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전염병에 대한 신자의 대처(역대하 7장 14절), 김덕선 목사

liefd 2024. 6. 15.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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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준비하면서 두어 달 전에 읽은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책이 생각났습니다. 사람들의 눈이 갑자기 멀어져 가는 데 도시 전체가 어느덧 눈 먼 사람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저도 이 책을 읽다가 몇 번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하면서 눈이 먼 것이 아닌가 걱정할 정도로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의사의 아내가 눈먼 자들의 도시를 따뜻한 사회로 만드는 내용입니다. 저자는 실명과 침묵이란 장치를 통해 무책임한 윤리 의식과 붕괴된 가치관, 그리고 폭력이 만연된 현대사회를 잘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눈이 멀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저자는 이렇게 역설합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고 고발합니다. 사는 게 바빠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눈먼 사람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 눈 먼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보아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진단하십니다.

 

지난 주 공원에 가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30대 엄마가 아들에게 던진 말이 아직도 제 귀에 생생합니다. 그 어머니는 싱싱카를 타려고 하는 아들에게 헬맷을 씌우고 신발을 묶어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조심해서 타야 애. 다치면 병원에도 못가! “다치면 병원에도 못 가되뇌이며 저는 계속 공원을 걸었습니다. 가슴 아픈 말입니다. 저는 요즈음 기침을 찹느랴고 애를 씁니다. 어제 미용실에서 면도를 하는데 기침을 나올 것 같은데 참느랴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마침 누군가 제게 전화를 주셔서 받느냐 그때를 틈나 살짝 기침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대에 대해 정부가 정말 잘 대처하고 있습니끼? 위기 상황에서는 전문가의 말을 듣고 사전에 조치를 취했더라면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지 모릅니다. 한국교회는 코로나 사태에 잘 대처하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사태가 언제나 끝났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저는 코로나 사태가 언제 끝날까 보다 어떻게 끝날까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이 사태를 통해서 무엇을 얻어야 할까? 고민하게 됩니다. 처음에 설교 제목을 코로나 19 SOS로 잡았다가 너무 유튜브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전염병에 대한 신자의 대처라는 제목으로 바꾸었습니다. 과연 신자들은 전염병이 유행하게 될 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신자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신자나 불신자 모두에게 일반은총의 영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정치, 경제, 과학, 문화, 의학 예술 모든 분야에서 은혜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라 하더라도 일반은총의 영역을 죄악시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오늘의 사태에 적용해 보면 신자라 할지라도 의학적인 도움과 예방 조치에 준수하고 사회적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유럽에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사람들은 신이 내린 저주라고 생각하고 감염 원인에 대해 연구하고 치료제를 개발하지 않았습니다.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접근해야 할 것을 무시한 결과로 유럽 인구의 1/3이 죽어 갔습니다.

 

성경은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요즈음 해외에서 유학생이 한국에 오면 인천 공항에서 검사를 받고 문제가 없으면 2주 동안 자기 격리를 권장합니다. 자기 격리 2주의 원조를 아십니까? 성경에 나옵니다. 레위기 13장에 보면 피부병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자세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먼저 증상이 의심스러우면 제사장에게 찾아가서 진단을 받아야 합니다. 제사장은 그 사람의 피부병의 부위를 주의깊게 살펴봅니다. 피부 질환의 부위에 난 털이 하얗고 그것이 우묵하게 들어가 보이면 확진 판결을 내립니다.

 

이 병은 조그만 반점으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온몸에 퍼져 전신을 파괴하는 전염성을 가진 치명적인 질병입니다. 그러나 피부 부위의 털이 하얗긴 하지만 우묵하게 들어가 있지 않으면 7일 동안 격리하고 그것이 양성인지 음성인지 판독하게 됩니다, 음성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다시 7일간 격리시켜서 한번 더 진단을 받게 됩니다. 이때에 문제가 있으면 부정하다고 판결을 내리고, 문제가 없으면 음성으로 처리합니다. 간혹 음성이라고 판단했는데 나중에 증상이 나타나면 양성이라고 판결을 내립니다(13: 36). 피부병으로 확진 판결을 받으면 철저하게 격리시키고 근원을 막는 것을 보게 됩니다(13:46).

