라입니다. 그리고 3차 포로 귀환의 지도자는 총독 느헤미야입니다.

출애굽(바로, 파라오)과 출페르시아(고레스, 키루스 2) 두 사건에는 하나님께서 왕들의 마음을 강팍하게도 하시고 감동시키기도 하셨다는 뜻이다.

 

페르시아도 고레스 왕에 의해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주전 3000년부터 시작된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개의 도시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힘이 센 두 국가가 바로 메대와 바사였지요. 세계 역사책을 보면 메데와 바샤사 메르디와 페르시아라고 나와 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뉜 민족은 북이스라엘이 혼혈족 사마리아인으로, 바벨론으로 꿀려갔던 남유다의 사람들은 유대인으로 그 명칭이 바뀌게 된다. 그래서 유대인의 상술, 유대인의 탈무드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다리오 왕 말년에 캄비세스에 의해 정복당한 이집트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러자 다리오는 이집트에 대한 응징을 준비한다. 그러나 한찬 원정 준비 중이던 다리오는 주전 486, 36년간의 재위를 끝으로 죽고 맙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왕이 페르시야의 4번째 왕이 됩니다. 이때  성경은 페르시아의 왕비, 에스더 이야기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하만은 유대가 몰살시킨 아멜렉의 후손으로 유대에 대한 원한이 매우 컸습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1500km입니다. 걸어서 5개월이나 걸리는 거리입니다. 에스라는 그 먼거리를 걸어서 돌아온 유대 공동체와 함께 부흥 운동과 공동체 정화 작업을 시작합니다.

 

70년만에 제국의 문을 닫은 바벨론에 이어, 페르시아 제국도 (주전539-333) 206년만에 다리오 때 마게도니야의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제국의 깃발을 내리고, 헬라제국이 역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페르시아 제국 경영 키워드는 숫자였습니다.

 

4. 헬라제국

구약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이고, 신약의 첫 번째 책은 마태복음입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400년이라는 세월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헬라 제국도 성경 안에 숨어 있습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가 전쟁을 하는 동안 마케도니아는 페르시아의 속국이었습니다.

필립포스 2세가 마케도니아를 반석 위에 세우고 강력한 국가를 꿈꾸던 중에 그는 크레니데스라는 곳에서 금광을 발견하여 엄청난 재력까지 확보하게 된다. 그러지 그 도시의 이름을 따라 필립포스(빌립보)라고 바꿉니다. 그리고 카이로네이아 전추에서 필립포스 2세는 갑자기 압살당하여 죽게 되고 그의 아들 알렉산더가 23세의 젊은 나이에 나라를 물려받게 된다.

이 빌립보는 신약 시대에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 중에 유럽으로 복음이 넘어가면서 세워지는 유럽의 첫 교회가 됩니다. (16:6-10).

 

알렉산더의 스승은 아리스텔레스였다. 알렉산더는 두로를 반드시 점령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두로는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 소아시아, 이집트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이자 중심 무역항이었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는 바다 한 가운데 있는 두로를 공격하기 위해 200척의 배와 군인 1만명을 도원해 산에서부터 큰 바위를 굴려오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위들을 바다에 깔아 길을 내어서 결국, 그 길로 사륜 마차들을 끌고 두로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것은 이미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했던 것이다.

 

이후 두로는 로마에게 예속되어 로마의 많은 유물들이 지금도 발견되어 진다고 한다. 알렉산더는 정복전쟁 중에도 항상 독서를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책을 좋아한 그는 이집트에 자기 이름을 딴 도서관을 세웠다고 한다. 알렉산더는 오리엔트 문화와 그리스 문화를 합하여 헬레니즘을 만듭니다.

 

알렉산더가 주전 32632세의 나이로 요절하게 되자 4명의 장수가 분할통치를 하게 된다. 카산드로스 장군은 그리스와 마게도니아 본토를, 리시마쿠스 장군은 소아시아를, 안타고누스 장군은지중해에서 중앙아시아 지역까지를, 프톨레미 장군이 이집트 지역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프톨레미 왕조와 셀루커스 왕조의 예루살렘 쟁탈전이 시작된다.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의 통치에 이어 헬라제국의 프롤레미 통치를 받게 된다.

 

프톨레미 2세는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는 놀라운 작업이 이루어진다. 이 번역본이 칠십인 역이다.

