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좌절감(사무엘상 27장), 김덕선 목사
다윗의 자비에 의해 목숨을 건졌으면서도, 그래서 다시는 다윗을 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도, 사울은 돌아서면 다시 다윗을 잡아 죽일 궁리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자기 손으로 사울을 죽이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언젠가는 다윗이 사울의 손에 죽을 것이 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심한 두려움과 조급함에 빠지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그런 생각은 다윗으로 하여금 심한 좌절과 무력감에 빠지게 했습니다. ‘내가 언젠가는 사울의 손에 잡혀 죽게 될 거야.’
다윗이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서부터 그의 행동은 전과 같을 수 없게 됩니다. 그의 모든 판단과 결정은 자기가 언젠가는
사울의 손에 죽으리라는 결론에 근거해서 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전쟁은 시작하기 전에 승패가 결정되는 수가 많습니다. 반드시 이길 것을 믿고 싸우는 것과 싸워봤자 뻔히 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싸우는 것의 결과가 같겠습니까?
언젠가는 사울의 손에 죽을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부하들을 이끌고 광야에서 투쟁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 될 것이고, 공연히 죄 없는 부하들만 고생시킨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부하들의 수가 600명까지 늘었지만,
그 이상 늘어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다윗 편으로 구름떼처럼 몰려들어야 사울과 대항을 하든지 나라를
얻든지 할 텐데, 그럴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동족들이 다윗을 배신하고 사울에게 다윗을 밀고하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생하며 온 유다 지역을 배회하였지만, 자신의 근거지로 삼을 만한 손바닥만한 땅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도망만 다니다가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되니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울의 권력이 미치지 않는 이스라엘 영토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하들을 이끌고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갔습니다. 이 아기스는 다윗이 도피 초창기 때
찾아갔다가 미친 사람 행세를 하고서야 겨우 살아나왔던 그 아기스입니다. 결국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다윗은 적국
블레셋 왕의 수하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는 힌트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윗이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년 시절에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적장 골리앗을
때려눕히는 공도 세웠고, 지금 억울하게 사울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는 것도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집요한 사울의 추격으로부터 살아남은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 때문인 것입니다. 두 번씩이나 사울의 목숨을 손아귀에 넣었던 것이 단순히 우연에 의한 일이었겠습니까? 아니면 다윗이 뛰어난 예지력을 가졌기
때문입니까? 그것은 아무리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해도 오히려 사울의 목숨이 다윗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표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은 그런 하나님의 싸인은 보지 못하고 추격해오는 사울의 집요함에 그만
두려움에 빠져 아주 잘못된 결론과 결정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하나님의 뜻을 구했더라면 과연 블레셋 왕의 수하로 들어갔을까요?
전에 다윗이 아기스에게 갔다가 쫓겨난 후 아둘람 굴에서 세력을 규합하여 모압으로 갔었습니다. 그때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유다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삼상 22:4-5). 사울에게 쫓기더라도 유다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은 사울에게 잡혀 죽을 것이 두려워 블레셋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유다에 머무는 것이라는 것을 다윗도 잘 알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선지자에게 묻거나 에봇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그릇 행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알면서도 나의 고집과 탐욕을 따릅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께 기도가 안 나오겠지요. 기도하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실 것이 뻔하니까요. 기도를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자기주장을 하는 기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600명이었으니까 그들의 가족들을 다 합하면 2,3천 명은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가드 왕 아기스는 다윗이 이끌고 온 그 대부대를 받아줍니다. 그리고 다윗의 요청에 의해서 시글락이라는 성읍을 내줍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여기와서 한숨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권력이 미치는 이스라엘 땅을 벗어났으니 더 이상 위험하지도 않습니다. 사실 적국 블레셋에 왔으니 여기가 더 위험한 곳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블레셋에서 성읍까지 하나 얻어서 성주 노릇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 묘한 상황이 되었군요.
가드 왕 아기스는 매우 실용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는 명분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적국 이스라엘에서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받던 다윗이 찾아왔을 때, 그의 신하들은 죽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다윗은 자기들의 영웅 골리앗을 죽인 원수니까요. 그리고 다윗을 죽이는 것이 후환을 없애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기스는 두 번째 찾아온
다윗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사울을 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눈에 불을 켜고 다윗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다윗은 당연히 사울과 싸우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적의 적은 친구가 된다는 싸움판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지요. 그
래서 다윗에게 성읍까지 내주면서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사실 그 정도면 아기스로서는 최선을 다했고, 또 스스로는 다윗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에서 쫓겨났다 할지라도 이스라엘을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기스의 환대에 적당하게 반응하면서 철저하게
아기스를 농락합니다. 마치 아기스에게 협력하겠다는 식으로 완전히 아기스를 속이고 있습니다. 비록 적이긴 하지만,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을 배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기스가 좀 어리숙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다윗은 뻔뻔한
정치꾼이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다윗에게서 더 이상 정직하고 고결한 성품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처음 단추를 잘못 꿰니까 그 다음의 행동도 잘못되어 나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신뢰하기보다 자신이 처한 위험에
집중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고 자신에 대한 신뢰를 배반하면서 가드 왕 아기스를 농락합니다. 블레셋으로 간 것도 잘못이지만, 가서도 그는 음험하고 능청스러운 정치꾼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쫓기면서 고달프게 살더라도 고결한 성품을 잃지 않는 것을 선택해야 할 것 아닙니까?
