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끼리 사랑끼리, 송길원
1. 사람을 일으키는 한마디 말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심리학자, 아동학자, 교육학자들에 의한 엄청난 양의 도서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온갖 지혜들을 모아 요약하면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너무 많이 노엽게 하고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한 토막 있다.
아들 : 난 바보인가 봐.
아버지 : 넌 바보가 아니야.
아들 : 난 진짜로 바보예요.
아버지 : 넌 바보가 아니야. 생각나지 않니? 네가 캠핑 갔을 때 선생님이 너더러 가장 영리한 아이라고 하셨잖니
아들 : 선생님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어떻게 아세요?
아버지 : 선생님이 내게 그렇게 말해 주셨어!
아들 : 그랬어요? 그런데, 왜 선생님은 나만 보면 바보 녀석이라고 그래요?
아버지 : 아마 농담으로 그러셨겠지!
아들 : 내가 바보라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학교에서 나오는 성적을 좀 보세요.
아버지 : 조금 더 열심히 하기만 하면 돼!
아들 : 열심히 해봤지만 틀렸어요. 전 머리가 나쁜가 봐요.
아버지 : 아냐, 넌 영리해. 내가 아는 걸.
아들 : 전 바보예요. 제가 잘 아는걸요.
아버지 : (큰소리로) 넌 바보가 아니야!
아들 : 전 바보란 말예요.
아버지 : (더 큰소리로) 넌 바보가 아니라니까. 이 바보 같은 자식아!
말 한마디는 그 영향력이 매우 크다.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2. 나 전달법
나 전달법의 위력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의 일로 빌레몬에게 용서를 간청할 때 쓰는 태도에서 놀라운 언어 기법을 배우게 된다.
우선 바울의 말투가 재미있다. 바울은 자신의 표현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었다(8절). 그러나 그는 명령하기보다는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한다”(9절). 왜 그랬을까?
14절에 그 이유가 드러난다.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더 이상의 어떤 강요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빌레몬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드러냈다.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할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21절).
더군다나 바울은 오네시모를 지칭할 때 ‘돈을 훔쳐 도망친’이라고 말하지 않고 도리어 ‘잠시 너를 떠나게 된 것은’이라고 표현한다.
‘나 전달’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첫째는 수용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한 비난이나 비평 없는 서술이다.
둘째는 그 행동이 나에게 미치는 구체적인 영향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상대방의 행동이나 또는 구체적인 영향에 대한 나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비난 없는 서술이다.
나 전달법은 힘을 사용하지 않고 상대방을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또한 상대방으로 하여금 남을 도와주었다는 성취감까지 갖게 한다.
논쟁이 줄고 저항할 기회가 적어진다. 또한 진실을 담아 전달할 수 있는 그릇이라는 점이다.
3. 피하지 말고 직면하라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할 것을 간청하면서 먼저 빌레몬을 칭찬하는 말부터 시작한다.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 (몬1:4-7).
그런 다음 비로소 바울은 자신의 요구 사항을 전달한다. 그것도 철저하게 나 전달이다.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9절),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20절). 거기에는 명령이 없다. 간섭도 없다. 오히려 청원이 있다. “네게 간구하노라”(10절). 이런 그의 말투에는 여전히 빌레몬을 향한 격려가 있다.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21절).
성경은 우리가 끊임없이 상대방을 격려할 것을 요청한다. 격려는 대단히 중요하다. 격려란 문자적으로 ‘분발시키다(stir up)’ ‘자극하다(provoke)’ ‘일정한 방향으로 사람들을 충동시키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4. 좋은 만남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자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이들이 성장 과정에서 꼭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우리를 이끄시기 때문이다(호 11:4).
생각해 보라. 빌레몬의 집에서 물건을 훔쳐 도망친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는 한 사람의 노예로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를 짊어지고 십자가형에 처해졌을지 모른다. 골로새를 떠나 세계의 수도였던 로마에 발을 내디딘 그에게는 유혹의 손길이 많았다.
그는 화려한 로마의 주점과 현란한 문화의 밀림 속에서 여인과 도박과 유흥이 주지 못한 그 무엇을 얻었다. ‘참 생명’과 ‘자유’였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바울을 만남으로써였다. 그가 150만 명이나 되는 인파 속에서 어떤 연유로 바울을
만나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만남으로 인하여 그의 생애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그는 용서를 체험하고 나중에 에베소 교회의 주교 자리에 오른다. 이를 ‘만남의 신비’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5. 칭찬과 격려의 차이
격려는 다른 사람과 어떻게 비교되는가에 관심이 없다. 자신이 가치로운 존재인 것만 깨닫게 해 준다. 이것이 격려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을 이렇게 격려한다.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몬 1 : 4 - 7)
바울은 빌레몬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가 아니라 “너는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21절).
6. 책망할 때는 지혜가 필요하다.
책망에는 영혼의 아픔이 있어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해야 할 때 먼저 자신의 마음부터 아파했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2:4).
