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은 후 어떻게 되는가(눅 16:22-24), 김덕선 목사
제가 중학교 때 재수하고 경남고등학교에 시험에 응시했다가 떨어지는 쓰라린 아픔과 더불어 삶의 포기하기 위해 광안리 해수욕장 바닷가로 들어갑니다. 점점 바닷물이 차오르는 순간 불현듯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렇다고 고통이 끝난 줄로 아느냐? 영원한 고통이 사작되는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면 어떻게 할래. 지옥은 없는 거라고 뿌리쳐 보지만, 만약 지옥이 진짜 있다면 어떻게 할래! 그때는 이미 늦은 거라구.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감사한 것은 그때 깨닫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생활에 부담에 짓눌리고 삶의 버팀목이 무너지는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정말 죽으면 모든 것이 편안해질까? 이 순간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가 아마 더 살기로 한 결정일 것입니다. 문제는 모든 것을 끝낸다고 고통을 멈출 수 있을까요? 이것은 고통의 끝이 아니라 고통의 시작입니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잘 살아볼까에 대한 관심보다 죽음을 준비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로켓발사할 때 카운트 다운하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ten, nine, eight, seven, six, five, four, three, twi, one, zero. 우리 인생의 남은 날을 계수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매일 코로나 확진자 숫자가 늘어나는 것에 대해 걱정하고 불안해 합니다. 코로나 확진자가 몇 명이 늘었는지, 사망자가 몇 명인지 확인하면서 안타까와 합니다. 이런 혼란하고 어수선한 시대에 구원의 확신자가 더해지기를 소원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눈물의 기도가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합니다.
어제도 저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흔들리는 대한민국을 살려 주옵소서. 비틀거리는 한국교회와 우리 교회를 살려주옵소서. 국내 기업과 외국에 수출하는 기업의 길이 속히 열리게 하옵소서. 갑자기 죽어가는 사람이 속출하는 저 북녁 땅을 살려주옵소서.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어가는 전 세계의 사람들을 살려주옵소서!
신천지에서는 자기들 집단에 14만 4천명 안에 들어온 숫자만 천국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7장 4절에 보면 인맞은 숫자가 14만 사천명이 나옵니다. 14만 4천명이 누구인가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로 해석합니다. 순교당한 사람들, 이스라엘 백성들, 구원받은 사람들의 상징적인 숫자들. 신천지에서는 14만 사천명을 순교당한 영혼으로 해석합니다.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14만 4천명의 순교지들의 영과 신천지에 들어온 14만 4천명의 육체와 합일하여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천지의 이만희 교주는 어떻게 됩니까?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예수님의 영과 이만희의 육체가 합일한다는 것입니다. 재림하시면 들이 영혼합일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만희 교주가 먼저 죽으면 종교 사기가 들통나게 됩니다.
신천지 교리는 너무나 잘못된 교리입니다. 순교당한 자들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7장 9절에 보면 각 나라와 족속 가운데 셀 수 없는 수많은 무리가 천국에 들어갑니다. 다른 사람들의 육체와 영혼이 결합한다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없는 엉터리 교리입니다.
각 사람과 영혼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결합되는 것입니다. 단지 에녹같은 몇 사람만 죽음을 보지 않고 들림 받았습니다(히 11:5).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경험한 사람들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한 순간에 변화됩니다. 예수님이 공개적으로 재림하실 때에 먼저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그 다음에 살아남은 자도 변화된 몸으로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됩니다(살전 4:16-17, 고전 15:51-52).
혹시 중간 상태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습니다.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히 9:27). 죽음은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육체적 죽음으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 죽음을 말합니다.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모든 사람들의 육체가 변화되고 영혼이 결합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각자가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때 불신자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이를 둘째 죽음이라고 합니다.
첫째 죽음과 둘째 죽음 사이의 기간, 즉 신자들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을 중간상태라고 부릅니다. 즉 신자들의 죽음과 부활 사이가 중간상태입니다. 이 기간은 신자의 경우에는 현재의 상태보다 훨씬 더 축복된 상태입니다. 빌립보서 1장 23절입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사람이 죽으면 지옥에 갑니까, 아니면 음부에 갑니까? 사람이 죽으면 낙원에 갑니까? 아니면 천국에 갑니까? 그러면 언제 천국과 지옥에 갑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함께 못 박혔던 우편 강도는 천국에 갔을까요? 낙원에 갔을까요? 누가복음 23장 43절에 보면 그는 낙원에 갔습니다. 종로 5가 낙원상가에 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세상과 재물에 집착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기 위해 주신 비유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거지 나사로도 죽었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누가 먼저 죽었을까요? 거지 나사로가 먼저 죽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죽은 후 어디로 갔을까요? 그는 천사들에 의해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갑니다. 아브라함의 품은 낙원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2-4절에 보면 낙원은 사도 바울이 본 세 번째 하늘을 가리킵니다. 나사로는 천사들이 거하는 하늘에 들어가 아브라함과 가까이 교제하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면 부자는 죽은 후 어디로 갔을까요? 본문 23절에 보면 부자는 음부에 가서 고통 중에 있습니다. 나사로는 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는 왜 음부에 갔을까요? 부자이기 때문에, 아니면 그런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와 가난이 죽은 이후에 어디로 가는지를 좌우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누리면서 사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잔치를 벌이면서 즐겼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거나 영혼의 때를 위하여 준비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부자가 음부에 가서 후회하는 것을 보면 자신이 계속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건가 위기 의식을 느꼈지만 기회를 놓쳤습니다. 회개란 삶의 방향을 자신에게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삶의 질이 중요하지만 삶의 방향이 더욱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그의 인생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이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입니다. 믿음의 기초 위에 모든 것을 쌓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후회를 하게 됩니다.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대문 앞에서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었습니다. 부자의 식탁에 앉은 자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음식을 땅 바닥에 던진 것으로 배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거리를 돌아다니는 개들이 나사로의 헌 데를 핥고 있었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특별히 뭘 잘했다는 언급도 없습니다. 다만 나사로란 이름의 뜻이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입니다. 그가 죽은 후 낙원에 들어간 것을 볼 때 그는 세상적으로는 힘들게 살았지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나사로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도와주신다’입니다. 그의 인생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그분만을 의지하며 살아갔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 함께 기도해야 기도는 변화가 나타나고 역사가 나타납니다. 적어도 하루에 한 시간씩은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미국의 성도들이 한국에 있는 성도들을 도와야 한다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할 때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에게 찾아가서 한국을 도와야 한다고 부탁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그래서 미국 군대의 참정이 신속하게 이루어져서 위기를 극복했다고 합니다.
