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무화과나무를 심은 포도원 주인(눅 13:6-9, 마 21:12-22, 막 11:12-22)

liefd 2024. 6. 12.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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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가 무화과나무에 비해 몇 배가 더 중요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번제물을 태우는 나무들 가운데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 만큼은 제외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종류의 나무만은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포도주와 기름을 공급하는 나무들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무화과나무는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서 하찮은 나무로 여겨졌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무화과나무는 수없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라는 이유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는 많으면 일 년에 5회 정도까지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 나무는 사실 그해에 땅만 버리는 것이며, 귀중한 물을 낭비하는 나무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는 즉시 잘려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풍습이며 생활이었습니다. 이런 배경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어떤 포도나무 과수원 주인이 자신의 포도밭에 무화과를 심었습니다. 당시에 무화과나무보다 포도나무가 몇 배 더 중요한 나무임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포도나무 과수원에 무화과나무를 심는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포도나무 과수원 주인은 무화과나무를 심어놓고 와서 열매를 구했는데 열매를 얻지 못했습니다. 특히 주의해서 보아야 할 부분이 3년이라는 기간입니다.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거든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19:23).

 

포도원 주인은 무화과나무를 심고 면 년 뒤에 무화과 열매를 얻으려고 과수원에 찾아갔을까? 4년째일까? 아닙니다. 4년째는 첫 열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5년째가 첫 번째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찾아간 것입니다. "네 토지소산의 처음 익은 것을 가져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며(34:26).

 

5년째가 되어 찾아갔는데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사람들은 당장 잘라 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포도원 주인은 무화과나무를 잘라 내지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 포도원 주인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주인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다시 무화과나무를 심은 지 6년째 되던 해에 두 번째 방문을 했지만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이번에도 잘라내지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심하게 욕을 해댔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포도밭이 무화과나무로 인해 버려지는 것을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그 밭에 포도나무를 심어서 포도를 거두었다면 얼마나 많은 포도를 거두었을 텐데!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포도원 주인이 무화과열매를 얻기 위해서 세 번째 방문했을 때는 7년째 되던 해입니다. 7년째 되는 해는 안식년입니다. 그해는 포도밭 주인도 무화과나무 열매를 찾으러 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포도밭 주인이 무화과나무를 심어놓고 세 번째로 찾아간 것은 무화과나무를 심어 놓은 지 8년이 지난 시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무화과나무가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포도원 주인이 정신이 돌아온 듯 내가 3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어찌 땅만 버리느냐? 아마 주변 사람들은 포도원 주인을 바라보며 이제야 이 사람이 제정신이 돌아왔구나? 생각하면서 반가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복병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관원지기였습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주변 사람들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보다 더 심한 바보가 등장했기 때문입니ㅐ다.

 

예수님의 비유는 여기서 끝을 맺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려고 했던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누구에 대한 비유였을까요? 포도원은 이스라엘이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유업에서 벗어난 사람들, 이방인들이 포함됩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과원지기는 포도밭 주인의 메신저입니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해서 기다리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이 볼 때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는데 몇 년을 기다린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바보같은 기다림은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포도나무가 아니라 무화과나무를 심으신 하나님, 이스라엘을 비켜내고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잇지 못한 자들을 그 자리에 대신 심으신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들. 심한 진노로 인해 베어버릴 것을 명하는 과원지기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오늘도 여전히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들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예수님이 베디니 길에서 실제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발견하신 것은 십자가 처형 일 주일 전이었습니다. 마지막 기회는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이 무화과 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말씀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말랐습니다. 당시에 안식을 화석화되고 전통들로 뒤덮여서 사실상 죽은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잎사귀만 무성할 뿐 열매를 맺지 못하는 당시의 종교적 지도자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잎이 무성한 것을 보고 분명히 열매가 있겠구나 하고 가보았더니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 종교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기대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막 성전 안에는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전혀 없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지 않고 인간의 열정과 야망과 욕심만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매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면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같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당장 기도한다고 해서 잎이 무성하던 무화과가 하루 대낮에 말라 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계속 기도할 때 어느 순간부터 기도가 응답되기 시작합니다. 기도 응답의 시간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의 욕심을 죽이는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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