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 받을 용기,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아들러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일세. 자네가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네.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자네에게는 그런 용기가 부족한 것뿐이야. 말하자면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한 거지.
행복해지려면 ‘미움 받을 용기’도 있어야 하네. 그런 용기가 생겼을 때, 자네의 인간관계는 한 순간에 달라질 것세.
인생이 하나의 선으로 쭉 이어진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착각을 저자는 비판한다.
그래서 프로이드식 원인론에 빠져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생은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이어지는 선이 아니라 점과 같은 찰나가 쭉 이어질 뿐이라는 주장이다.
인간은 변할 수 있다. 세계는 단순하다. 누구나 행복해 질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지. 객관적인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네.
아들러 심리학은 고루한 학문이 아니라 인간이해의 진리이자 도달점이다.
트라우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의 원인에 주목해서 상황을 설명하려 든다면, 모든 이야기는 저절로 결정론에 도달하게 되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과거의 원인이 아니라 현재의 목적을 본다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나의 불행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환이 아니라 고쳐나가는 것이다.
그리이스어의 선을 뜻하는 ‘아가톤’이란 도덕적 의미 외에도 득이 된다는 의미가 있다.
생활방식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한다면 다시 선택하는 것도 가능할 테지.
자네가 변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라네.
나의 인생은 지금 여기에서 결정된다.
자네인 채로 그저 생활양식을 고르기만 하면 되는 걸세.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아무리 어려워 보이는 관계일지라도 마주하는 것을 회피하고 뒤로 미뤄서는 안돼.
왜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가? 단점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네가 나 자신을 좋아하지 말자고 결심했기 때문이야.
열등감은 주관적인 감정이다. 아들러는 열등감을 독일어로 가치가 더 적은 느낌이라는 뜻이다.
열등콤플렉스는 자신의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한 상태를 말한다.
아들러의 무늬만 인과법칙이란 원래는 어떤 인과관계도 없는 것을 마치 중대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설명하고 납득한다.
자랑하는 사람은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자랑은 열등감의 발로다.
열등감 자체를 첨예화시켜 특이한 우월감에 빠지는 패턴이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불행자랑이다. 연약함이 권력이다.
갓난아기는 지배하지만 지배받지 않는다(아들러).
건전한 열등감이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라네.
우리가 걷는 것은 누군가와 경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나보다 앞서 나가는 것이야말로 가치가 있다네.
내 얼굴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나뿐이다.
인간관계의 중심에 경쟁이 있으면 인간은 영영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런 경우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진심으로 축복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관계를 경쟁으로 바라보고 타인의 행복을
나의 패배로 여기기 때문에 축복하지 못하는 걸세. 하지만 일단 경재의 도식에서 해방되면 누군가에게 이길 필요가 없네. 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도 해방되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복할 수 있게 되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공헌할 수 있게 되네.
나는 옳다는 확신이 이 사람은 틀렸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는 ‘그러니까 나는 이겨야 한다며 승패를 다투게 된다.
아들러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과 심리, 양 측면에서 아주 분명한 목표를 제시했지. 먼저 행동의 목표로는 자립할 것과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이라는 두 가지를, 이러한 행동을 뒷받침하는 심리적 목표로는 ‘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갖는 것과 그로부터 ‘사람들은 내 친구다’는 의식을 갖는 것을 제시했네.
아들러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인간관계를 일의 과제, 교우의 과제, 사랑의 과제, 세 가지로 나누고 이를 합쳐 인생의 과제라고 불렀네. 개인이 사회적인 존재로 살고자 할 때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 그것이 인생의 과제네.
아들러 심리학은 타인을 바꾸기 위한 심리학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기 위한 심리학일세.
인간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랑을 실감할 수 있네.
반면에 구속이란 상태를 지배하려는 마음의 표징이며, 불신이 바닥에 깔린 생각이기도 하지.
연인이 붉은 실로 연결된 사이라고 한다면, 부모자식은 단단한 쇠사슬로 연결된 관계일세.
아들러의 심리학에서는 개인으로서의 자립과 사회에서의 협조를 목표로 내걸었다.
그러면 어떻게 헤야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일, 교우, 사랑이라는 이 세 가지 과제를 넘어서야 한다.
