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하나님을 믿음
믿음에는 무엇인가 요술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사라지고 만사형통할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다. 이는 기독교적인 믿음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 있다. 사실 믿음 그 자체는 세계를 만들어 운행하시는 하나님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 사이에 살아있는 연결대로 작용할 때에만 효과가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리워졌는데, 이 칭호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존재했던 관계의 친밀성과 친숙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를 친구라 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관계의 근저에는 믿음이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첫 번째, 믿음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으로 시작한다.
창세기 12장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로 시작한다. 믿음은 진공 상태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이나 하나의 놀라운 느낌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니 그는 의탁과 믿음으로 반응했다.
믿음은 우리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시작한다. 믿음이 그 자체 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있는 것에 대한 반응이다. 반응할 메시지가 없는데 믿음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들려지는 것이다(롬 10:14-17).
두 번째, 믿음은 신자 각자에게 전해진 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부르신다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며 주도적인 이니셔티브는 하나님께서 발휘하신 것이다(요 1:12-13).
참된 믿음의 세 번째 측면은 믿음이란 하나님과 동행하기로 인격적인 관계에 의탁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창세기 12장 1-3절은 나와 너라는 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브람은 떠나서 가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루시고 복을 주시고 또한 그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순간적인 의탁이 아니라 하나의 관계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믿음은 단 한번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통해 반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한다는 것은 좋은 말이 못된다. 왜냐하면 결심한다는 말은 도움을 받지 않고도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작정한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보다 나은 표현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한다 이다. 성서적 믿음은 우리를 계속되는 지속적 관계로 불러 의탁하게 하며 그 관계를 심화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도록 요구한다.
제 2장 믿음과 생활
만일 믿음이라는 것이 단지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행하신 것에 대한 몇 가지 것들을 머리로 믿는 것뿐이라면 물론 이것은 너무나 쉬운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일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며 성령님께서 이를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실감할 수 있게 해주셨다면, 그리고 믿음이 한 발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어떠한 관계보다 더 깊고 계속적인 관계를 위해 일생을 주님께 의탁하는 것이라면 의롭게 되는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 해도 신자는 옛 생활방식으로 되돌아갈 수 없고, 뒤를 되돌아보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참된 믿음은 생활로 이어져 간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며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목적은 무엇인가?
첫째로 아브라함애개 있어서 믿음은 분리를 의미했다.
어느 정도의 분리가 요구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이전 생활과 현재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좌우된다. 죄악된 것은 애초부터 버려야 한다.
둘째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믿음은 그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을 의미했다.
믿음은 한 순간에 나의 마음과 삶을 의탁하는 결단일 뿐 아니라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을 향해 여행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셋째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이 그를 무엇인가를 이루실 실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리라(창 12:2).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의 반응을 하는 것은 우리를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만들어 달라고 우리를 그의 손에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을 향한 이와 같은 목적은 다른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믿음의 생활의 네 번째 국면은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시기로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받도록 되어 있는 축복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하시리라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살아있는 동안에 부자라는 평판을 얻었고 신분이 상당히 높은 사람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진정한 위대함은 우리가 그의 인격과 하나님과 그의 관계의 참 아미를 알게 됨으로써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새로 맺은 믿음의 관계의 다섯 번째 결과를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그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는 것이었다(창 12:2).
하나님의 참된 축복은 한 개인이 이기적으로 누리도록 주어진 적이 없다. 이미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실 것이다. 요한복음 7장 37-39절에서 예수께서는 목마른 자에게 와서 마시라고 청하고 있다. 그러나 자기에게 와서 마시는 사람이 스스로 만족하게 되리라고는 한 번도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의 원천이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믿음의 생횔은 우리를 하나님의 보호 밑으로 인도한다고 명시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동행하는 삶으로서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그의 생애 속에 무한한 팽창이 있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
제 3장 믿음과 두 개의 세계
새로 그리스도인이 된 초신자는 신앙생활을 얼마 하지 않아서 복음이 하룻밤 새에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주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우리는 다른 종류의 문제들을 새로운 방법으로 대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초신자 그리스도인은 곧바로 두 개의 세계에서 생활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의 세계는 모든 사람이 살고 있는 세계로서 여기에서 교회란 사람들이 소속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하나의 기관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또 하나의 세계는 영적인 실제가 지배하는 곳으로서 하나님께서 실제로 살아 역사하시며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위해 지으신 집단, 즉 그에게 합당한 예배를 드리도록 지음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 두 번째 세계를 경험하고 누리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
새로 믿음을 가진 초신자가 직면하는 두 번째 문제는 그가 새로 발견한 믿음과 친척 특히 자녀와의 관계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사람의 반응과 순종은 필연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연관되기 마련이다.
세 번째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두 개의 영역을 실감하게 하는 분야는 바깥 세상과 우리와의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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