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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눅 9:59-62)

by liefd 2024.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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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공인된 거짓말이 몇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자리를 양보 받은 노인이 에구, 괜찮은데라고 하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중국음식집에서 출발했어요. 금방 도착해요라고 하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대학 수석 합격자가 그저 학교 수업만 충실히 했을 뿐이에요라고 하는 것도 그 하나입니다. 음주운전자가 딱 한 잔밖에 안 마셨어요라고 하는 것도 그 하나입니다. 간호사가 이 주사 하나도 안 아파요라고 하는 것도 그 하나입니다.

 

그리고 옷가게에서 어머, 너무 잘 어울려. 맞춤옷 같아요라고 하는 것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많이 사용하는 말 가운데 딱이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옷가게에 가면 이 옷 아줌마 꺼네라고 합니다. 딱 맞는 옷이라는 말입니다. 그 말에 속지 마세요. 그러나 정말 그 옷에 딱 맞는 사람, 그 나라에 딱 맞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맞춤형이란 말도 많이 씁니다. 그 사람에게 적합한 상품이나 물건을 만들어준다는 뜻입니다. 맞춤형 복지, 맞춤형 교육, 맞춤형 보험까지 있습니다. 나에게 딱 맞는 상품이나 물건이 있다면 이것도 참 좋은 일입니다.

 

한국여자 골프는 왜 강한지 아십니까? 1988년 최초로 미국 LPGA에서 우승한 한국인은 당시 32세의 구옥희입니다. 지난주에는 미국 최고 권위의 US 오픈에서 지은희선수가 우승을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LPGA에서 한국계선수가 82승을 하였습니다. 지난해에는 한국선수들이 LPGA 9승을 하였습니다. 신지애 선수는 지난해에 3승을 하여 통산 9승을 하였습니다. 신지애선수는 목사님의 딸이어서 더욱 관심이 갑니다.

 

한국 여자선수들이 골프를 잘 하는 것은 한국 특유의 올인 문화가 그 원동력이라고 합니다. 부모의 극성도 한 동력입니다. 그래서 피겨맘이란 말도 있고, ‘골프 대디라는 말도 있습니다. 골프는 90%가 멘탈 게임이라고 합니다. 테니스, 육상, 수영 등은 체격이나 체력이 서양인을 따라잡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골프는 정신력이 체력보다 더 강조됩니다. 골프는 힘과 섬세함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프는 비교적 체격이 적은 한국여성에게 적합한 스포츠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적합한 운동, ,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을 찾는 것은 중요한 성공의 요건입니다. 여자 양궁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감각적인 손기술이 양궁을 잘 하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의 손은 양궁에 딱입니다.

 

시편 96:8에는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라고 합니다. 합당하다는 말은 적합하고 그 이름에 어울리는 영광이란 뜻입니다. ‘합당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유데토스라고 하는데 잘 놓여 있는’, ‘적합한’, ‘순응하는이란 뜻입니다. 우리 모두가 천국에 잘 놓여 있는 적합하고, 순응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자가 합당한 자입니다.

 

60절에는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를 말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전파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이유입니다. 왜 하나님의 나라 전파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일일까요?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한 자들이 오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는 이 문구는 누가만의 것입니다. 누가는 회개의 긴박성으로부터 전도의 긴박성으로의 바꾸어갑니다. 신앙인의 최고의 의무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기 위한 핵심이 하나님의 나라 전파입니다.

 

각 시대마다 시대에 합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모세는 광야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갈 때는 모세가 아니라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엘리야 시대가 끝나고 엘리사 시대가 됩니다. 예수님이 하늘나라로 가시자 사도들이 예수님이 남기신 일들을 대신 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시대적 인물을 따로 준비하시고 그 시대에 적합한 인물들을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는 예나 지금이나 합당한 인물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은 교회의 본질적 사명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입니다.

