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신자의 두 가지 특징(고후 5:14-15), 김덕선 목사
신자나 불신자나 별로 차이가 없는 것처럼 살아가기 때문에 교회는 가면 좋지만 경우에 따라서 꼭 가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제가 오늘 목회자 칼럼에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언급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철들자 노망이라구요.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때로는 실수하고 넘어지기는 하지만 돌이키는데 빨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잘 되게 하기 위해서 작은 일에도 깨닫게 하시려고 징계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서도 넘치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신자는 뭔가 분명히 다르지 않을까요? 그게 뭘까요?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과연 우리는 예수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까? 교회만 다니는 것뿐이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지 않습니까? 뭐가 어떻게 된 것일까요? 믿는데 아직도 육신에 속한 생각이 강해서 자꾸 거기에 굴복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사람은 신자입니까, 아니면 불신자입니까?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서 3장 3절에 보면 교히 안에 세 부류의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육에 속한 사람('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교회는 다니지만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빛과 진리를 받지 못하여 구원 얻지 못한 자연인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두 번째 부류는 고린도전서 3장 4절에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구원은 받았으나 아직도 신앙의 지식과 체험에서 성숙하지 못하고 육신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신자를 말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여기에 속한 상태에서 만족합니다.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세 번째 부류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세 번째 부류는 신령한 자, 신앙이 성숙한 자, 성령이 충만한 신자를 가리킵니다.
이 세 부류 가운데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정말로 거듭난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 재미가 없습니다. 물론 옛날 생활 방식이 있어서 유혹을 받고 끌리기는 하지만 예전 같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오늘 본문 15절입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여 함이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걸까요? 믿음은 단순히 지적으로 동의하거나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갈 2:20).
진짜 신자의 첫 번째 특징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갑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입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고 자연스러운 게 아닙니까? 왜 성경은 신자가 자신을 위해 살아가면 안된다고 말씀할까요? 자신을 위하여 살아간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신자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하여 살아가지 않습니다.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고 싶은 마음 자체가 없습니다. 잘 믿는 척 하지만 자신을 위하여 살아가지 않습니까?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없으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는 자신의 명예와 자기 이름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삽시다.다시는 상처 받았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부둥켜안고 자기 연민에 빠져서 살지 않고,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주님을 위해 살지 않으시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이전에 그렇게 좋아했던 것들이 이제는 싫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물론 어떤 것은 아직도 끌리기는 하지만 예전 같지 않는 게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이전에 사람들 앞에서 나서서 웃기고 인기를 얻는 게 너무 재미있었는데 그게 싫어지더라구요. 이전에는 영화를 그렇게 좋아했는데 지금은 안좋아하는 것이 아니지만 이전 같지가 않습니다. 찬송가 436장 2절입니다. ”주 안에 감추인 새 생명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니 찬송과 기도로 주 함께 살리라.“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피조물이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세상에서 육신의 몸을 입고 살아가기 때문에 욕심에 사로잡히기 쉽고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롬 6:12, 13). 그러나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각, 새로운 목적, 새로운 관계, 새로운 가지를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진짜 신자는 이전과는 다른 사고 방식과 생활 방식을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더 이상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싶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이익이 이나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3절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 이라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빌립보 성도들 가운데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한 부류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괴로움을 더하게 하기 위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다른 한 부류는 사도 바울을 위하여 착한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파합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는 삶의 특징입니다(빌 1:18).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시는 것을 실천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사랑은 한계가 있습니다. 남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도 부부의 사랑도,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도 한계가 있습니다. 어떤 한계에 부딪히면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에도 제한을 받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진짜 신자의 두 번째 특징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강권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혀서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면서 숱한 아픔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감당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불가항력적으로 자신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우리가 아직 연약해서 경건하지 않은 상태에 있을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바로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 5:6-8).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5, 16절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 안에 거히십니까? 당신도 하나님 안에 거하십니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알고 믿는 순간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로마서 5장 5절에 보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사람들을 움직이는 동기를 보면 그 사람이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은 돈이 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달려갑니다. 어떤 사람은 정욕이 그 사람을 음직이는 동기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이나 명예가 그 사람을 움직이는 동기가 됩니다. 당신을 움직이는 동기는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복음 전파에 진력할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부모의 사랑을 느끼는 자녀들은 위기를 꿋꿋하게 견딜 수 있습니다. 사단이 우리를 잘못된 길로 가도록 유혹을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혀 있는 사람은 바른 길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지금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혀서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는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하며 주님의 일을 할 때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만약 당신이 원망과 분노에 사로잡혀 주님의 일을 하게 되면 미움과 짜증이 당신이 강권할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욱더 깊이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왜 날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도저히 사랑맏을 자격이 없는데 왜 날 사랑하는지 그저 감격의 눈물을 흘릴 뿐입니다. 1절에 보면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네 왜 날 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3절에 보면 ”내 대신 고통을 당하셨네 왜 날 사랑하나 죄 용서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 했나 왜 날 사랑하나.“
우리가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에 만족해서는 안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하여 섬기는 일에 힘써야 이유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얼마나 신실하게 사용했는지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주어진 기회를 얼마나 잘 사용했는지 물으실 것입니다. 얼마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님과 몸된 교회와 이웃을 잘 섬겼는지 직고할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한 일을 위하여 구원받았습니다. 마지막 심판에 대한 건전한 두려움은 모든 신자가 복음 안에서 주님을 섬기는 참된 동기입니다”(폴 바네트, 고린도후서 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