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비판하지 말라(마 7:1-6), 김덕선 목사

liefd 2024. 3. 5.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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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비판하지 말라는 대목에서 한 가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는 순간에 사랑을 잃기 쉬운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반면에 우리가 비판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불의 앞에 침묵하는 우를 범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비판하지 않을 수도 없고 비판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을 때 대상이 누구일까요? 3, 4, 5절에 보면 형제 관계, 즉 기독교 공동체, 즉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은 비판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본문은 법정에서 재판하기 위하여 판단하지 말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또한 이것은 잘못된 것을 눈감아 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와 오류에 대한 판단을 삼가고, 선과 악 사이를 분별하는 일을 거부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진실함을 사랑하시고, 위선을 미워하십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우리의 비판적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6절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이것은 우리의 올바른 분별력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법정을 페하는 것도 아니요 비판을 금하는 것도 아니라면 오늘 본문에 비판하지 말라는 의미는 무슨 일씀일까요? 여기서 비판은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혹하게 판단하는 것, 검열관 같은 비판을 말합니다. 즉 사람들의 실수를 적극적으로 찾아내어 흠잡는 것을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누군가를 비판한다는 것은 마치 내가 하나님인 것처럼 나 자신을 그의 감독자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11-12절입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준행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만약 우리가 검열관 같이 가혹하게 비판한다면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잘못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을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이 진리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3-5절입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첵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읋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로다.”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가 맹목적이 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비판적인 능력을 중지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겸열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관대하라는 요청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가 재판관의 위치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거나 그 사람의 동기를 속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눈에 있는 들보에 대해 왜 말씀하셨을까요? 본문 3절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예수님은 우리가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모른 체하고 남의 작은 결점들을 지적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꼬집고 계십니다. 우리는 타인의 잘못을 확대시키고 자신의 잘못을 축소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 변명거리를 늘어놓고 자기의 행위를 방어하고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하고 남이 티를 보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죄를 많은 지은 사람이 남의 죄가 보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많은 죄를 지었는데 용서받지 못한 상태에 있을 때 다른 사람의 티가 자기에게는 들보로 보입니다. 사실 그 들보는 자기 자신의 들보입니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지 못하며, 자기 정당화라는 안개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중 그 누구도 다른 사람들을 비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비판력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자기 정당화로 인해 몹시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9절입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2. 그리스도인은 위선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마태복음 73-4절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내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어떤 사람이 자기의 시야를 다 가리는 널빤지를 눈앞에 두고 형제의 눈에 이주 작은 티를 제거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은 작은 과오는 쓸데없이 참견하면서, 더 심각한 자기 잘못들은 제대로 처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은 과장하고, 우리 자신의 잘못은 사소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 안에서 우리의 잘못들을 보고 심판합니다.

 

마태복음 75절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빼리라.” 예수님은 먼저 우리 자신이 회개하고 변화받기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에 대한 필요를 깨닫고 실제로 변화를 향해 나아가기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다거나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3. 형제의 심정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비판 자체를 정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바로 잡는 것 자체를 정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우리 자신을 바로잡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바로 잡는 것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잘못된 것을 권면할 때 무시하거나 멸시하는 태도로 해서는 안됩니다. 더구나 원수나 적과 같이 함부로 대해서도 안됩니다. 마치 의술을 제공하는 의사와 같이 그가 회복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637-38절입니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요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차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우리는 다른 사람을 권면할 때에도 용서의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용서의 마음을 일으키는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불공평하고 부당하게 상처 입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4절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함으로써, 주님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을 용서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할 때에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겸손과 회개와 감사의 태도를 지닌 존재로 변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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