편안하게 살면서 거짓말을 하고 신뢰를 배신하며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본래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거짓된 자아로 포장되어 사는 다윗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지 더 봅시다. 시글락에 자리를 잡은 다윗이 부하들을 이끌고 군사작전을 나갑니다. 목표는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의
마을들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 사람들의 마을을 침공하면 남녀를 무론하고 하나도 살려두지 않고 죽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악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 족속과 싸울 때 아무도 살려두지 말고 죽이라고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삼상 15:2-3). 그것은 하나님의 전쟁이었고 사울이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윗은 하나님의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 자신이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전쟁에서 남녀를 무론하고 다 죽이는 것은 아주 잔혹한 인간들이나 하던 일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 짓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왜 그렇게 변해버렸을까요? 그 다음에 보면 다윗이 왜 남녀를 다 죽였는지 이유가 나옵니다. 그 마을들을 습격해서 노략한 다음에 아기스에게 갑니다. 그것은 노략물 중에서 아기스에게 공물을 바치기 위해서입니다.
아기스가 묻습니다. ‘오늘은 어느 마을을 노략하였느냐?’ 그러면 다윗이 대답합니다. ‘유다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겐 사람의 네겝이니이다.’ 네겝은 유다의 남쪽 지역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네겝에 있는 유다 마을과 여라무엘 족속의
마을, 겐 족속의 마을을 노략했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여라무엘 족속은 유다 지파의 한 씨족입니다. 겐 족속은 원래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족속인데, 유다 족속 중에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삿 1:16).
그러니까 다윗이 하는 말은 유다 족속의 마을들을 노략했다는 것이지요.
그 말을 듣고 아기스는 자기 뜻대로 되어간다고 생각해서 매우 기뻐했습니다. 다윗이 자기 동족 마을을 습격해서 죽이고 노략질을 했으니 이제는 다시 자기 동족에게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영영 자기 수하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이 노린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아기스의 신임을 얻는 것이지요. 그런데 다윗이 아기스의 신임을 얻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저 자기 목숨을 보전하려는 것 외에는 말입니다. 아기스의 신임을 잃으면 거기서 죽임을 당하거나 또는
쫓겨나야 할 테니까요.
그런데 아기스에게 보고한 것처럼 유다 마을들을 침략한 것이 아니라 그술, 기르스, 아말렉 족속의 마을들을 침략한 것이거든요. 이 사실이 아기스의 귀에 들어가면 다윗은 끝장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침략한
마을 사람들을 남녀를 불문하고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버린 것입니다. 전쟁을 해서 이기면 재산은 노략하고 사람들은
잡아서 노예로 삼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짓을 자행했던 것입니다. 그토록 고결한 성품을 지녔던
다윗이 이렇게 망가져버렸다는 것이 너무 기가 막힙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애초에 발단이 뭐예요? 사울의 손에 죽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자기 목숨을 구하는 일에 전념하다 보니 다른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생각하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자기가 살겠다고 다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일삼은 다윗이 너무 실망스럽습니다.
그렇게 다윗이 1년 4개월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기쁘나 슬프나, 좋은 일에나 나쁜 일에나 시를 썼던 시인입니다. 그 시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시를 통해서 하나님과 대화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글락에 있던 1년 4개월 동안, 그는 단 한 편의 시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의 교제가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글락에 있던 이 1년 4개월을 그의 생애에서
암흑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았던 날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의지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칼과 속임수로 연명했던 비참한 시절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는 평가에 비해 이 시글락에서의 기간은 정말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윗의 좋은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성경은 이 시절의 이야기를 각색하거나 생략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자서전을 쓰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객관적인 평가에 여러분의 삶을 내맡기시렵니까? 그 두 권의 책이 발간된다면 내용이 대동소이할까요? 아니면 전혀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서로 다를까요?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서전을 써서 하나님 앞에 제출하게 된다면, 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서전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시편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시 7:9) 앞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어두운 시절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위하여 사는 인생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가난하고 고생을 하더라도, 고결하고 아름다운 성품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사는 생애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