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가 여행에 거추장스러운 짐을 너무 많이 가져간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의 여정에도 거추장스러운
짐 보따리를 끌고 다니는 경우가 있다.
우리 모두는 출생에서 시작하여 유년기와 사춘기를 거쳐 성인이 되기까지 짐 보따리를 주워 모은다.
이 보따리들은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나 다른 사람에게 받은 영향과 압력인데 우리의 성년기 삶 속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는 유년기에 받았던 영향력인 거추장스러운 짐 보따리에 많이 의존한다.
우리는 유년기의 구습에서 벗어나 성인이 되어야 마땅하다.
사도 바울은 이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그러나 어린아이와 같은 것들을 치워 버리지 못하고 살면서, 우리는 그것들을 짊어지고 다니려 한다. 그리고 이것은 종종 우리가 성인이 되는 과정을 방해한다.
이러한 어린아이의 태도는 성인의 삶 가운데 어떻게 드러나는가?
우리는 자라면서 우리에게 대한 어른들의 행동을, 어렸을 때 익혔던 행동 반응과 한데 어울려서 받아들이게 된다,
어린 시절에 받았던 부정적인 영향을 떨쳐버리지 않고 도리어 우리가 늘 상 경험했던 좋아하지 않는 방법을 사용해서
우리 자신을 키워나가게 된다.
싫든 좋든 간에 우리는 과거의 어린아이와 현재 성인의 성품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과거의 감정적 영향력에 의한 미성숙한 어린아이는 종종 우리가 매우 지친 상태에 있을 때나, 아플 때, 많은 압력을 받을 때, 너무 큰 책임을 느낄 때 혹은 위협을
느낄 때 나타난다.
그렇다면 성장한 어른이 갖추어야 할 인격과 행위의 요소는 무엇인가?
성인은 자신의 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의무가 있다. 결정을 내려야 하며, 자신의 생활에 책임감을 갖고 성인다운 행동을 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이러한 것들을 꽤 잘 해나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부분적으로 잘하고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많은 경우 그렇게 하기 힘들어한다.
우리 모두는 성인답지 못한 행동을 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스스로 결정을 내리기 힘들어하여 다른 사람의
인정이나 확인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사람의 경우 감옥에 갇혀 있는 것처럼 감정적으로 자유를 누리기 어렵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러한 연약함이 그들의 현재 삶 속에서 관계된 사람들과, 많은 경우 부모와 관련이 있다.
부모의 부정적 양육방식
- 지나친 강압형-
지나친 강압형의 부모는 자녀들에게 항상 지시하고, 감독하고, 훈계하며 자녀의 기억을 늘 상기시킨다. 이것은 자녀의 일을 쉽게 해주고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는 방법인지 몰라도, 그렇게 함으로 자녀가 스스로 관심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
- 과잉보호형-
'과보호형' 은 강압형의 반대이다 과보호형의 부모는 자녀의 요구나 떼를 쓰는 것, 충동적인 행동 등을 그대로
받아줌으로、자녀를 다스릴 힘을 잃게 되고 자녀는 규칙을 무시하고 오히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부모를 조종하려 한다.
이러한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허용하나 이것은 자녀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망치는 것이다.
이렇게 길들여진 자녀는 더욱더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고만 하며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이렇게 자라서 성인이 된 사람의 미성숙한 태도는 종종 그의 충동적인 행동에 의해서 파괴적으로 위장된다.
즉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고 마구 먹어댄다든지, 술과 담배를 과하게 한다든지, 정신없이 거리를 헤맨다든지,
쉽게 화를 낸다든지 하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행동으로도 나타난다.
-완전주의형-
'완전주의형' 은 보통 성공한 사람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성취 수준에 만족하지 못한다.
이 사람에게는 어떤 것이든지 결코 충분치 못하다. 완전주의자는 어디서 이런 것을 배우는가? 이것은 대개 조건적으로
자녀를 용납했던 가정을 통해서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그의 수준 이상으로 성취하기를 기대하고 그러한 기대가 충족될 때만 가치를 인정해 준다. 자녀는 이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죽도록 노력하고 성취욕에 지나치게 몰두한다.
그는 부모가 기대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느낌 때문에 자신이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항상 느끼지 못한다.
-무절제형-
자녀에게 필요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넘치도록 채워 주는 가정에서 생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녀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려하지 않은 채 자녀가 원하는 것과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부모가 무절제하게 일방적으로 채워주는 것이다.
수년을 이렇게 과도하게 공급해 주다보면 아이는 사물에 대해 싫증을 느끼고 독창성과 자발적인 능력을 잃어 무감각해진다. 그는 열심히 일해서 받는 대가가 어떤 것인지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일에도 꾸준히 지속적으로 인내하지
못한다.
그러한 어린아이가 커서 무절제한 어른이 된다. 자신의 비위를 맞춰주는 사람이 없으면 삶을 비관하거나 혹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비난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고 비위를 맞춰 줄 사람을 계속 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즉시 싫증내며 무감각하게 대하기 쉽다. 어린 시절에 익힌 유형이 다시 재현되는 것이다.