주전198년 셀루커스 왕조의 안트오쿠스 3세가 프톨레미 왕조로부터 유대 땅을 빼앗아 시리아에 합병시켰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유대인들을 최대한 배려했지만 과대한 조공 부괴로 인해 백성의 반대가 일어나고 안티쿠스 3세는 암살당한다. 그 뒤를 이은 셀루커스 4세 역시 암살당한다. 그후 안티오쿠스 4(에피나네스)는 헬라문화와 관습을 강요하였다.

 

안트오크스 4세는 이집트 원정을 통해 거의 제압하는 듯했지만 이미 다른 나라가 이집트에 대한 지배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바로 로마이다. 그가 돌아오는 길에 예루살렘에 들렀는데 유대가 그의 헬라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돼제를 잡아서 제우스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유대인들의 눈에는 우상숭배의 행위가 성전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에 대해 저항세력이 생겼다. 이 저항세력이 하시몬 왕조를 세웠고 그들이 하시딤입니다. 하시딤의 후예가 바리새파와 에세네파입니다.

 

마타디아스 하스몬은 우상에게 절하라고 유대를 압박한 안트오쿠스 4세의 명령에 도전한 연로한 제사장이었다. 그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이어 마카비 혁명을 주도하였는데 처음에는 마타디아스의 셋째 아들 유다 마카비가, 이어서는 막내아들 요나단이, 그리고 마지막에는 둘째 아들 시몬이 이 일을 맡았습니다.

 

마카비와 그 형제들은 혁명을 주도하면서 개혁파 인물들을 구금하고, 셀루커스 왕조의 인물들을 감금했으며, 그 후 성전을 정화하여 주전 16412월에 마침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다시 거행하게 됩니다.

 

그러자 주전 162년 셀루커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5세는 유대의 대제사장 메넬리우스를 처형하고, 하몬스 가문은 오히려 주전 161년 로마와 동맹을 맺어 독립국가의 지배 가문으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이로써 하스몬 가문은 지도자였던 요나단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는데 이로써 하스몬 가문은 그 직책을 115년 동안이나 고수하게 됩니다.

 

하스몬 왕조의 마지막 왕은 살로매 알렉산드라의 두 아들, 힐카누스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주전67-63)가 서로 다투면서 권력 싸움을 하다가 주전 63년 유대는 결국 폼페이우스를 통해 로마의 통치로 넘어가게 된다.

 

셀루커스 왕조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유대인들을 헬라 문화로 개종시키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금지하고 율빕을 지키는 자들을 극심하게 핍박했을 때, 끝까지 정절을 지킨 사람들을 하시딤이라고 부릅니다. 이 하시딤에서 바리새파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이 몇몇 부유한 가문, 지도적 제사장 가문으로 이루어진 반면, 바리새파는 도시 상인의 후손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의 후손들 가운데 헬라 사상의 일부를 벋어둘여 종교권력을 유지했던 자들의 후손으로서 최고 권력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사독의 후손들이라 하여 사두개파로 불렀고, 그들은 성전관리 일체를 맡고 있었다. 그들은 종교 귀족으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한쪽으로 율법을 지키는 척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항상 현실 권력과 타협하기도 했습니다.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와는 달리, 전통을 거절하고 기록된 율법만을 받아들였다. 사두개파는 구두상의 가르침을 통해 율법서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바리새파의 견해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사두개파는 또한 부활이나, 죽음 후의 심판, 천사와 악마의 존재를 부인했다. 바리새파가 모세오경과 함께 묵시문학을 권위있는 문제서 받아들인데 반해, 사두개파는 오직 모세오경만을 권위를 받아들이려 했기 때문에 부활에 대해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12:18). 사두개파에게는 죽음 이후보다 현재가 더욱 중요했다.

 

에세네파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자극을 받아 생겨난 종파로서 새로운 종파라고 할 수 있다. 율법에 대해서는 바리새파와 비슷하게 엄격한 입장이었으나 현실도피적이고 은둔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들은 농업같은 종류의 일에 종사하고, 성경 해석을 포함하여, 도덕적, 종교적 문제점들을 공동으로 연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항해했다. 모든 재산을 공유하고 노예를 두지 않았으며, 정결예식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알렉산더의 페르시아에 대한 응징으로 페르시아 제국의 멸망과 헬라제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때까지의 제국들은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모두 동방에서 탄생한 제국들이었다. 그러나 헬라 제국은 최초로 유럽에서 시작하여 동방으로 펼쳐진 제국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제국은 분열되고 결국 헬라제국도 문을 닫게 된다.

 

헬라제국의 경영 키워드는 융합이었다.