자녀 문제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자녀들의 아픔을 바라보면서 부모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십니까?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나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부모의 신앙을 돈독하게 하려고 자녀에게 고통을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가 회개하고 돌이켜서 믿음 안에서 바로 설 때에 자녀들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와 영혼은 어떻게 될까요?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땅에 묻혀서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이 하나님이 정한 곳으로 가게 됩니다. 결코 떠돌아 다니지 않습니다. 전도서 3장 20-21절입니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후에도 영혼은 하나님이 정한 곳으로 갑니다. 죽은 후에도 사람의 영혼은 의식이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부자는 나사로를 알아보고 자신들의 형제들이 아직 살아있어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죽은 후 신자들의 영혼이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있고 그분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10절입니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나사로와 같이 신자들은 죽은 이후에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 더욱 풍성하고 복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신자에게는 죽음이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니라 사모하게 됩니다.
재침례주의자와 안식교 등은 중간상태에서의 ‘영혼 수면설’을 주장합니다. 개인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그 영혼은 무의식적인 수면상태에 들어가고, 부활하여 천국에서 그 영혼이 깨어날 때 비로소 인격적인 의식상태를 회복하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부자와 나사로는 죽은 후에 두 사람 모두 분명한 의식상태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천주교에서는 이 중간 상태를 연옥으로 연결시킵니다. 이생에서 완전한 거룩함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연옥이라는 장소에서 불의 형벌을 받아 정화된다고 합니다. 더구나 후손들이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좋은 데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 여부는 이 세상에서 믿느냐, 믿지 않느냐로 결정됩니다. 사람이 죽은 이후에 후손들이 선행을 쌓으면 음부에 있던 부모의 영혼이 낙원으로 옮겨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연옥 교리는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잘못된 교리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가 있지만 죽은 이후에는 기회가 상실됩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연옥 교리를 만들어서 이 세상의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들이 연옥에 가있는 자를 위해 미사나 헌금, 각종 교회 봉사를 행할 때 그는 점차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진다고 있다고 가르치는데 이는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잘못된 교리입니다. 인간의 죄는 연옥의 불과 고통에 의해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됩니다(요일 1:7).
아마도 부자는 죽은 후에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을 것입니다.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죽음 후에 공동묘지와 같은 곳에 버려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영혼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부자의 영혼은 음부로 가게 되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 즉 낙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음부과 낙원은 인간이 죽은 후 부활되기 이전에 머무르는 중간 상태의 처소를 말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음부 아니면 낙원으로 가게 됩니다
부자와 같이 불신자는 죽는 즉시 고통의 장소, 음부로 가게 됩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입니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육체가 없는 상태에서 그 영혼이 고통을 받게 됩니다. 죽은 자의 영혼은 반드시 어떤 곳에 존재합니다. 불신자들은 죽자마자 고통의 자리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게 됩니다. 음부는 지옥과 동일한 곳이 아닙니다. 지옥은 마귀를 위하여 예비된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이 있는 장소입니다(막 9:43-47; 마 18:8,9, 계 21:8). 거짓 선지자, 사탄, 사악한 자들은 현재 무저갱에 갇혀 있습니다(눅 8:31, 계 20:1-3).
나사로와 같이 신자는 죽는 즉시 영광의 장소, 낙원으로 가게 됩니다. 부자는 죽어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음부로 갔지만, 나사로의 영혼은 들려서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23절). 신자는 죽은 이후에도 예수님이 주신 생명을 잃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부자와 나사로는 죽은 이후에도 자신들이 이 땅에서 누구였으며 무엇을 겪었는지, 그리고 어떤 환경에서 살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 때에 자신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행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사람은 다시 부활하여 최후의 심판에 있게 됩니다. 각 사람이 행한 대로 다 갚아 주십니다. 이때 음부에 있던 사람들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됩니다. 낙원에 있던 사람들은 천국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낙원과 음부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어서 서로 왕래할 수가 없습니다.
부자는 나사로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 그의 다섯 형제에게 찾아간다면 그들이 확실히 믿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나사로를 자기 형제들에게만 보내는 것은 이기적입니다. 세상에서 모세와 선지자와 같은 주의 종들이 가르치는 말씀을 통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설령 죽은 자가 살아났다 하더라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적을 보고 믿으려고 하는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결국에는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났는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구원받은 사람인가 확인해야 합니다. 신자는 항상 종말을 준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아직도 주님을 믿지 않는 식구와 형제와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지금도 음부에서 제가 믿지 않는 내 식구들이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 누군가를 보내 알려달라는 부자의 절규를 들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