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 프레드릭 마이어

liefd 2024. 5. 17.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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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구덩이(7:2-3, 51:1, 2)

 

우리의 이야기는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 2천년 전, "우르"라는 옛도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함 자손들은 지독히 우상숭배적이었다. 우연히 이 함족의 개척지에 세 자손의 일가가 들어오게 되었다. 데라를 중심으로 한 이 씨족은 우리 바깥에 있는 한 초원에 자리를 잡았다. 마침내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났다.

 

2. 하나님의 부르심(12:12)

 

첫째, 이 부르심에는 어려움이 개재되어 있었다.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둘째, 이 부르심은 아주 현명했다. 이것은 아브라함 자신을 위해 현명했다. 그것은 세상을 위해서 현명하였다. 이 한 사람에게 이 세상의 장래에 대한 소망이 달려 있다.

 

셋째, 이 부르심에는 하나의 약속이 따르고 있었다. 성 프란치스는 이렇게 말한다. “집에 불이 붙으면 사람들이 모든 것을 창밖으로 내던져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하나님의 참 사랑으로 넘칠 때 사람들은 다른 모든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에 마련이다.”

 

넷째, 이 부르심은 우리에게 선택의 의미를 가르쳐 주고 있다.

 

다섯째, 이 부르심은 아브라함의 생애에 대한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생에에 대한 열쇠는 "구별"이라는 단어다. 그는 시종일관 구별된 사람이었다.

 

3. 그는 순종했다(11:8)

 

첫째, 처음에 아브라함의 순종은 오직 부분적이었다. 그는 데라를 데리고 갔다. 아마도 한 15년 동안 아브라함의 순종은 정체 상태에 있었다.

 

둘째, 아브라함의 순종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었다.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을 사람들을 이끌고...떠나서(12;5). 그가 가야 할 곳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에게 충분했다. 그가 기댈 것은 약속이라기보다는 약속을 하신 분이다.

 

셋째, 아브라함의 순종은 최종적으로 아주 완전한 것이었다.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12;5).

 

4. 최초의 순례자(12:4-9)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는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장막, 제단, 그리고 약속이다.

 

첫째, 장막-아브람은 1백년 동안 이리 저리 이동하면서 허름한 장막 속에서 살았다. 그는 하란의 안정된 생활보다 가나안에서의 방랑생활을 택했으며, 그 목적으로 여전히 장막생활을 했다.

 

둘째, 제단-아브람은 장막을 칠 때마다 제단을 하나 세웠다. 제단은 또한 희생, 번제, 극기, 그리고 굴종을 뜻한다. 우리는 아브람이 하란에 살면서 제단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제단은 자신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때때로 전 부족이 거기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렸다. 지상에 있는 모든 가정의 축복의 근원이 되기로 된 이 부족장은 가정예배를 실천했다.

 

셋째, 약속,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12:7). 구별된 나그네 생활에는 언제나 약속성취가 따른다.

 

5. 애굽에 내려가다(12:10)

 

구별된 사람의 길은 결코 순탄한 길일 수 없다.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성경에서 애굽은 세상과의 결탁, 육신의 무장에 대한 의존을 나타낸다(31:1).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에게 애굽에 잠시 가서 피신을 명령한 적이 있다(46:3, 4, 2:13).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그런 신령한 지시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단순히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했다.

어떻게 한 가지 죄악이 다른 죄악으로 이어지는가를 보라. 애굽에서 아브람의 실패는 우리에게 결코 영웅적이지 못했으며 이중인격과 기만의 맥락을 보이는 부족장의 본성을 빤히 들여다보게 하는데, 이와 같은 성격은 그의 후손에게서 너무 자주 재현되어 오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은연중의 순종과 전적인 굴복이다.

 

6. 롯과 헤어지다(13:9)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죄 때문에 우리를 내던져버리지 않으신다(103:10, 11). 애굽의 방문으로 이 가정에 막대한 재물이 생긴 것은 틀림없지만 이것이 또 문제를 일으켰다.

 

첫째, 롯은 누구였는가? 그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심에 이끌리기 보다는 친구들이 옳은 길을 가기 때문에 자기들도 따라가는 그러한 부류의 사람 중에 하나로 보인다.

 

둘째, 구별의 필요성, 우리는 세상의  지탄과 칭찬, 육신의 야심과 게획, 영의 생기를 부지불식간에 가라앉히는 교제, 여러 가지 교활한 형태요 나타나는 이기적인 생활, 또한 종교의 기쁨과 위로까지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결별할 각오를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셋째,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는가? 아브라함의 행동은 대범했다(13:8,9). 그러나 무엇보다 그것은 신앙에 기초한 것이었다. 하나님을 확신하는 사람은 이 세상 것을 가볍게 볼 수 있다.

