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은 잘 한 걸까요?(히 11:23-26), 김덕선 목사
어떤 사람이 점점 시력이 악화되어 눈이 멀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담당의사가 그에게 수술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이어서 그의 시력은 정상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수술 중 뇌의 신경을 다쳐서 그의 기억력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수술을 한 결과 이번에는 기억력은 되살아나고 시력은 나빠졌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당황해서 환자에게 질문을 합니다. "어느 것을 택하겠습니까? 시력이요, 아니면 기억력입니까?"
한참을 생각한 다음에 환자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시력을 되 찾겠습니다. 지나간 일을 기억하는 것 보다는 앞으로 될 일을 눈으로 보는 것이 낫겠지요." 참으로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와같이 선택을 잘하면 좋은 결과가 있지만 잘못 선택하면 불행한 결과가 오게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날마다의 생활과 그 순간 속에서 선택의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가정의 주부는 음식을 만들 때마다 재료를 선택합니다. 음식에 넣을 재료들이 잘못 선택되어진다면 음식의 맛은 버려질 것입니다. 간혹 이걸 선택하든, 저걸 선택하든 ,아무렇게 선택을 하든 별 문제가 없을 경우도 있습니다만,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심각한 문제들에 직면하게 되면 선택을 잘하고 못하고에 따라서 그 결과가 크게 차이가 나게 됩니다.
신자의 선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세상에 대한 선택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선택, 믿음의 선택이 있습니다. 당신은 시간사용, 물질 사용, 재능 사용에 있어서 당신은 어떻게 선택하십니까? 세상에 대한 선택을 하십니까? 하나님에 대한 선택을 하십니까?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직장을 선택하는데 있어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모세는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요?
1.세상인가, 하나님인가?
모세의 성장 배경과 영적 분위기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집트의 바로 왕은 히브리인들의 인구가 급증하자 위기를 느낀 나머지 아들을 낳으면 나일강에 버리라는 포고문을 내립니다.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낳았는데 나일강에 버리지 않고 3개월 동안 숨겨두었습니다. 모세를 살려둔 이유가 무엇일까요? 출애굽기 2장 2절에 보면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라고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7장 20절에 보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자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외모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특별한 아이를 주셨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아이를 살려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3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환경이나 상황을 바꾸면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김은 이것이니 곧 너희의 믿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로 왕의 공주가 갈대상자에 누워있는 모세를 건져다가 양모로 키우게 됩니다. “모세는 초기대상관계에서 생모 요게벳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반면에 이름은 양모가 지어주었고 사랑과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모세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이집트인인가, 아니면 히브리인인가?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아니면 애굽의 신들을 섬길 것인가?”(이관직, 성경인물과 심리분석)
모세는 애굽의 궁정에서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모세가 나이가 40세가 되던 어느 날 자기 동족을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났습니다. 자기 동족 중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이 사건에서 모세는 애굽인에 맞서 이스라엘인의 편을 들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자기동족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애굽에서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깨닫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그 다음날 자기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서 화해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인의 위협적인 태도를 보는 순간 자신의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미디안으로 도주하게 됩니다(행 7:27~29). 히브리서 저자는 모세의 이러한 선택이 세상적인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선택이라고 표현합니다. 만약 당신이 모세의. 입장에 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의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을까요? 아니면 애굽을 떠났을까요?
본문 24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모세는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포기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좋은 자리를 포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과 다니엘처럼 높은 신분에서 하나님의 일을 잘 해내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신분이나 지위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모세는 선택을 잘 한 걸까요? 혹시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선택하기까지는 신중해야 하지만 선택한 후에는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야 합니다. 모세는 애굽의 궁정에서 높은 자리와 지위를 거절하였습니다. 내가 모세의 처지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F.B. 마이어는 이집트 상류사회에서 모세가 차지했던 위상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가 마차를 타고 거리로 나가면 왕자의 행차 앞에 ‘무릎을 꿇으라’는 호령이 퍼져나갔을 것이고, 나일강으로 가면 황금으로 꾸면진 의전용 배에 향락적인 풍악아 울려나왔을 것입니다. 무엇이든 그가 원하기만 하면 이집트의 재화와 보물을 거의 무제한으로 손에 넣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성공의 방식입니다. 세상에 대한 믿음을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였습니다(행 7:22). 나이가 40이 되면 나름대로 전문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에 새롭게 뭔가를 한다는 것이 고민이 됩니다. 반면에 40이 되어갈 때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으면 바꾼다는 것이 더욱 어려워지게 됩니다. 나이 40이 되면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비중을 두면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은 '예'와 '아니오'가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라고 대답하기는 비교적 쉽지만, 세상와 육신과 마귀에게 아니오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롯은 하나님께 예라고 대답했지만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서는 아니로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거절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세는 그 높은 자리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물론 그렇게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습니다. 모세에게는 강대국 애굽보다는 자기 동족에 대한 상처와 아픔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소명을 위해 필요한 능력을 주셨지만 모세의 반응은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끝까지 거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예라고 반응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4장 10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직접 말씀하시는데도 자신은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 잘 하는 모세의 형 아론을 붙여주십니다. 과정이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모세는 하나님을 선택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2.만족인가, 고난인가?