-체벌형-
'체벌형' 의 양육방식은 부모가 자녀에게 드러내는 표면적인 분노와 공격을 포함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종종 강압형과 완전주의형을 합친 형태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벌을 줄 때 스스로 정당하다고 느끼지만 대개 자녀의 행동과 태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분노, 좌절, 인내심의 부족 때문에 화를 내고 만다.
이렇게 부모에게 혹독한 취급을 받은 자녀는 벌을 정당화시키거나 혹은 벌을 자초하는 행동에 익숙해진다.
부모로부터 무관심과 혹독한 취급을 받은 아이는 성인이 된 후 보복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다른 사람과 즐거운 관계를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많은 경우 복수심을 갖기 쉽다.
반면에 부모가 자녀에게 애정을 표시하면서도 지나친 체벌을 함께 수반했던 경우는 후에 자녀가 성인이 되고 나서 자기
스스로를 비판하거나 죄책감을 갖는 경우가 있다.
-방치형-
'방치형' 은 부모가 자녀에게서 떠나 있거나 다른 일에 몰두해 있어서 자녀의 성장발달 단계에 관심을 가져주지 못할 때
생긴다. 어린 시절에 부모에게서 방치되었던 경험이 있는 자녀는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능력이 부족하다.
또한 자신이 어린아이였을 때 아무도 필요한 규칙의 한계를 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나 능력에 대한 한계를 스스로 규정하는 것이 어렵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필요한 자아정체감을 확립해 나가는 면에서도 어려움을 느낀다.
-거부형-
계속해서 거부감을 경험한 자녀는 부정적인 자아개념을 갖게 된다. 성장함에 따라 마음속에는 쓴 뿌리가 생기고
근심과 외로움과 무력감을 느끼며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지 못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너무 많은 책임을 지우는 것에서도 거부감이 형성될 수 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아이에게 어른이 져야 할 책임을 부과하는 경우가 있다.
그 결과 어린아이로서 누릴 수 있는 경험을 누리지 못한다. 그래서 마땅히 누려야 했던 상실된 경험, 즉 부모가 베풀지 못한 용납과 사랑과 칭찬을 그리워하게 된다. 성인이 되어서도 많은 책임을 떠맡으려고만 하고, 여유를 가지고 쉬든지 놀이를
하든지 생을 즐기든지 하는 것은 결코 배울 수 없다.
자신의 생활을 제한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삶까지도 구속하려 한다.
앞에 말한 이러한 것이 우리가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잘못된 부모의 양육방식과 가정의 환경요소 이다.
당신은 과연 어떤 부류에 속하는가?
과거의 어떤 경험이 오늘날 당신의 인격형성에 영향을 미쳤는가?
우울한 환경
어떤 가정환경은 자녀에게 우울증과 낮은 자존감을 갖게 한다. 이러한 우울한 가정환경을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합당치 않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안타깝게도 잘한 것에 대해서 칭찬과 격려를 해주는 대신 '무엇을 하면 안 된다'는 금기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우울한 분위기를 만들기 쉽다. 우울한 환경에서는 가족에게 필요한 긍정적인 요소가 채워지지 못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어른이든 아이든 자존감을 위한 격려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리고 개인의 자존감이 손상되거나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감정이나 갈등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그 결과 우울증이 생기는 것이 보통이다.
만일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에게서 계속적으로 공격을 받는 분위기 속에 산다면 우리의 감정은 상한 마음과 죄의식과
무기력함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과거를 이해하는 열쇠로써 기억에 남아 있는 것과 내적 어린아이가 성인이 된 당신의 감정과 태도에 미친 영향을 사용하라. 어린 시절을 좀 더 잘 이해하고 알기 위해서 이와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해 보라.
"나는 어린아이였을 때 정말로 어떠한 존재였는가? 나에 대한부모의 반응은 어떠했나?
부모가 내게 반응한 것에 대해 나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과거의 경험에 무겁게 짓눌리지 않고 현재의 삶을 사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는가?
아마도 아직 당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에 막혀 있는 것들을 뚫어 자유 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과거에 대한 더 큰
깨달음과 이해를 얻을 수 있다.
그러한 과거의 기억을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주님께 기도할 수 있다.
어린 시절에 다른 사람에게 받은 영향이 당신 속에 계속해서 남아 있는 부분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하라.
-과연 나도 변화될 수 있을까?
마음속의 문제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상담할 때 사람들은 거의 판에 박은 듯이 "내가 정말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3-24)고 말했다. 우리의 속사람이 새 사람을 입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로 우리 안에 살게 하셨기 때문에 새 사람을
입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맡겨야 한다.
