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술은 새 부대에(막 2:18-22), 김덕선 목사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특별한 날이 있습니다. 달력을 보면 어떤 날짜에 표시를 해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청년은 입대일이나 생일, 어떤 사람은 회사에 첫 출근하는 날, 하지만 가장 행복하고 특별한 사람은 ‘내 결혼하는내 ’결혼 하는 날‘이라고 써 놓을 것입니다.
결혼하는 그 날부터 신분이 변하게 됩니다. 자신이 처한 생활 환경이 변하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설계가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이런 날보다 더 중요한 날이 있습니다. 그날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 날이고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 함을 받은 날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 천년 동안 유대교를 믿어 왔습니다. 이것이 그들을 지탱해온 정신적 힘이었습니다. 유대교는 그들에게 너무나 무겁고 오래된 옷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거기서 벗어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가 왔기 때문에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이야말로 과거의 모든 습관과 전통 가운데 잘못된 것을 부수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바리새인들이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를 보았을 때 금식일을 별로 지키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별로 경건하지 못하다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18절).
원래 금식은 사람의 먹는 욕망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금식하면 머리가 개운해지고 맑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의 금식은 특별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지극히 약하고 힘이 없는 존재라는 뜻으로 금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자세를 귀하게 여겨 주십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여러 날을 금식일로 지켰습니다. 문제는 그들은 금식일을 잘 지키는 것으로 사람들의 신앙심을 평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금식일을 경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이런 날에도 음식을 먹었고 금식에 대해서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어떤 사람이 와서 당신이나 당신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으니 엉터리 신앙인이다라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고 기도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금식을 가지고 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는 것은 위선적이고 잘못된 것입니다. 금식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것이지 사람들 앞에 떠벌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인류는 죄라는 깊은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욕망을 억제하고 죄를 덜 짓게 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죄를 치료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믿음과 인생을 주셨습니다., 이때는 당연히 음식을 먹어야 하고 기운을 차려야 하고 기뻐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는다는 비난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분문 19절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순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예수님은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우리의 신랑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이전에는 저주의 자식이었는데 이제는 축복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미신과 사회적 제약과 신분의 차별에서 벗어나서 천사보다 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기뻐해야 할 일이고 힘을 내고 새 출발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가장 위대한 날은 예수님을 만난 닐이고 죄 용서받은 날이며 하나님의 축복의 자녀가 된 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온다고 했습니다.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라고 하십니다(20절). 신랑을 빼앗길 날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이 다시 재림하셔서 영원히 신랑되신 주님과 왕 노릇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오셔서 우리가 가져온 지위외 신분의 변화를 비유를 통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새 술과 새포도주 비유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이 비유를 잘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옷이 떨어진다고 해서 기워 입지 않기 때문입니다. 옷이 조금이라도 떨어지기만 해도 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거의 모든 옷이 헤어질 때까지 입었고 떨어지면 새로운 천 조각을 붙여 입었습니다. 바지가 많이 낡아 얼금얼금한데 튼튼하게 기우려고 새 천 조각을 덧대어 바느질을 하면 어느새 바지 전체가 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것은 완전히 새로운 천 조각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입고 있던 옷은 낡은 옷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 천 조각을 낡은 옷을 당기면 더 큰 구멍이 만들어지고 결국 낡은 옷을 버리게 됩니다.
초대교회에는 누구든지 새신자들이 세례를 받으면 반드시 새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옛 습관이나 생활 방식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과거의 나 자신과의 결별이요 졸업입니다.
하나님은 “나”라고 하는 새 천 조각을 어디에 쓰시려고 이렇게 만드셨을까요? 첫 번째 이 작은 천 조각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 놓을 수 있습니다. 비록 화려한 옷은 아니지만 우리의 작은 천 조각에 하나님의 존귀와 축복과 능력을 싸놓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 천 조각을 이어 붙이면 새로운 하나님의 교회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모든 기도가 응답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며 사람들이 변하여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이 작은 천 조각으로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눈이 아픈 사람을 위하여 안대가 될 수 있습니다. 이름이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을 위하여 이름표가 될 수 있습니다. 고급 바이얼린이 있다면 그 바이얼린을 닦는 수건이 될 수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울고 있다면 눈물을 닦는 수건이 될 수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넘어졌다면 작은 반창고가 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포도주를 새로 담그면 가죽으로 된 부대에 넣어 포도주를 삭혔습니다. 이 가죽 부대는 양을 잡아 내장을 다 꺼내고 다리를 묶어서 만든 자루입니다. 포도주에는 가스가 발생하기 때문에 새 포도주는 반드시 새 가죽부대에 넣어야만 했습니다. 새포도주를 담그면서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가시가 부대를 터트려서 결국 포도주는 다 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은 오래된 관습이나 전통으로 묶여 놓으면 결국 이 사람도 망치고 그 단체도 망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새포도주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은 새로운 힘을 공급받고 있었습니다. 물론 성령의 강 같은 역사는 오순절에 본격적으로 터졌습니다. 이들 속에는 무엇인가 가두어 둘 수 없는 능력이 생기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은 속에서 무엇인가 부글부글 꿇어오르는 것 같습니다. 이런 청소년들에게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눌러두는 것은 결코 오래 가지 않습니다. 이이 속에서 수많은 의심이 넘쳐 나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욕망이 터져 나오는데 무조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잡아 놓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 주고 아름다운 것을 그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