 

제가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전염병의 역사와 대처 방안에 대한 자료를 보면서 많은 사실을 빌견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전염병은 교통의 발달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움직인다는 사실입니다.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고 중국까지 가는데 10년이 넘게 걸렸다면, 사스는 홍콩의 비행기를 타고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전 세계 30개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코로나는 어떻습니까? 전염병은 밀집되어 있는 도시나 나라가 취약하고 의료 환경이 열악한 상황에서 더 창궐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레위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교훈이 있습니다. 세균의 감염을 막기 위해 격리시키고 과감하게 차단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전염병이 유행할 때에 일반은총의 영역에서의 대처를 잘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특별은총의 영역에서 대처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전염병이 유행할 때에 성경을 통해 주신 교훈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출애굽기 53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이 애굽의 바로 왕에게 찾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흘길쯤 광야에 나가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그것을 자꾸 막으면 하나님께서 전염병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렵습니다.

 

 

전염병에 대해 신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역대상 2114절에 보면 다윗이 사탄의 유혹을 받아 인구 조사를 실시하게 됩니다.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 것입니다. 다윗 왕의 이런 교만으로 인해 전염병이 돌아서 사망자가 무려 7만 명에 이르게 됩니다. 다윗은 이러한 재앙을 만날 때에 어떻게 했을까요? 로마의 황제 네로는 방화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의 탓으로 돌리면서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은 하나님께 철저한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역대하 2117절입니다. ”하나님께 아뢰되 명령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나이니이다 이 양떼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데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하니라.“지도자는 나라의 위기가 발생했을 때 자신을 돌아보고 민족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전염병이 유행할 때에 신자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역대하 713절에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 전염병이 유행할 때에 이렇게 대처하라고 하십니다.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네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본문 전후의 맥락을 잠깐 말씀드리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역대하 6장은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전염병이 유행할 때에 이렇게 대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14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먼저 우리는 악한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주지 못하고 물질과 쾌락의 우상 숭배의 악한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많은 젊은이들을 이단도 아닌 사이비 종교집단에 빼앗긴 잘못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보여주지 못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자화자찬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각자가 잘못한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지극히 겸손해져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잘못 대처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높이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잘했다고 착각할 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위기 가운데서도 은혜를 보여주시는 것은 우리의 실상을 제대로 보고 돌아오라고 하는 싸인입니다. 지금은 유리가 잘한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낮추어 겸손히 자신을 돌아볼 때입니다.

 

저는 코로나 사태가 언젠가 끝나겠지만 그 이후 다가올 정치적 위기, 경제적 위기, 교회의 위기에 대해 걱정이 됩니다. 이 사태가 끝났는데도 교회에 가서 구태여 에배를 안드려도 영상예배를 드려도 된다는 방향으로 흐를까봐 고민이 됩니다. 우리는 사회적 거리두기는 실천하되 하나님과 거리 두기를 두면 안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교회를 가까이해야 하는데 멀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게 됩니다. 정말 어려운 상황에서 값비싼 교훈을 발견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뼈저리게 느끼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서는 마음의 문이 열리게 하고 죄에 대해서는 마음의 문이 닫히게 합니다. 우리는 다른 방법을 찾을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찾을 때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역대하 715-16절입니다. “이제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전염병이 유행할 때에 우리는 합심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고쳐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코로나의 확산을 막아주셔야 합니다. 최대한 우리가 감염 수칙과 에방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악한 것에서 떠나서 스스로 낮추어야 합니다.

 

지금은 기도로 하나님의 얼굴을 찾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을 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용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십니다. 마치 시계의 톱니바퀴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뤄 시계를 작동시키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존 낙스의 기도가 생각납니다.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더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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