본문 25절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모세가 애굽의 궁정에서 자리를 유지했더라면 많은 부분에서 만족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신분이 높은 사람의 위치에 있으면 쾌락의 유혹이 찾아옵니다. 모세는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이러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 애굽의 노예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속하는 것이 장차 훨씬 좋은 것이라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왕국에서 일시적인 안락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일을 더 가치있게 여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고난받으려고 했을 때 모세에게 찾아온 현실적인 불편함이 있습니다. 애굽 왕 바로의 왕자에서 이스라엘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과 함께 고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당하는 것은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잠시동안 누릴 수 있는 죄악의 낙을 놓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죄악에 빠지는 이유는 쾌락과 재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유효기간은 잠시입니다. 세상의 낙은 누릴 때는 좋은 것 같지만 이내 후회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 때문에 때로는 고난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얻는 유익은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롬 8:18). J.C 라일은 고난의 유익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난은 우리의 타락한 의지를 정화하는데 꼭 필요한 약이요, 우리의 찌끼를 반드시 태워버리는 용광로요, 우리를 세상에 묶에 놓은 끈을 반드시 잘라버리는 칼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갈림길에서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의 선택은 더 좋은 것, 영원한 것을 근거로 결단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시고, 영생을 선물로 주신 사건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어느 날 버스가 빠르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좁은 커브 길에서 아이가 뛰어나왔습니다. 갑자기 닥친 일이어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찰나처럼 짧은 순간에 운전기사는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버스가 아이를 비켜 가면 커브 아래로 굴러 전복될 것이고 그렇다고 아이를 살리자고 버스가 뒤집혀 더 많은 사상자를 낼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운전기사는 순간 선택을 했습니다.......버스는 아이를 쳤고 아이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승객들은 놀라서 밖으로 나와 운전사를 가리키며 "저 살인마!" 하고 흥분해서 당장이라도 몰매를 칠 것 같았습니다. 운전기사는 아이를 안고 아무 말없이 울기만 하였습니다. 그때 버스 안에서 한 청년이 내리며 흥분한 승객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잠깐 제 말을 좀 들어보세요. 저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줄 아십니까? 바로 저 운전기사입니다.
3. 재물인가, 수치인가?
본문 26절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애굽의 모든 보화를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치를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훌륭한 업적을 남기는 것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는 것이 더욱 귀한 것입니다. 사람이 누구에게 쓰임 받는가에 따라서 당신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
그런데 모세가 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라고 했을까요? 마태복음 5장 11-12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다움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신자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으로 인해 마음이 상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모세의 이러한 선택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잘못된 선택인 것 같습니다. 비보가 아니라면어떻게 이러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바보와 같은 결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내가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의 신분을 포기하면 어떻게 될까? 모세가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자신이 가진 꿈을 접는 것도 쉽지 않지만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당장 불편하고 힘든 일을 겪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모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선택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의 선택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성도가 해야 하는 선택입니다.
당신은 애굽의 즐거움과 보화를 그래도 누리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당하며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참예하시겠습니까? 모세는 세상이 주는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모세는 어떻게 이러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상”은 세상에서 얻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상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계시며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견고하게 붙드는 믿음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천국, 하나님과 더불어 사귀는 영원한 생명, 지극히 큰 상급되신 하나님 자신을 진정한 재물로 여기며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모세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당하는 것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모세는 세상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는 것보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실 상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모세의 이러한 선택은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을 깊이 신뢰하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상이 모세가 자기 백성과 고난당하는 길을 택한 동기였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앞에 있는 상을 위하여 현재의 고난을 잘 참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사도행전 5장 41절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어떤 분의 글이 생각납니다.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을 내려놓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선택을 하는 것이 믿음의 결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