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의 시험을 통과하라 2 (약 1:22), 김덕선 목사
중국의 격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듣는다. 그리고 잊어버린다. 나는 본다. 그리고 기억한다. 나는 행한다. 그리고 이해한다.” 행해야 비로소 모든 것이 내 것이 될 수 있고 가치 있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예외가 아닙니다. 행해야 비로소 믿는 것이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신앙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믿음(belief)은 내적 확신이고, 신앙(faith)은 외적 행동입니다. 믿음에서 신앙으로 승화해야 참 신앙이고,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신앙은 ‘belief’가 아니라 ‘faith’입니다.
이번 주일은 “행함의 시험을 통과하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야고보서 1장 22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거울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속에 어떤 것이 들어있는지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곧 잊어버립니다. 특별히 시간을 내어서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일 아침이 되면 우리의 생각에는 세상의 스케쥴로 가득 채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실천해야지 하면서 끝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나중에 잊어버리는 사람은 결국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끝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자기만족에 빠지게 됩니다. 자신이 얼마나 추한 모습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점점 더 부주의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한번 거울을 보고 나서 자신을 씻지 않으면 그 사람은 다시 거울을 보아도 계속해서 더러운 상태에 머물기가 쉽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면 더 많은 죄를 짓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는 않는 성도는 하나님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 않은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야고보서 2장 14절은 야고보서의 핵심주제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마음에 선한 생각이 떠오르고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생각되면 두 번 생각하지 말고 행동에 옮기십시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도움의 순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뻔지레한 말만 하고 끝내지 않습니다.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16절). 당신을 위해서 기도할께요. 사실 상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습니다. 사도 요한도 이와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 3:17). 진정한 사랑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 마음으로 믿고 있다는 것만 주장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참된 믿음은 행함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반드시 결과가 나타나야 합니다. 참된 믿음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만약 진리에 지적으로 동의하긴 하지만, 그 진리가 마음속에 파고들지 못하고, 손이나 발에 전달되지 않은 사람들은 사탄과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귀신도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알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말만 그럴듯하게 하고 실천이 없는 신앙은 거의 귀신 수준의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 신앙이 가능할까요?
알기는 많이 아는데 전혀 삶의 열매가 없는 신앙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대체로 자기가 듣는 것은 자기의 것이 다 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강의 시간에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 다 알아듣는 것 같지만 시험을 쳐보면 머리 속에 남은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 들통이 납니다. 우리가 들은 것이 자기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몇 번씩 반복하여 공부하여 완전히 내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자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복을 받게 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효과적으로 실천하는 자입니다. 야고보서 1장 25절입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그는 말씀을 생각하고, 그 말씀에 기꺼이 순종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믿음과 행함에 대한 바른 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로마서 3장 28절과 야고보서 2장 26절이 상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로마서 3장 28절에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야고보서 2장 26절에는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는 자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야고보는 믿는 자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선행이나 공로로 구원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행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엡 2:8-10).
어떻게 하면 행함이 있는 신앙을 소유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이 처음부터 그렇게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면 그 순간에는 믿었습니다. 야고보서 2장 23절입니다.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느니라.”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고 말았습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의 나이가 86세였습니다. 즉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릴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현실의 삶 속에서 여전히 자신의 방법대로 살아갑니다.
창세기 17장 1절입니다. “아브람이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13년 동안 아무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말을 해도 아무 반응이 없으면 말을 하고 싶지 않고 안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 오셔서 네 아래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실 때 마음 속으로 거부감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17장 17-18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이전에 아브라함은 그래도 말씀을 주실 때는 믿었는데, 이제는 말씀 자체도 거부하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자기의 방법을 고집합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이 정도 되면 우리 같으면 그렇게 못믿느냐, 정 그러면 할 수 없다고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브라함에게 다시 약속해 주십니다. 창세기 17장 19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결국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녀, 이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아들 이삭이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에게는 손자를 얻는 그런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갔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아끼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청천벽력의 말씀을 하십니다.
창세기 22장 1-2절입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창세기 22장 3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아브라함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즉각적으로 행동으로 옮깁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말지 따지며 몇 날, 몇 주, 심지어 몇 년씩도 고민하기도 합니다. 일단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바로 응답해야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차원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실 때는 거기에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는 사실을 간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믿음의 차원에 들어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험을 통해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약속의 축복을 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창세기 22장 12절입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실 때 빼앗아 가신다는 생각을 하시면 안됩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우리에게서 그 어떤 것도 빼앗아 가실 이유가 없으십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그 어떤 것에 집착하면 나중에 후회한다는 사실을 아시기 때문에 때로는 그것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조건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고 믿음의 가치에 집중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이삭, 상속자, 희망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부담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손해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던지 간에 더 이상 미루지 말고 행동으로 믿음을 나타내야 합니다. 더 이상 우리는 아는 단계에서 믿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이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 순간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축복의 분기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사람에 대한 실망이나 환경의 어려움으로 중간에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사울 왕은 중간에 상황이 불평하고 힘들어지거나 결과가 생각보다 빨리 나타나지 않는다고 불순종했습니다. 이로 인해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순종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믿음이 좋아지기 보다는 오히려 줄어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갖은 멸시와 조롱 가운데서도 끝까지 순종하심으로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