여러 구실을 만들어서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려는 사태를 가리켜 인생의 거짓말이라고 했어.
아들러 심리학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사용의 심리학일세. 요컨대 무엇이 주어지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군요.
프로이트의 원인론은 소유의 심리학이고, 결국은 결정론으로 귀결된다. 아들러 심리학은 사용의 심리학이고,
행복해지려면 미움 받을 용기도 있어야 하네. 그런 용기가 생겼을 때, 자녀의 인간관계는 한순간 달라질 걸세.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타인에게 인정받기 원하는 마음을 부정한다네. 그 사람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지 말라.
아들러는 상벌에 의한 교육을 맹렬히 비난했네. 상벌교육의 결과로 생기는 것은 “칭찬하는 사람이 없으면 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벌주는 사람이 없으면 부적절한 행동을 한다.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 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네.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밖에 없네.
아이의 관계를 고민하는 부모는 대개 아이의 인생은 곧 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타인이 과제에 개입하는 것과 타인의 과제를 떠안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무겁게 짓누른다네.
먼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는 내 과제가 아니다고 경계선을 정하게.
누구도 내 과제에게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는다.
알렉산드 대왕은 고르디우스의 단단하게 묶인 매듭을 보자마자 단칼로 베어버렸네. 그렇게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
“운명이란 전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다.‘
과제의 분리는 인간관계의 최종 목표가 아니야. 오히려 입구라고 할 수 있지.
아들러는 말했네, 곤경에 직면해 보지 못한 아이들은 곤경이 닥칠 때마다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일세. 남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마음에 두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에 집착하면 대가를 치르게 된다.
행복해지려면 미움 받을 용기도 있어야 하네. 그런 용기가 생겼을 때, 자네의 인간관계는 한 순간에 달라질 걸세.
인간관계의 카드는 언제나 내가 쥐고 있다.
이렇게 타인을 친구로 여기고, 거기서 내가 있을 곳은 여기라고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공동체 감각일세.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만 집착하는 삶이야말로 나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자기중심적인 생활양식. 자기에 대한 집착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되는 거라네.
이 사람이 내게 무엇을 해줄까?가 아니라 내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지. 그것이 공동체에 공헌하는 길일세.
소속감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획득하는 것일세.
관계가 깨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사는 것은 타인을 위해 사는 부자연스러운 삶이야. 공동체 감각을 갖되 자유를 택하라.
칭찬도 금물이고, 야단도 금물이네. 이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입장일세.
아들러 심리학이 상벌교육을 강하게 부정하는 것도 아이를 조종하려는 측면 때문일세.
자네가 칭찬받기를 원하는 것은 수직관계에 익숙해졌기 때문일세.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온갖 수직관계를 반대하고 모든 인간관계를 수평관계로 만들자고 주장하네.
왜 인간은 개입을 하는 걸까? 그 배경에는 사실상 수직관계가 있지. 인간관계를 수직으로 받아들이면, 상대를 자신보다
아래라고 보고 개입을 하네. 상대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끈다. 내가 옳고 상대는 틀렸다고 믿고 있지.
물론 여기서 개입은 조종이나 다름없네.
개입이 아니라 지원이 필요하네. 지원이란 과제의 분리와 수평관계를 전제로 하지.
공부하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공부를 잘 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고 스스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곁에서 힘이 되어주는 거라네.
칭찬하지도 야단치지도 않네. 이러한 수평관계에 근거한 지원을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용기부여라고 하지.
인간은 칭찬을 받을수록 나는 능력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네.
칭찬은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이기 때문이지. 만약 자네가 칭찬을 듣고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은 수직관계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네.
칭찬받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는 걸세. 그리고 그 행위가 좋은지 나쁜지를 결정하는 것은 타인의 기준이고, 칭찬받고 싶다면 타인의 기준에 맞춰 행동할 수 밖에 없어. 자신의 자유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해. 반면 ‘고맙다’는 말은
평가가 아니라 순수한 감사의 인사라네. 인간은 감사의 말을 들었을 때, 스스로 타인에게 공헌했음을 깨닫게 되지.