 

다니엘 12:3에는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을 돌아오게 한 자가 누구입니까? 전도자입니다. 전도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전도자가 지혜 있는 자보다 더 빛이 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빛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죤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는 교회는 단순히 화해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기만 하는 장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신문사나 방송국은 소식을 받아 전해 주는 곳이지만 교회는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그 말씀 때문에 몰려드는 장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전혀 새로운 사회적 완전체를 이루는 곳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이며 역사에 의미를 세우는 일입니다. 교회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시편 118:17에는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살 권리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죽을 자격이 있습니다. 살아서 무엇을 합니까?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국민일보에서 한 설문조사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내가 해본 가장 좋았던 전도방법은?’이란 설문에 만날 때마다 전하고 힘들 때 기도해주기, 맛있는 음식 함께 먹기, 성경 등 문자 메시지로 보내주기 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보기가 가장 중요합니다. 어떤 특별한 기술보다 전파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전파에 대한 관심입니다. 전파에 대한 열정과 간절함입니다. 열정과 간절함이 있으면 누구나 전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 소식을 전파하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는 관문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이 오래 전에 미국에서 공부할 때에 교회에서 학교가 있는 곳까지 주일 저녁이면 장시간 운전을 해야 하는데 너무 피곤하여 졸음이 왔다고 합니다. 사모님과 함께 오면서 좋은 졸음방지법을 개발했습니다. 어떤 한 사람을 정해놓고 계속 험담을 하면 졸음이 싹 가신다고 합니다. 물론 장난삼아 한 말이겠지만 사람들은 남의 얘기를 하면 자던 잠도 깹니다.

 

험담은 어떤 사람의 정보를 남에게 전파하는 것입니다. 험담전파는 열심히 합니다. 남의 험담은 너무 재미있습니다. 돈 안들이고 제일 재미있는 것이 험담이랍니다. 험담을 전파하는 것만큼 열정과 재미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면 아마 하나님의 나라가 금방 확장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다고 합니다.

 

2. 하나님의 나라가 최우선인 자가 합당한 자입니다.

 

62절에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 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데 첫째 사람은 아버지를 먼저 장사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둘째 사람은 자기 가족과 먼저 작별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 하니라고 하십니다.

 

아버지 장사는 가정적, 종교적, 사회적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의무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율법을 공부하는 것보다,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보다, 유월절에 제사드리는 것보다, 할례를 시행하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를 장사지낸다는데 반대할 수 없는 적절한 명분입니다. 그런데 세상 나라의 명분은 하나님 나라의 명분과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로 하여금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장사지내게 하라는 것입니다.

 

가족 작별은 집을 나가지 전에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아무 말 없이 나가면 금방 실종 신고라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작별인사를 하면 인사하는 중에 만류할 수도 있습니다. 인사하다가 발목이 묶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학생이 쓴 불평의 글이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집을 나가면 출가라 하고 내가 집을 나가면 가출이라 한다.’ 그렇습니다. 가출은 가족에게 연락하지 않고 집이 싫어서 나갈 때를 말합니다. 출가도 가족에게 연락하지 않고 나가는 경우가 있겠지만

집이 싫어서 작별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카를로 카레토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창세기 22장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게 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사라와 의논하지 않습니다. 만약 사라와 의논했다면 사라가 분명히 말렸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발목을 잡혔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각은 아들이나 아내보다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세상일보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 우선 돼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제일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할 때에 하나님 나라 제일주의로 세상의 일을 뒤로 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아픔을 동반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삶에 최우선이 되지 않으면 결코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최우선이 되지 못하면 전도하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 향기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편지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최우선이 되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 우선법칙을 잘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라는 말은 농경문화의 산물입니다. 기원전 80년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드(Hesiod)의 말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것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자의 유일한 목적은 밭이랑을 곧게 가는 것입니다. 밭이랑을 매면서 뒤를 돌아보면 이랑이 곧게 될 수가 없습니다.

 