그러므로 눈물이 없는 책망은 형벌이 될 수 있다. 책망은 이처럼 아픈 마음이 동행할 때 그 효과가 있다.
나아가 책망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잠언은 이렇게 말한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27:5-6).
7. 천냥 빚도 갚는 말
참된 대화는 자신의 우월에 대한 신앙이나 신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권위의 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에 대한 지나친 과대 평가는 자신을 거만하게 할뿐더러 자신의 의사만을 표현하는데 급급하여, 상대를 무시하거나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일에 무관심하게 한다.
자기를 드러내는 데 열중할 따름인 사람에게 우리는 혐오감을 갖는다.
상대방을 제압하고 싶은 욕망, 상대방의 허점을 지적하거나 꼬집어 냄으로 자신은 적어도 그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표현하고 따라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한계를 느끼도록 함으로써 자신의 뛰어난 견해가 드러났을 때만이
의사 소통이 성공적이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독백이지 대화는 아니다. 자기 표현에만 관심을 갖고 상대를 지배하는 일에 우월한 가치를 두려는 유혹은
큰 잘못이다. 그것은 곧 비인간성의 표현일 뿐이다.
대화는 의심할 나위 없이 상호적 작업이다. 그러므로 ‘동시에’ ‘함께’ ‘더불어’ ‘균형 있게’ 진행되어야 한다.
상대방을 인정하는 행위는 곧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다. 나와 같지 않은 그 무엇이 있을 수 있고, 내가 가지지 못한 놀라운 자질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와 같은 달란트를 함께 나누어 가지고 싶다는 바람이다.
적어도 대화다운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서로 동등권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이방인과 혼합된 민족이었던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로부터 부정하다고 여겨졌고 따돌림을 받았다.
더군다나 본문에 나타난 여인은 그렇게 높은 신분의 여자가 아니었다. 귀한 신분의 여자는 물을 길러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인은 으레 유대인인 예수님이 자신을 무시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엉망진창인 자신의 불결한 사생활로 인해 동리의 우물을 이용하지 못하고 거리가 상당히 떨어진 이곳까지
남의 눈을 피해 가며 물을 길러 온 자신, 그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져 주거나 도움을 요청받을 만한 가치 있는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던 자신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시는 주님의 요구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부족한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으신, 온 세상을 다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속된 여인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고자
요청하셨다. 이로써 주님은 자신에게 없는 그 무엇을 여인이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시며, 그녀를 자신과 동등한 입장에 올려 놓으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오히려 자신을 낮추어 그녀가 자신의 부족한 면을 채워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존중해
주신 것이다.
자기 존경이 상실되고 자아관이 유실되었던 - 무시와 멸시와 조롱으로 인한 자기 파괴가 극심하던 - 그녀에게 예수님의 가치 인정은 자기 발견과 함께 얼마나 큰 동기 유발이 되었겠는가 하는 점은 쉽게 짐작이 가는 일이다.
이와 같이 동등권 인정, 즉 있는 그대로의 수용과 용납, 가치 부여 등은 의사 소통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된다.
사마리아인들은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속하는 요셉의 자손임을 증거하고 있었다. 윤락녀에게도 조상과 전통의 자랑이 있었다.
그러기에 여인은 “당신은 야곱보다 크니이까?”라면서 주님을 조상과 비교한다. 물길을 그릇도 없이 생수를 주겠다 하는 일을 의아하게 여기는 여인은 이 일에서 만큼은 일종의 우월성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쭐대며 비교하려 드는 여인을 이해하신 주님은 그 여인의 질문을 무시하거나 묵살해 버리지도 않고 나무라지도 않았다.
또한 여인이 우물가에 나왔을 때는 정오경이었다. 이 시간은 보통 더위 때문에 집에 있을 시간이었다.
이 여인은 무슨 이유로 대낮을 택하여 우물에 나와야만 했을까? 그녀에게는 물길러 오는 이 일이 하나의 고통스런
일이었겠다고 유추해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여기 물길러 오지 않게 해달라”(요 4:15)고 간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이 여인은 대낮을 택함으로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게 되고, 비웃는 눈초리, 수군거림, 비양거림과 조소를 당하는 일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주님은 이 사실뿐만 아니라 어미 그녀가 안고 있는 죄까지도 알고 계셨다. 또한 그것이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절실하고
절박한 근본 문제라는 것도 파악하고 계셨다. 주님은 생전 처음 만난 여인더러 네 남편을 불러오라 하시지 않는가?
주님은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진정으로 그녀의 필요가 무엇인지도 관찰하고 이해하고 계셨다.
따라서 그녀의 결핍된 요소와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채워 주시고 만족시키심으로 이해의 폭을 넓히셨다.
상호간에 접촉점이 한층 더 두터워지게 되었다.
확실히 의사 소통에 있어 ‘이해’라는 요소는 대화를 촉진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