아들러 심리학에서 공헌이란 굉장히 중요한 카워드일세. 인간은 자신이 가치가 있다고 느낄 때 용기를 얻는다.
대체 어떻게 하면 스스로 가치 있다고 느낄 수 있느냐? 인간은 나는 공동체에 유익한 존재라고 느끼면 자신의 가치를 실감한다네.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을 필요도 없이 자신의 주관에 따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타인은 행위의 차원이 아닌 존재의 차원에서 살펴야지. 존재의 차원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가치가 있네.
위독한 상태의 어머니는 설령 아무 것도 할 수 없어도 살아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네나 가족에게 큰 위안이 될 걸세.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볼 때 자기만의 이상적인 모습을 멋대로 지어내고 그것을 기준으로 평가를 내린다네.
이상적인 모습을 100점으로 놓고 천천히 점수를 깎는다네. 이거아말로 평가라는 발상이지.
공동체 감각에 대해 아들러에게 비슷한 문제를 제기한 한 사람이 있었지. 그때 아들러의 대답은 이러했네.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이 협력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과 관계없습니다.
내 조언은 이래요. 당신부터 시작하세요. 다른 사람이 협력하든 안하든 상관하지 말고.
이런 상태에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까요? 스스로에게 가치가 있다고 느낄 수 있을까요? 일단 다른 사람과 한 명이라도 좋으니 수평관계를 맺을 것.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일세.
의식상에서 대등할 것, 그리고 주장할 것은 당당하게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단 말이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간다.
아들러 심리학은 철저히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인간관계의 최종목적지는 공동체 감각에 있다.
구체적으로는 자기집착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돌리고 공동체 감각을 기르는 것. 이에 필요한 것이 자기수용, 타자신뢰, 타자공헌이라네.
자기수용이란 하지 못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걸세.
이걸 긍정적 포기라고 하네.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하네.
우리는 태어나면서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바꿀 수가 없어.
주어진 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내 힘으로 바꿀 수가 있네.
따라서 바꿀 수 없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주목하란 말이지.
내가 말하는 자기수용이란 이런 거네. 그래 우리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네. 그저 용기가 부족한 거지.
자기에 대한 집착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돌릴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두 번째 키워드가 바로 타자신뢰라네.
여기서 믿는다는 말을 신용과 신뢰로 구별해서 생각해야 하네. 먼저 신용에는 조건이 따르지.
그러나 인간관계는 신용이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성립된다고 보는 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입장이네.
다른 사람을 믿을 때 조건을 일절 달지 않는 걸세. 담보가 있든 말든 개의치 않고 무조건 믿는다. 그것이 신뢰라네.
그런데 신뢰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결국은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네.
타자신뢰를 통해 더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갈 용기를 가질 때 인간관계의 즐거움이 늘어나고, 인생의 기쁨 또한 늘어나게 되는 거지.
타인을 신뢰한다는 것은 타인을 친구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네. 만약 타인이 친구가 되면 자네가 속한 공동체에서
있을 곳을 찾을 수 있게 될 걸세. 여기에 있어도 좋다는 소속감을 얻게 되는 거지.
공동체 감각이란 자기수용과 타자신뢰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야.
그래서 세 번째 키워드 타자공헌이 필요하다네. 친구인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것, 공헌하려는 것,
그것이 타자 공헌일세. 타자공헌이 의미하는 것은 자기희생이 아니라네. 오히려 아들러는 타인을 위해 자기 인생을
희생하는 사람을 보고 사회에 지나치게 적응한 사람이라며 경종을 울리기도 했지.
타자공헌이란 나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행위이다.
가장 알기 쉬운 타자공헌은 일이라네. 우리는 노동을 통해 타인에 공헌하고, 공동체에 헌신하며,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실감하지. 나아가서는 자신 존재가치를 발견하게 되지.
저녁 식사 후 식탁이 그대로 놓여 있네, 아이들은 각자 방으로 가고 남편은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어, 아내가 뒷정리를 다했지. 그런데 가족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도와주려는 시늉도 하지 않아? 그 순간 불만을 갖게 되지.
남이 내게 무엇을 해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실천해 보라는 걸세. 왜 그 순간 공헌하고 있다고 느끼는 걸까? 가족을 친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일세.
