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애통하는 자 (마 5:8), 김덕선 목사

liefd 2024. 5. 10.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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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웃어야 합니까? 울어야 합니까? 신자는 주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만면에 웃음을 띠고 계속해서 활기차고 기운 찬 모습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에 보면 화있을 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6:25).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보고, 심판과 죽음이라는 냉혹한 결과를 보며, 그리고 자신을 영접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성을 보며 우셨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애통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애통하는 것이 어떻게 복된 일이 될까요?

사실 애통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애통하라고 하신 것에 의미가 무엇일까요? 사는 것이 힘들어서 슬퍼하거나, 돈이 없어서, 억울한 소리를 들어서 슬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애통하라는 것은 사별의 슬픔이 아니라 회개의 슬픔을 말합니다. 자신의 무가치함과 영적으로 파산된 상태임을 알고 애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신중한 사람입니다. 삶을 심각하게 보는 사람입니다. 삶을 영적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신자가 언제 애통해야 할까요?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니이다”히고 고백합니다(119: 136). 에스겔은 하나님이 신실한 사람들을 일컬어 예루살렘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여 우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9:4).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라고 탄식하였습니다(7:24). 죄에 빠져 있는 고린도 교회에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않는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고전 5:2, 고후12:21).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3:18). 바울은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울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도 애통해야 합니다(119:136). 에스라는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였다(10:1). 우리는 또한 교회의 상처에 대해서도 애통해야 합니다(137:1).

 

자신의 죄성에 대해 통곡하며 애통하는 자들은 그들의 비탄을 경감시켜 줄 유일한 위로, 곧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모든 위로 가운데 가장 큰 위로는 죄를 뉘우치며 애통하는 모든 죄인에게 선포되는 죄의 사면입니다. 죄에 대한 자각이 먼저 선행되고 그 후에 회심이 따라야 합니다. 구원은 회개를 통해서 옵니다. 회개는 애통을 통해 옵니다.

 

애통한다는 동사는 계속적인 동작을 나타냅니다. 계속해서 애통하는 자는 계속해서 위로를 받습니다. 어떻게 하면 애통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가 죄를 깨닫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제거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는 것들, 성령을 거역하게 하는 것들, 우리를 무감각하게 하는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어떤 애통은 제거해야 할까요?

첫째, 절망이 주는 애통을 제거해야 합니다.

유다의 애통이 여기에 속합니다(27:3).

둘째, 위선적인 애통을 제거해야 합니다.

사울 왕은 사무엘 선지자에게 범죄한 것에 대해 슬퍼하고 회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삼상 10:12, 15:24). 그러나 그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영예를 돌리려고 했습니다(삼상 15:30). 그는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렇게 했다고 핑계를 대었습니다(삼산1 5:24).

셋째, 억지로 하는 애통을 제거해야 합니다.

가인이 애통이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4:13). 그의 벌이 그의 죄보다 그를 더 괴롭혔다.

넷째, 외식적인 애통을 제거해야 합니다.

아합의 애통이 그러한 것입니다. 그 옷을 찢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왕상 21:27). 그의 옷은 찢어졌으나 그의 마음은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베옥을 입었으니 슬픔을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다섯째, 열매 없는 애통을 제거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약간의 눈물을 흘리지만 여전히 속이고 더럽습니다. 이들은 울면서도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성경적인 애통인가요?

그것은 우리가 고통보다 죄 때문에 더 애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다고 부르짖었습니다(51:3).

참된 회개자는 죄의 부끄러운 결과만 가지고 괴로워할 뿐만 아니라 지긋지긋한 죄의 본성 때문에 고통을 당합니다." 거기에서 너희의 길과 스스로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이미 행한 모든 악을 인하여 스스로 미워하리라“(20:43).

 

우리의 눈물은 우리를 더 거룩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애통할 뿐 아니라 또한 돌아서야 합니다.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2:12). “그가 슬퍼하였던 죄를 다시 범하지 않는 사람이 그가 범하였던 죄에 대해서 진실로 슬퍼하는 사람이다”(어거스틴).

 

우리는 죄를 금해야 할 뿐 아니라 죄에 대해 소름이 끼칠만큼 싫어해야 합니다. 얼마나 분하게 하며(고후 7:11). 참된 애통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시작하고 죄를 미워함으로 끝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더럽혔다면 꼭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우리가 남의 재산을 부당하게 취급하여 손해를 입혔으면 최선을 다하여 갚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마음이 내킬 때까지 죄에 대한 우리의 애통을 미루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애통해야 한다.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지어다”(2:18). 우리의 영혼을 매일 회개의 소금물에 씻는 것은 병의 재발을 막거나 치료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이러한 장애물들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을까요? 한 가지 방법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방법을 성경에 나타난 죄에 대해 공부하는 것입니다(38:17-18). 또한 통회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애통하는 자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죄에 대해 민감한가?점검해 보면 압니다.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 뿐만 아니라 세상의 죄에 대해서도 애통하게 된다(13:17).

 

우리가 애통하는 자인지 알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의식하고 있는지 보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기쁨이 있는가? 우리가 용서받고, 깨끗한 삶에서 오는 참된 평안, 참된 행복, 참된 위로를 알고 있는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의 죄에 대해 철저하게 회개하고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이사야 53:4절에 보면 주님도 슬픔을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가 되었다. 예수님도 심한 통곡을 하셨습니다(5:7).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우셨을까요? 성경에는 예수께서 세 번 우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우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인류의 죄 때문에 피땀을 흘리시며 통곡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자신의 죄 때문에 슬퍼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슬퍼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애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로마군에 의해 멸망당할 예루살렘과 민족의 장래를 내다보시고 우셨습니다(23:37).

 

그러면 애통하는 자에게는 어떤 복이 있을까요?

애통하는 자가 받을 보상이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회개로 인한 소망이 있습니다. 진정한 위로는 죄의 형벌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실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 시간에 애통할 때, 나의 영적 파산을 바라보고 애통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눈에 눈물을 씻기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애통하는 자들이 복이 있는 것은 이들만이 용사를 받기 때문입니다. 구약 선지자들에 따르면, 위로는 메시야의 직무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는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칠 위로자가 될 것입니다(61:1, 40:1). 시므온과 같은 경건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고대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위로는 영광의 최종 단계에서 완성됩니다. 오직 그때가 되어야만 죄는 더 이상 없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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