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 이름을 위하여(행 5:33-42), 김덕선 목사

liefd 2024. 6. 2.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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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41).

 

당시에 종교적 지도자들은 사도들이 감옥에서 나온 이후에도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사도들을 죽이고자 할 때에 한 사람이 그들 가운데서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당시에 존경을 받고 있던 가말리엘이라는 율법사가 사도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소극적이나마 변호하였습니다.

 

당시에 종교적 지도자들은 가말리엘의 말에 상당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사도들을 죽이지 않고 채찍질하여 내어 좇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이름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보호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엔 고난과 핍박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조차도 축복과 은혜의 일들로 바뀌게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서른 아홉의 태장을 맞았습니다(고후 11:24). 그리고 나서 사도들은 더욱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지 않으려면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매를 맞을 수 있었다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사도들은 계속해서 어디를 가던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1. 당신은 예수 이름에 대해 어떤 반응을 나타내고 있습니까?(33,38,41)

 

오늘 본문에는 예수 이름에 대해 세 가지 반응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정적인 반응이 있습니다.

 

33절에 보면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사도들이 공개적으로 예수의 증인이라는 입장을 표명했을 때 당시에 종교적 지도자들은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당신들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선포했을 때 그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는 커녕 오히려 마음이 완악해졌습니다. 더우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하자 분노가 극에 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이름에 대해 이상하게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깨달아야 할 순간에 더욱 마음이 완악하여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둘째, 중도적인 반응이 있습니다.

38절에 보면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사도들의 진술을 듣고 가장 흥분한 자들은 사두개인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 교리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러한 고조된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당시에 가장 존경을 받고 신앙이 두터운 바리새파 가말리엘이 나서서 중도적인 견해를 내세웠습니다. 만약에 사도들이 가르치는 복음의 내용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사도들을 대적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단순히 사람들로부터 나온 사상과 소행이라면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없어지게 될 것이라는 견해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합리적인 불신앙입니다. “기다려 보라는 실제로 반대표를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닙니다. 앞으로 되는 것을 봐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어떤 기준을 정해 놓고 그 범위 안에서 비교적 관대합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절대 무리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믿다가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언제나 그만 둘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셋째,적극적인 반응이 있습니다.

41절에 보면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사도들은 예수 이름 때문에 모욕당하는 것을 가치있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 이름 때문에 핍박과 고난이 찾아와도 오히려 그것 때문에 자랑하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 이름를 위하여 나타내는 그것이 삶의 전부요 목표였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다가 우리는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대는 하나님의 인정을 의미합니다. 예수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은 사실상 특권입니다.

 

인도에 선교사로 간 맥스웰이라고 하는 분은 그곳에 언어를 습득하는데에 대단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인도는 마을마다 언어가 달라서 새로운 마을에 들어갈 때마다 새롭게 언어를 습득해야만 됩니다. 한번은 어느 마을에 들어가 한 힌두교인을 붙들고 말 좀 가르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내게 와서 말을 가르쳐 주시오. 예수를 믿던 안믿던 상관하지 않을 테니 말만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에 이 힌두교인이 거절하더랍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걸작입니다. ”당신과 함께 있어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싫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이 사람하고 만나면 누구나 기독교인이됩니다. 이 사람하고 말하면 누구나 이 사람하고 같아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내가 이 집에 들어와 20년을 살았는데도 아직 나 닮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하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기독교인로서 어디 가서 머물든지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바라고 나와 같아지려고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적인 기독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2. 당신은 예수 이름을 생활 가운데서 얼마나 나타내고 싶어하십니까?(42)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을 받은 사도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박해를 받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사도들은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 기뻐했으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 담대히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어떠한 협박이나 매질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증거를 중지시키지 못했습니다. 변화가 있었다면 이 박해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사역을 하면서 더 큰 능력을 구하였습니다.

 

42절에 보면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당시에 성전 경비대들이 경비를 하고 있는 성전에서조차 예전과 같이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 이름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만들었을까요? 성령이 그들에게 충만하게 임했을 때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예수 이름을 자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성령충만은 다른 게 아니라 예수를 자랑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죽어가는 영혼들에 대해 불쌍히 여기고 복음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사도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날마다 교회에서 집에서 가르치고 전도하였습니다. 예수는 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담대히 전파하였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이 선포했던 설교의 핵심이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도 아직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는 사실을 나누는 믿음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신 사랑을 나누는 사랑 공동체입니다.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소망 공동체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시간과 소유가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수집해서 그것을 활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외로움과 심각한 빈곤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우리가 이민 갈 때 미국이나 호주 같은 나라에 가는 이유는 그곳에는 경제적으로 부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무서운 외로움과 끔찍한 절망, 무가치함,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웃는 법을 잊었고, 인간의 손길이 아름다움을 잊었고, 인간의 사람이 무엇인지 잊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이해하고 존중해줄 사람을 찾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랑보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 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신 그 사랑이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줍니다. 어떠한 조건이나 자격도 문제가 되지 아니하는 십자가의 사랑을 받는 순간 우리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부족한 것 때문에 더욱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사로잡히게 됩니다.

 

우리가 연약하다고 해서 십자가의 사랑은 제한받지 않습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어떤 죄를 지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중단되지 않습니다. 과거에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고 해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상실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무조건적으로 엄청난 사랑을 받고 변화된 우리는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예수의 이름을 자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에서 예수 이름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사람의 이름에 신경을 쓰다 보면 서로의 만남이 불편해지고 은혜가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는 자신의 이름이 나타나면 큰일난다는 조바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서로 영광을 취하는 우를 결코 범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나타내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어떤 것 때문에 실망하거나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과연 우리는 누구의 이름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까? 자신의 이름입니까? 아니면 예수의 이름입니까? 과연 당신의 생애는 예수의 이름만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까? 진정으로 당신은 예수의 성품, 예수의 생애를 재현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의 생애의 특징은 자신의 이름을 단 한번도 나타내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병든 사람을 고칠 때에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 사람을 찾아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하고 그를 가르치고 훈련하는 일에 1년을 사용하는 계획을 세웁시다. 그렇게 하면 1년 후에 복음을 전파하고 다른 사람을 훈련시킬 수 있는 두 사람의 성도가 생길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또 나가서 두 사람을 찾아서 가르치고 훈련하면 2년 후에는 4사람의 거듭난 성도가 생길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기가 막힐 정도로 느린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3년 뒤에는 겨우 8명의 거듭난 성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5년 뒤에는 구원받은 자가 32명으로 늘어납니다. 그 다음해는 64명이 됩니다. 당신은 구원의 주 그 이름, 예수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하여 당신의 삶을 투자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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