 

롯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택한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묻지  않았다(13:10,11). 그의 선택이 전적으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에 자랑에 대한 결정이었던 것은 소돔 사람들이 여호와 앞에서 심히 죄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롯이 한 행동은 그리스도인으로 자차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날마다 저지르고 있는 그것이다.

 

7. 두 길(13:9)

첫째,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의 구별된 자들에게 가까이 오신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우리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한 사람들이 되고자 한다면 많은 인연을 끓고, 많은 교제를 포기하고, 많은 습관과 관습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고후 6:17-7:1).

 

둘째, 하나님께서는 그를 신뢰하는 자들에게 그들 스스로 할 수 있는 경우보다 더 좋은 일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롯이 눈을 들어 올린 것은 세속적인 분별력에 따라 자신의 혜택을 탐색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눈을 들러 올린 것은 그의 물질적 이익에 최선의 보탬이 될 것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준비해 놓으신 것을 보기 위해서였다(13:14, 15).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오르는 추세에 있다. 한 가지 약속은 더 상세하고 복된 또 다른 약속으로 이어진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내가 네게 땅을 보여주겠다는 말씀을 하셨고, 벧엘에서는 이것이 그 땅이다는 말씀을 하셨고, 여기서는 내가 너와 바다의 모래처럼 헤아릴 수 없는 자녀들에게 이 모든 땅을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이 주신 선물들을 사용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믿음의 활용에 대한 깊은 교훈이 있다. 여호수아는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을 각각 다른 기회에 여섯 번이나 들었다. 강하라는 표현은 팔의 붙잡는 힘과 관련되고, 담대하라는 표현은 땅을 짗고 서는 발목의 끈기와 관련된다.

 

8. 망중한(忙中閑), 14:9

 

창세기 14장에 기록된 싸움은 단순한 국경 분쟁이 아니라 징벌과 정복을 위한 원정이었다.

 

첫째, 여기에 구별된 사람이 타인들에게 사심없이 그리고 성공적으로 개입하는 모습이 있다.

 

둘째, 훌륭한 성공의 시기는 종종 큰 시험에 대한 신호일 경우가 있다. 아브람의 도움과 구출에 고마워하는 나머지 소돔 왕은 포로만 자신에게 돌려주고 모든 노략물은 아브라함이 가져다 좋다는 제안을 했다.

 

셋째, 하나님의 앞서 가는 은혜. 하나님은 우리가 전쟁터에서 피곤하게 돌아오는 길목에서 우리를 맞아주신다. 그는 우리가 큰 시험을 받을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아실 때 우리에게 오신다.

 

9. 멜기세덱(7:1)

 

멜기세덱은 제사장이었다(4:15). 이 제사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요 맹세를 통해 확약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선의 선물이다. 이 제사장직은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제사장이시다. 그는 모든 인간들을 자신에게 이끌고 계시다. 이 제사장직은 인간적인 모든 제사장들의 반차보다 우월했다. 이 제사장 직분에는 영원한 신비가 담겨 있다. 이 제사장직은 왕권을 갖는다. 이 제사장직은 모두에게서 십일조를 받고 있다.

 

10. 아브라함의 확고한 신앙(4:20)

 

처음으로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다는 구절이 나오며 주 여호와께서 방패시라는 얘기를 듣는다. 그리고 처음으로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믿었다는 단어를 대하게 된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두려움에 대해서 언급하셨다.

그가 그돌라오멜을 패배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함으로 그를 철천지 원수로 삼은 것이다. 그가 가나안에 온지도 10년이 되었다. 세 번이나 자신의 소망을 붙붙게 해주셨지만 도무지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둘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무자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네 집에서 기 자가 너의 후사가 아니니라.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15:4,5). 너무나 자주 우리는 하나님을 오해하며 그의 지연을 저절러 해석한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라(4:3). 그는 할례라는 유대교 의식을 받기 전에 믿었다. 그는 자연의 이치로 봐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인데도 믿었다. 그 어떤 친구나 조언자의 견해도 당장 있을 수 없는 일로 얘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곰곰이 생각하고 저울질했지만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

 

그의 신앙은 심한 단련을 받기로 작정되어져 있었다. 아브람은 15년을 더 기다려야 했으니, 첫 약속과 이삭의 출생을 통한 그것의 성취시기 사이에는 모두 25년간의 세월이 흘렀다.