제자의 삶에 바른 동기는 무엇입니까? 57절에 보니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이 말은 제가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라는 말입니.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58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네가 나를 따르려하면 집도 없는 존재가 되고 머리 둘 곳도 없는 존재가 될 텐데 그래도 나를 따르겠느? 하시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는 한 치의 땅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들이 자신을 높이고 위하고 성공 시키는 데 모든 자원들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는 털끝만큼도 안 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는 아무것도 안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인간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따르겠다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를 따르겠다는 것은 선생인 나도 이 세상에 있을 곳이 없는데 너 또한 그렇게 하겠느냐?” 하는 것 입니다. 러므로 제자들이 주님을 쫓겠다하면서도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성공시키는데 동기를 둔다면 그런 동기는 성공할 수 없는 동기입니다. 주님을 쫓는 동기가 이기적인 목적과 세상적인 야망을 달성하고 주님을 이용해서 세상적인 욕구를 충족해본다면 그 사람의 동기는 성공할 수 없는 동기입니다. 주님을 쫓는 동기는 하나님을 높이고 성공시키는데 두어야 주님도 바르게 쫓게 되고 그 사람의 동기도 성공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쫓는 제자는 먹을 것 마실 것 다 포기하고 머리 깍고 산으로 들어가는 금욕주의를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기독교는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우리는 먹을 것 입을 것 다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동기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높이기 위한 동기를 가지고 따라가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은 저절로 따라오게 해주십니다. 하지만 내가 주님을 이용해서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해결하겠다는 동기를 갖게 되면 그것도 해결을 못 받고 주님도 따르지 못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부모로써 자녀가 있는데 자식이 부모의 재산을 탐내서 자녀가 부모의 재산을 뺏을 동기로 부모를 가까이한다는 것을 그 부모가 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자녀에게 부모가 재산을 주겠습니까? 반면에 자녀가 그 부모를 사랑하고 높이고 그 은혜에 감사해서 늘 가까이 한다면 그 부모는 없는 것도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 중에 저에게 이런 말 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교수님 제가 유학 갔다 돌아오면 교수자리 하나 주시겠습니까?”하고 물어봅니다. 그런 학생에게는 돌아보시며 꾸짖으시” 55절 말씀이 적용됩니다. 저는 그런 학생에게 아주 혼을 냈습니다. “네가 지금 공부하러가면서 나중에 밥 먹을 것을 걱정하느냐? 네가 하나님 앞에 그릇을 넓히고 키우면 주께서 축복하셔서 너를 교수로, 목사로, 선교사로 그 그릇에 합당하게 쓰시는 것이지 벌써부터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느냐? 유학 가는 동기가 잘못되었다!” 라고 혼을 냈습니다.

 

주께서 나를 주의 일에 어떻게 쓰임 받고 어떻게 훈련해서 나를 키울까 생각하는 자에게 학위도 잘 마치고 교수로도 목사로도 선교로도 쓰시는 것입니다. 쓰시는 분은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그릇을 넓이고 먹든지 마시든지 주께 영광 돌리도록 이러한 궁극의 동기를 가지고 있어야 주께서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주님을 높이는 동기를 갖아야 합니다.

 

3. 바른 우선순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삶의 우선순위는 무엇입니까? 5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1절에는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주님을 쫓되 조건이 많습니다. 부친을 장사하고 또 한사람은 가족에게 작별을 하고 오겠다고 합니다. 부친을 장사하는 사람은 부모에게 사은생활을 하는 것이고 가족에게 작별한다는 것은 가족에게 의무생활을 하는 것인데 이것은 필요하고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은 제자로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선순위(priority)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된 사람은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제 1 우선순위로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와 가족과 형제와 이웃을 제 2 우선순위로 두어야 합니다. 성격에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 주일인데 하나님께 나와 예배를 해야 할 의무와 친척 결혼식 참석의 의무가 충돌된다면 여기 나온 두 사람은 친척 결혼식에 갈 것 입니다. 기도할 시간과 밥 먹을 시간이 충돌될 때 언제나 밥을 먼저 먹고 기도시간을 뒤로 합니다. 런 사람은 우선순위에 문제가 있고 예수님 제자에 합당치 않습니다.

 

어떤 이는 기독교는 이상한 것 가르치네. 가족으로 의무생활을 하지 말란 말입니까?”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엉터리입니다. 부모 살아계실 때 용돈 한번 안 드리고 불효하다가 돌아가시면 제사를 지낸다고 폼을 잡습니다. 돌아가신 분이 무엇을 드십니? 이것은 부모를 제대로 모시는 것도 아니고 가족에 대한 의무를 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제 1 우선순위로 살아가는 사람이 부모에 대한 사은생활도 잘하고 가족에 대한 의무생활도 잘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언제나 순서가 바뀌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제 1호로 사랑하고 부모와 가족을 제 2호로 사랑하라이것이 변함없는 순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제자는 바른 소원을 품고, 바른 목표를 세우, 바른 동기를 갖고, 바른 우선순위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크리스천이라 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를 닮았다는 뜻입니다. 초대 교회 때 안디옥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

의 제자를 볼 때 예수님을 닮아서 예수 닮은 사람들이란 뜻으로 크리스천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어느 교회에 폼만 잡고 나서기 좋아해서 성도들에게는 인심을 잃은 한 집사님이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물어봅니다. “얘들아 사람들이 날보고 왜 크리스천이라고 부르는지 아니?” 이 집사님이 기대했던 대답은 집사님이 예수님을 닮아서겠지요, 아이들의 대답은 아마 집사님의 실상을 몰라서 그래요라는 확인이 안 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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