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과 은혜, 폴 투르니에
제 1장 열등감과 죄책감
보통 강자는 약자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자신의 죄책감에서 벗어난다.
오랫동안 지속되는 죄책감은 다른 사람의 행위나 단언, 비판, 경멸, 심지어 아주 부당한 비난으로 인해 계속해서 약자의 마음에 새겨지게 된다.
비난뿐만 아니라 충고도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릴 수 있다. 많은 열성적인 부모들은 훌륭한 충고로 아이들을 무력하게 만든다.
죄책감은 우리가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비난, 사회적인 멸시, 열등감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 2장 사회적 암시
결국 나는 아내의 마음속에 거짓된 죄책감을 심고 키워 온 셈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죄책감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5:25은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달란트를 이용하는 대신 땅에 감추어 둔 종에 대해 말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병에 걸린 것을 가장 많이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가장 적게 자신을 돌본다.
모든 훌륭한 권면은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넌 이걸 해야 하고 또 저걸 해야 해, 참아야 해, 버텨야 해, 받아들여야 해, 희망을 가져야 해, 싸워야 해. 그러면 환자는 인내심과 희망이 없고 적절하게 대응하고 수용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복음서를 읽을 때 예수님의 말씀뿐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람에게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 3장 시간의 문제
시간을 관리하는 문제는 죄책감이 겹칠 때 심해진다. 자신의 약함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병에 가장 잘 대응한다.
치욕과 죄책감으로 점철된 고통스러운 길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괴로움은 결국 고귀한 은혜의 길로 통한다.
하나님은 문제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보다는 도전과 반역에까지 나아갈지라도 그 문제에 직면하는 사람을 사랑하신다.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부르짖는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큰 책임을 지셨지만 별로 서두르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다.
제 4장 돈의 문제
돈은 수많은 죄책감의 근원이며 게다가 모순되는 죄책감의 그 근원이기도 하다. 아내가 생활비에 대해 말할 때 남편은 예민해지고 무뚝뚝해진다. 님편은 그런 불평을 비난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당하게 누릴 만한 특권이라 하더라도 모든 특권에는 죄책감이 따르기 마련이다.
돈을 너무 많이 버는 사람이나 너무 쉽게 버는 사람도 죄책감을 느낀다. 이들은 교회나 사회복지 기관에 기부금을 내거나 장학금이나 상금을 지원함으로써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영적인 삶과 사역은 죄책감의 짐을 줄이기보다는 오히려 그 무게를 더하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경험하게 되며, 그것으로 인해 더욱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다.
제 5장 우리의 내면세계
우리는 하나님을 마주 대할 때 우리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반대로 모순된 죄책감을 야기시킨다.
제 6장 참된 죄책감과 거짓된 죄책감
많은 프로이트 추종자들은 이제 자신들의 거장인 프로이트 이론에 모순되는 오디에가 제기한 기능과 가치의 구분을 받아들인다. 기능적 죄책감이란 사회적 암시에서 기인한 것으로서 금기에 대한 두려움, 혹은 타인의 사랑을 잃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가치 죄책감은 확실한 기분을 저버린 것에 대한 진정한 자각이다. 그것은 자신에 대해 스스로 내리는 판단이다.
아들러에 의하면 죄책감은 열등감을 받아들이지 않는 데서 온다. 융은 죄첵감이 자신에 대한 불쾌ㅔ한 부분을 의식의 영역으로 통합하는 것과 자신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데서부터 온다고 본다.
융이 말하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의 개념은 이미 성경에 나와 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울부짖는다. “너로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합 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