어떤 경우라도 공격하는 그 사람이 문제이지. 결코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니란 사실일세. 신경질적인 생활양식을 가진 사람은 걸핏하면 모두, 늘, 전부라는 말을 입에 담는다네. 모두 나를 싫어해. 늘 나만 손해를 봐, 전부 틀렸어라는 식으로 말이야.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인생의 조화가 결여된 것으로 본다네.
유대교 교리 중에 이런 말이 있네. 열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중 한 사람은 반드시 당신을 비판한다.
당신을 싫어하고, 당신 역시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열명 중 두 사람은 당신과 서로 모든 것을 받아주는 더 없는 벗이 된다. 남은 일곱 명은 이도저도 아닌 사람이다. 인생의 조화가 결여된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 한 명만 보고 세계를 판단하지.
일 중독자는 일하느라 바빠서 가정을 돌볼 여유가 없다네. 이는 일을 구실로 다른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에 불과하거든.
이것은 인생의 거짓말이지. 회사일에만 몰두하는 것은 인생의 조화가 결여된 삶을 사는 거라네.
행위의 차원에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존재의 차원에서 받아들일 것인가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불행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거라네. 이런 현실에 대해 아들러는 간단하게 대답했지.
나는 공동체에 유익하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통해서만 자신이 가치 있음을 실감한다고.
행복이란 공헌감이다.
인정욕구를 통해 얻은 공헌감에는 자유가 없지. 우리는 자유를 선택하면서 더불어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네.
부모에 대한 복수와 안이한 우월성 추구는 쉽게 연결된다네. 부모를 난처하게 하면서 동시에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심리상태니까.
아들러 심리학이 중요하게 내세우는 것이 평범해질 용기일세. 왜 특별해지려고 할까? 그건 평범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지. 자기 수용은 그를 위한 첫걸음일세. 평범함을 거부하는 것은 무능해지는 것이라고 착각해서겠지.
만약 인생이 정상에 도달하기 위한 등산이라면, 인생의 대부분을 길 위에서 보내게 되네.
즉 정상에 이른 순간부터 진짜 인생이 시작되고,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노정은 가짜인생이 되는 거라네.
인생이란 선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점이 연속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분필로 그어진 실선을 확대경으로 보면,
선처럼 보이는 삶은 점의 연속, 다시 말해 인생이란 찰나의 연속이라네.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밖에 없어.
춤을 추듯 살라. 춤을 추고 있는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자네가 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인생은 키네르시스적 인생이라고 할 수 있네. 그에 반해 내가 춤을 추는 인생은 에네르기이아적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걸세.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을 인용해 보겠네. 일반적인 운동-이를 키네시스라고 하네-에는 시점과 종점이 있네. 가능한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이는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그 여정은 불완전하지. 그것이 키네시스적 인생일세. 반면 에네르게이라란 지금하고 있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상태가 된 운동을 가리키네. 달리 말하면, 과정 자체를 결과로 보는 운동이라고 할까?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라는 것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진지하고 빈틈없이 해나가는 것을 뜻하네.
목표 같은 건 없어도 괜찮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사는 것 그 자체가 춤일세. 심각해질 필요 없어.
인생 최대의 거짓말, 그것은 지금 여기를 살지 않는 것이라네.
아들러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의미란 없다. 가령 엄청난 천재지변을 당했을 때 원인론에 입각해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라고 과거를 돌아보며 따져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이제부터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하네.
이어서 아들러는 “인생의 의미는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고 말했다네. 내 인생에 의미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밖에 없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자유로운 인생을 살기 위한 지침으로 ‘길잡이 별’ 이라는 것을 제시했지.
여행객들이 북극성에 의지해 길을 나서듯 우리 인생에 길잡이 별이 필요하네.
그 별은 어디에 있습니까? 타자공헌에 있다네. 타인에게 공헌한다는 길잡이 별만 놓치지 않는다면 헤맬 일도 없고 뭘 해도 상관없어.
나는 오랜 세월 아들러의 사상과 함께 지내오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네. 한 사람의 힘은 크다.
내가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
세계란 다른 누군가가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힘으로 바뀔 수 있다는 뜻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