그의 신앙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아브라함의 의는 그의 행위가 아니라 그의 신앙의 결과다(3:6, 4:23-24)

 

11. 하나님을 지켜보라(15:7, 2:3, 3:26, 8:25)

 

주 여호와여 내가 이땅을 업을 삼을 줄 무엇으로 알리이까?

 

첫째, 제물을 지켜보기,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둘째, 흑암의 공포. 흑암 중에 행하며 빛이 없는 자가 누구뇨, 여호와의 이름을 의죄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셋째, 언약의 비준. 칙칙한 어둠 속에서 이 신비스러운 빛, 곧 횃불이 당당하게 나뉘어진 고기 사이를 오갔으며 그와 동시에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라하는 음성이 들려왔다(15:18).

 

12. 시녀 하갈(16:1)

 

이런 변론의 출처-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아브라함은 어떤 의의도 제기하거나 하나님과 상의하지고 않고 당장 그 제안에 빠졌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이런 변론이 가져온 고통-목적이 달성되는 순간 그동안 순결과 행복 밖에 모르던 집 안에 쐐기풀 같은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불화의 장면이 등장했다.

 

일생동안 피해를 입은 희생자-설령 그것이 타인의 잔인과 죄의 결과라 할지라도 그 처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를 복종을 통해서 정복하게 되고 되돌아감으로써 빠져 나오게 된다. 돌아가 복종하라.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 4:10).

 

13. 완전하라(17:1)

 

첫째, 하나님의 요청-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여기서 완전하다는 자신의 일에 대해서 철저한 준비를 갖춘다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사람은 완전해야 한다(딤후 3:17). 이것은 우리 존재의 전반적인 굴복을 의미하며, 참된 마음, 일편단심, 신실하고 충성된 마음, 오 우리 생명의 왕이여 그것은 주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나이다. 일편단심의 헌신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총애의 대상이었다.

그러한 자세는 아주 조심스런 생활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둘째, 이 요청의 기초가 된 계시-나는 전능한 하나님(엘 사다이)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은 다음에 명령이 따르고 있다.

셋째, 신령하게 제안된 계약-내가 내 언약을 너와 나 사이에 세워.

이 계약은 후손과 관계가 있었다. 하란에서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무겠다, 벧엘에서는 내가 네 자손으로 티끌 같게 하겠다. 마므레서는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그러나 여기서는 세 번이나 열국의 아비지가 될 것이라는 다짐을 받고 있다(17:6, 3:7-29).

 

이 계약은 땅과 관계가 있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17:8). 영원한 기업이 성취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이 계약은 앞으로 태어날 아기와 관계가 있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내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17:19). 나는 너와 네 후손에게 하나님이 되리라.

 

14. 계약의 상징(17:2)

 

아브라함은 성경에서 세 번 하나님의 벗으로 불려지고 있다(대하 20:7, 2:23, 41:8). 우리가 이 복스러운 우정을 즐기려면 먼저 구별, 순결, 순종 이 세 가지 조건을 성취해야 한다.

 

바리새파에서는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은 환영하지만 할례를 받지 않을 경우에는 그럴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15:1, 24).

 

첫째, 구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은 이 의식을 통해서 구별된 백성이 되었다(고후 6:17,18).

 

둘째, 순결, 그리스도의 할례로 말미암아 육신의 몸을 벗어버리라(2:11). 순결이란 오로지 성령의 특별한 은혜에 의해서 얻어질 수 있다.

 

셋째, 순종, 할례에 대한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순종이 뒤따랐다. 당일에 아브라함과 이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다.

 

아브라함이 혼자서 웃었다는 것은 결코 믿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용납되고 사랑받고 있다는 점을 깨닫고 기쁨을 가누지 못해 흡족해 하며 웃었다는 점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15. 신령한 손님(18:1)

 

첫째, 아브라함은 그의 방문객들을 참된 동방의 양식에 따라서 후대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이처럼 손님으로 가장하고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아닐까? 주님께서는 굶주리고 목마른 방랑객이나 벌거벗고 병든 손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결코 빚을 지는 법이 없다. 베드로의 고기 배, 가나의 혼인 장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사렙다 과부, 아브라함의 손님대접, 네 아애 사랑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8:10).

 

이것이 믿음의 진정한 법칙이다. 당신의 믿음이나 감정을 바라보지 말고 저 멀리 있는 약속의 말씀을, 무엇보다 약속자를 바라보라.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하나님을 기로막고 있는 것은 우리의 불신뿐이다. 약속의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먼저 사랑와 아브라함은 믿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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