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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

liefd 2024. 1. 22.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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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조차 희망으로 승화시킨 인간 존엄성의 승리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욱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행복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으며 성공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에 무관심함으로써 저절로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원하는 대로 확실하게 행동할 것을 권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얘기하건대 언젠가는!-정말 성공이 찾아온 것을 보게 될 날이 올 곳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성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고통을 주는 혼란의 원인을 서로 모순되는 무의식적 동기에서 비롯된 불안에서 찾았다.

반면에 프랭클은 신경질환을 여러 형태로 분류한 다음, 그 원인이 환자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와 책임을 발견하지 못한 데에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가 성적인 욕구불만에 초점을 맞추었던 반면에 프랭클은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프랭클 박사는 다음과 같은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믿음을  상실하면 삶을 향한 의지도 상실한다.

 

정신의학에 보면 소위 집행유예 망상이라는 것이 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가 처형 직전에 집행유예를 받을지 모른다는 망상을 갖는 것이다.

 

인간은 어떠한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

 

절망이 오히려 자살을 보류하게 만든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가장 자주 꾸는 꿈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빵과 케이크와 담배 그리고 따뜻한 물로 하는

목욕이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 안에서, 그리고 사랑을 통해 실현된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삶을 의미있고 목적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수감자 중에서 아주 적은 사람만이 충만한 내면의 자유를 지키고, 시련을 견딤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치를 얻었다.

 

평범하고 의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비스마르크의 이 말을 들려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 새 통증이 끝나있는 것이다."

 

일에 대한 기대가 삶의 의지를 불러 일으킨다.

 

스피노자가 그의 윤리학에서 무엇이라고 했던가?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죽음을 부른다.

 

꽤 유명한 작곡가이자 작사가였던 그가 어느 날 나에게 고백했다. 꿈에서 어떤 목소리가 소원을 말하라는 거예요?

나를 위해 이 전쟁이 언제 끝날 것인가 물어보았지요? 나를 위해 이 전쟁이 언제 끝날 거인가 물어보았지요?

그래 꿈 속의 목소리가 뭐라고 대답합디까? 그가 내 귀에다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330일이래요?

그는 희망에 차 있었고, 꿈속의 목소리가 하는 말이 맞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약속한 날이 임박했을 때

우리가 자유의 몸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329일 그는 갑자기 아프기 사작했고, 열이 아주 높게 올랐다.

330, 그는 헛소리를 하다가 그만 의식을 잃고, 331일에 죽었다.

 

수용소 주치의의 말에 의하면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에 이르기까지 일주일간의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했던

것이다. 그것은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그들이 처한 끔찍한 현실을 어떻게든 견딜 수 있는 힘을 주기 위해 그들이 살아야 할 이유-목표를 얘기해 주어야 한다.

시련 속에 무엇인가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동기는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내세우는 것, 즉 삶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니체의 말을 인용했다. “너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

 

로고 테라피는 환자의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말하자면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는 말이다.

 

로고스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다. 로고테라피 혹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빈 제 3정신의학파로 불리우는 이 이론은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물론 그 의미를 찾아나가는 인간의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다.

 

몇 년 전에 프랑스에서 설문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그 결과 89퍼센트의 사람들이 인간에게 살아야 할 의미를 주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왔다.

존스 홉긴스 대학교에서는 사회과학자들이 48개 대학 7,948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통계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설문에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16퍼센트의 학생들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대답한 반면,

78퍼센트는 첫 번째 목표가 자기 삶의 목표와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로고테라피는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는 것을 그 과제로 삼고 있다.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좌절된 곳에서 쾌락을 추구하는 의지가 대신 자리 잡는 경우도 있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그리고 그 사랑을 사랑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인간의 주돤 관심이 쾌락을 얻거나 고통을 피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데에 있다는 것은

로고테라피의 기본 신조 중의 하나이다.

인간은 조건 지워지고 결정이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란 간단히 말해서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세 개의 비극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계속 낙관적일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세 개의 비극적인 요소는 인간의 삶을 제한하는 1) 고통과  2) 죄와 그리고  3) 죽음을 말한다.

 

비극 속에서 낙관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조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낙관이란 비극에 직면했을 때 인간의 잠재력이 1) 고통을 인간적인 성취와 실현으로 바꾸어 놓고

2) 죄로부터 자기 자신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며

3) 일회적인 삶에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동기를 끌어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행복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공동의 목표가 생기자 마자 그들은 자신들이 달성해야 할 목표의 도전을 받았고, 그래서 서로 협동하게 되었다.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듯이 사람이 삶의 의미에 도달하는 데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일을 하거나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두 번째는 어떤 것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을 통해서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의미는 일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로 돌아가는 세 번째 길이다.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무력한 희생양도 그 자신을 뛰어넘고 그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다.

 

산틴 교도소에 있는 수감자들 앞에서 강의를 할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인간입니다. 인간으로서 죄를 짓고 죄인이 되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죄를 딛고 일어나 자기 자신을 초월해서 성장하고,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됨으로써 그 죄를 극복해야 할 책임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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