 

5. 로마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로마 전체의 연관성 속에 있다.

마태의 직엄인 세리나, 요한이 유배되었던 밧모섬의 채석장도 모두 로마와 깊은 관련이 있다.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에 호적하러 간 것도 로마 황제의 명령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형도 로마의 사형법이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지명 중에 가이사랴하는 도시가 있다. 이 도시는 카이사르의 도시라는 뜻으로 헤롯이 유대땅에 세운 신도시이다. 로마총독과 군단이 이 도시에 머물렀다(10:1-2)

 

로마는 주전 8세기 로물루스, 레무스 쌍둥이와 낙대의 신화에서 생겨났다. 그 후 로마는 왕정과 공화정을 거치고 카르타고와의 3차에 걸친 120년간의 포에니 전쟁을 치르면서 무서운 나라로 급성장했다. 특히 주전 100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새로운 로마 청사진을 그린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줄리어스 시저, 가이사라고 불립니다. 가이사는 황제라는 의미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황제의 길을 열었고, 그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는 실제로 로마 제국의 초대황제가 되었다.

 

주전 63년 유대를 로마의 예속국으로 넘긴 인물이 바로 헤롯의 아버지 안티파터이다. 그는 유대를 로마에 넘기고 로마로 가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정복한 지금의 서유럽인 살리아 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하여 크게 활동을 한다. 그후 안티파터의 아들 헤롯대왕이 주전37년부터 4년까지 유대를 다스린다. 이후 여러 헤롯이 등장하게 됨으로 헤롯 대왕이라 부른다.

헤롯대왕은 하스몬 왕조의 당파를 계속해서 지지하고, 하스몬가의 딸인 미리암네와 결혼함으로 유대 가문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주전 40년경 헤롯 대왕과 경쟁상대에 있었던 조카가 파르티아의 도움으로 쿠테타를 일으켜 예루살렘을 장악하자, 헤롯은 잠시 피신한다. 그러나 헤롯은 곧 로마의 도움으로 3만명의 보병과 6천기의 전차로 구성된 로마군을 앞세우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더 강력한 통치자로 자리잡는다.

 

이후 헤롯 대왕은 가이사랴라는 이름의 신도시들을 많이 건설하고 예루살렘 성정 건축이라는 큰 규모의 건축을 함으로 로마와 유대의 환심을 동시에 산다.

아기 예수님이 피신했던 애굼에서 돌아오실 때의 헤롯은 헤롯 아켈라오이다(2:20). 그는 헤롯 대왕이 죽은 후 유대 예루실렘과 사마리아 에돔 지역을 분할받은 헤롯 아켈라오이다. 그는 매우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정치를 했다. 이체 참다 못한 유대와 사마리아 귀족들이 로마황제에게 대표단을 파견해서 그를 숙청해 달라고 요청함. 결국 주후 6년에 아켈라오는 왕위에서 좇겨났고, 그때부터 유다지역은 로마 총독에 의해 통치를 받는 지역이 되었다.

 

또한 예수님께서 저 여우라고 불렀던 헤롯은 헤롯 빌립의 형으로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그는 자신의 동생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합니다. 이에 세례요한은 헤롯에게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14:3-4). 헤롯 안타파스는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당시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의 분봉왕이었다.

 

헤롯 아그리파 1세는 헤롯 대왕의 손자이며, 헤로디아와는 친남매간으로 , 헤롯 안타파스의 조카이기도 하다. 이 아그리파 1세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헤롯으로, 사도 야고보를 처형한 사람이다. 베드로를 옥에 가두기도 했고, 초대 교회의 여러 지도자들을 괴롭혔다(12:21-23)

 

헤롯 아그리파 1세가 죽자, 그의 아들 헤롯 아그리파 2세가 17살의 어린 아니로 왕위에 오르는데 , 그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이때부터 유대는 거의 로마총독의 관할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아그리파 2세는 가이사랴에 억류되어 있던 사도 바울로부터 베스도 총독과 함께 증언을 듣다가 네가 적은 말로 권하여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헤롯 가문은 하스몬 왕조 말기와 로마 제국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통해 이두매, 즉 에돔족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의 통치자 가문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예수님 탄생시 가우스 아구스도가 천하로 다 호적하라고 명령한다(2:1-7). 가이사 아구스도는 존엄하신 황제라는 뜻이다. 이 아구스도라는 말은 로마의 초대황제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로원이 바친 존칭이다. 옥타비아누스의 통치기관은 주전29년부터 주후 14년까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과 탄생, 그리고 어린 시절이 이에 해당한다.

