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세상살이가 힘들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예 “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했습니다. 신자라고 하지만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신자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고 세상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교회에 와서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세상에 나아가서는 그래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세상의 일이 잘 풀리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그렇다고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다가 세상의 일이 꼬이기 시작하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이와같이 신자들은 세상에 대해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기 쉽습니다. 과연 우리는 세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하는 말씀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죄악시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을 도피하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맺고 끊는 것이 너무 분명한 신자들 가운데 세상에 적응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면 세상에 대한 의욕이 떨어지고 세상에 나가면 교회에 대한 의욕이 떨어지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 빨리 오시기만을 기다립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주님이 빨리 오시면 큰일 납니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상급이 별로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행한 대로 갚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과연 적입니까?
‘세상적이다’, ‘인간적이다’라는 말을 우리는 종종 사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평가의 기준이 다분히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의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가정에 심방갔다가 벽에 걸려있는 가족사진을 보고 ‘세상적’이라고 했습니다. 속리산 법주사에서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어떻게 신자가 절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느냐는 지적이었습니다. 교회에 나온지 얼마 안되는 그 가정의 주부는 어쩔 줄 몰라했다고 합니다. ‘세상적’이라는 말에는 이 세상을 적으로 보려는 의식이 다분히 깔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상’이란 우주 만물이나 가족 관계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이나 사업과 같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일들에 종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정부나 공공기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요 3:16).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자연과 신비한 세계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인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 세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세상에 동화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 보다 그가 만든 피조물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롬 1:23).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셨는데 사람은 세상에 집착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동시에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는 그것이 가능한 것같은데 어떻게 될 수 없는 것일까요? 본문 15절에 보면 그것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을 못박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속에 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그것을 사랑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 마음에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옳지 못하고 이기적인 방향과 동기를 지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다음에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당분간은 조금 하나님을 멀리 한다 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온 것이 아니면 거기에는 반드시 휴유증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하여 우리가 그들처럼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속지 마십시오. 우리가 세상과 다를 때 세상에 대하여 분명한 증거를 하게 됩니다.
세상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따라가는 것은 위험입니다. 성경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런 생각없이 그대로 따라 가면 안됩니다. 세상의 급류에 떠내려 가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좇아 거슬려 올라 가야 합니다. 야고보서 4장 4절에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일까요? 본문 16절에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이나 다 어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정욕이란 단순한 욕구가 아니라 지나친 욕구나 애착을 가리킵니다. 만약 우리가 배가 고파지는 것은 본능이므로 탓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먹기 위해 산다면 육신의 정욕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먹는 것이 남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먹는 것에 집착한 상태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육신의 요구대로 살아가는 삶, 본능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음란과 방탕과 술취함 등입니다. 믿는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생활을 계속 행한다면 하나님께서 나중에 그 마음에 상실한 대로 내어버려두십니다.
그런데 육신의 정욕을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가 안목의 정욕입니다. 시간은 인간의 상상력을 극대화시키며 그대로 뇌신경에 전달해 주기 때문에 그 자극도가 매우 강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안목의 대표적인 예는 선악과를 바라보는 하와의 눈(창3:6). 하와가 선악과를 바라보는 순간에 왜 그러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는지. 여자는 먹는 것, 입는 것을 눈으로 바라볼 때 죄를 짓기 쉽습니다. 여자는 대개 분위기에 약합니다. 언제나 세일즈 맨들이 여자 고객을 일차적으로 공략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반면에 남자 또한 안목의 정욕에 빠지기 쉽습니다. 다윗은 목욕하는 밧세바를 내려다 보다가 그만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남자들은 특히 여자를 바라보다가 죄의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남자가 아름다운 여자를 바라볼 때 한번 더 보고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단지 세 번 이상 계속해서 바라 보고 정신을 못차리고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면 바로 그것이 음란입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바라 보면서 불필요한 생각이나 해서는 안되는 생각을 하는 것 역시 안목의 정욕에 해당합니다. 단순히 나타난 결과만을 가지고 추측하거나 지나친 상상에 빠지는 것은 위험합니다.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홧김에 불을 질러 자기 가족을 죽이는 경우 역시 안목의 정욕에 해당합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도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실 때 사단은 사람들을 충동시켜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여주면 우리가 믿겠다고 했습니다. 현대인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내면적인 것보다는 일단은 외형적인 것에 신경을 쓰는 추세입니다. 일단은 보기에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바라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은 올라간 높이를 바라보지만 하나님께서는 헤쳐나온 깊이를 바라보십니다. 사람이 지나치게 외형적인 것에 치중하다 보면 나중에는 결국 허망한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안목의 정욕은 결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생의 자랑으로 이어집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없는 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여자보다는 남자에게 그런 욕구가 훨씬 더 강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성공하려고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자랑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식을 자랑하고 싶은 충동 때문에, 아내는 남편을 자랑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남편은 직장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그렇게 고생하고 있는 모릅니다. 특히 다른 사람보다 지나치게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가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생의 자랑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게 됩니다. 이 생의 자랑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생의 자랑은 곧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더 이상 우리 안에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축복은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결국은 다 지나가고 말기 때문입니다(16절). 따라서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허무한 일은 없습니다.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됩니다.
세상에 있는 신자는 물 위에 떠있는 오리와 같습니다. 물 속에서 살지만 물이 깃털 속으로 침투하지는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문학, 텔레비전, 라디오, 그리고 특히 광고 등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침투하는 세상의 태도와 표준과 사고방식과 윤리들의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그것들에 동화됩니다. 마침내 세상 사람들과 정말 아무 차이가 없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성도들이여!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스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일시적인 것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도피하거나 동화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의 헛된 것을 자랑하거나 그렇지 못해 우울해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은헤에 감격하여 오직 예수님만을 자랑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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