 

옥타비아누스 황제에 이은 로마의 두 번째 황제의 이름은 티베리우스, 성경에는 디베료 황제로 기록되어 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 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3:1)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된지 15년째에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부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디베료 황제가 무서운 황제가 되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디베료의 로마 이름인 티베리우스는 로마의 초대황제인 옥타비아누스의 의붓 아들이었다는데 열쇠가 있다. 옥타비아누스는 어떻게든 자기 핏줄로 후계 구도를 삼으려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자기의 모든 핏줄이 죽자, 마침내 디베료에게 다음 번 황제를 물려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옥타비아 누스는 후계를 물려주는 대신 디베료가 아내와 이혼하고, 자신의 딸 율리아와 다시 결혼하라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아내와 이혼하고 로마의 두 번째 황제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율리아는 간통죄에 걸려 아버지 옥타비아누스가 유배형을 내리게 된다. 그후 디베료는 다시 결혼하지 않았다. 첫부인을 평생 잊지 못했던 디베료의 이러한 배경이 테러블 티베리우스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원로원들의 얼굴을 맞대지 않고 보고서만 받고 답신을 해주는 독특한 정체 형태를 펼친 것이다. 그때에 디베료의 명령으로 유대로 파견된 총독이 바로 본디오 빌라도이다.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를 다스리기가 매우 힘들었다. 헤롯이라는 분봉왕과 예루살렘 성전을 장악하고 잇는 대제사장들, 그리고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서기관들로 대표되는 유대의 고위급들, 특히 가난한 민란이라도 발생했다가는 보고사가 바로 황제가 은둔하고 있는 키프리 섬으로 것이라는 강박감 등이 빌라도를 압박하였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열두 군단이라도 부를 수 있다. 당신에 로마의 한 군단은 약 6000명의 병사. 그러니까 예수님은 당장 72000명의 천사를 부르실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바벨론으로 끌려 가서 이방인들사이에 흩어져 살게 된 유대인들, 그들은 페르시아 시대에 많이 귀환했지만, 헬라와 로마 시대까지 귀환하지 않고 계속 그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로마시대까지도 유대로 귀환하지 않은 흩어진 유대인들은 각각 살던 나라에서 회당을 짓고 주로 장사에 종사하며 살았다.

 

그들이 명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1년분의 십일조를 바치고, 1달간씩 머무르는 것은 예루살렘 경제를 매우 활성화시켰다(2:5). 그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전세계로부터 예루살렘에 막대한 기부금과 성전세를 바쳤다. 그리고 토지 수입의 일일조 즉 예루살렘에서 소비해야 하는 법에 따라 명절에 약 한달 정도씩 머물면서 제 2의 십일조를 예루살렘에소 소비했다.

 

또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함께 등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알렉산더가 마케도냐에서 출정하여 정복전쟁에 나설 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집트에 함께 들어갔다고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귀족의 가정교사로 들어간 경우가 많이 있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은 장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런데 이 두 집단은 시장에서 마찰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유리한 쪽은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은 다신교를 믿었기 때문에 30만개의 신을 가진 로마와 상당히 통했다. 그러나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과 졸교와 장사에서 자줘 충돌을 일으켰다.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두고 후자를 들어준 로마의 최고의 통치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로마의 4대 황제, 글라우디오(글라우디우스)에 의해 추방된 사람이 브리스 길라, 아굴라였(18:1-3).

바울은 가말리엘의 수제자였다. 가말리엘은 유대의 3대 율법학자 중에 한 사람이다. 유대의 3대 율법학자는 에스라, 힐렐, 가말리엘이었다. 가말리엘은 산헤드린 공회의 회장이었다(5:34-40).

 

로마제국내의 노예는 약 20%에 가까웠다고 한다. 오네시모는 자신의 제자인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 나온 종이다.

로마 제국의 다섯 번째 황제는 네로이다. 네로는 그의 어머니 덕분에 철학자 세네카에게서 철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로마제국의 빅해는 주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 무섭게 계속되었다.

 

주후 8세기에 시작한 로마는 왕정과 공화정, 그리고 제정을 거치면서 제국으로 발전했다. 로마는 주후 4세기에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었다. 동로마는 주후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테메트 2세의 침략으로 멸망하게 된다. 서로마는 주후 467년 제국의 문을 닫았다.

 

로마제국의 경영 키워드는 관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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