이것은 폐기처분해 야 할 기억과 과거의 경험을 그가 간섭하셔서 처리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드린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우리는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났다.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
당신은 오늘 어떤 면에서 새롭게 되었는가?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생각이 현재의 삶 속에서 새롭게 되었는가? 고린도전서 2장 16절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서도 이와 같은 말씀을 찾아볼 수 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당신과 나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졌다. 이렇게 하나님의 지혜를 가졌다는 생각과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사실을 한데 묶어 보라. '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삶에 적용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도 가졌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고민하고 있는 것이 과거의 망령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것을 "옛사람"(롬 6:6)이라고 말한다.
옛사람에 속한 마음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의 성품을 갖게 되었다. 그
리하여 우리의 마음은 부정적인 생각과 근심과 두려움과 죄의식을 갖는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잊어버려야 할
경험을 기억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믿음을 가진 후에도 과거의 찌꺼기가 가시지 않은 채 남아 있어서 우리의 의지 감정,
생각 그리고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많은 사람이 아물지 않은 감정의 상처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 기억 속에는 여전히 상처가 남아 있다.
과거에 받은 영향은 실제로 나이가 들면서 증가된다. 나이가 들수록 자주 기억하기 때문이다.
삶은 어떤 면에서 우리의 기억이 비쳐져서 나타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현재 느끼는 기쁨, 분노, 슬픔, 만족 등의 감정은
그것을 불러일으킨 직접적인 사건보다는 우리가 그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의해 좌우된다.
그러므로 한 사건이 일어났던 때와 현재 사이에 공백이 길수록 사건의 진상이 왜곡될 가능성은 더 커진다.
- 고통스러운 기억의 치유
감정과 그것의 영향력은 기억과 연관되어 있다.
헨리 나웬(Henri Nouwen,)은 이렇게 말했다. "후회는 쓰라린 추억이며, 죄책감은 절망적인 추억이고, 감사는 즐거움으로 가득 찬 추억이다.
한사람이 살면서 겪는 고통의 대부분이 과거의 기억에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 보았는가? 이 기억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이것은 외로움, 불안, 두려움, 근심, 의심과 같은 감정으로 나타난다. 그 감정이 상처를 주는 이유는 대부분 마음속에
숨겨져 있다가 어떤 순간에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아픈 기억일수록 더 깊숙하게 감추어지고 억눌리게 된다. 그 감정은 잠재의식의 한 구석에 깊이 숨겨진다.
숨겨져 있기 때문에 치유받지 못한 채 남아있는 것이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만들어 놓은 방어기제를 치워버리고 아픈 기억을 직접 만나야 한다.
우리는 삶 속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 때문에 방어기제의 빗장을 풀어놓을 수 있다.
그는 성장과 행복의 두 가지 가능성을 주실 수 있다.
첫째, 해로운 기억에서 받는 영향을 없애 주심으로 과거의 생활양식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둘째,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사용하여 적극적으로 살 수 있게 도우신다.
하나님께 받은 선물의 가치를 안다면 우리의 치유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알게 된다.
우리는 기억장치에 저장된 것에 따라 반응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어떤 아버지는 집에 손님이 찾아올 때마다 자녀들에게
조급한 태도로 대했음을 알았다. 상담하는 가운데 자녀들에게 조급하게 대했던 이면에는 손님이 자신을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문제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 두려움 때문에 자녀들이 손님 앞에서 바른 태도를 보이지 못할까봐 마음을 졸였던 것이다.
이 두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과거에 경험했던 거부감의 기억에서 온 것이다.
.기억이 드러났을 때 주님께 먼저 할 일은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기억이 뼈아픈 것일지 몰라도 그 발견은 꼭 필요하다. 그것은 속박에서의 놀라운 해방이다!
자유를 누리는 첫걸음을 경험한 것이다. 지금 과거의 속박에서 자유를 누리는 좋은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의 노예가 되거나 혹은 자유하게 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롬 8:12).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성령 안에는 자유가 있다. 그것은 죄와 감정 그리고 과거의 기억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5).
그리스도를 향하여 사는 것은 온전히 사는 것이고 아픈 기억에 대해서는 죽는 것을 의미한다.
-천천히 조급하지 않게 하라
치유는 곧바로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몇 달 심지어는 몇 년이 걸릴 수 있다.
속에 묻어 놓은 것이 많을수록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건전한 치유이다. 우리는 한 번에 문제를 다 해결하는 능력이 없다.
모든 상처의 치유를 한 번에 경험하는 것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아픈 상처를 한 번에 하나씩 처리해 나갈 수 있다.
한 가지가 치유된 후에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 한 번에 하나씩 기억을 처리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때마다 새로운
방법으로 반응하고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찬양은 치유를 돕는다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요소는 바로 찬양이다. 하나님이 해놓으신 일이나 그분이 어떠한 분인지,
그리고 그가 미래에 하실 일에 대해 찬양을 드릴 때 우리는 삶 가운데서 꽉 붙들고 있던 것을 주님께 맡기게 된다.
해답이 없는 것 같이 보이고 문제가 풀리지 않으며, 움직이지 않는 높은 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그분을 찬양하라.
나는 이러한 어려운 상황과 결단을 내려야 하는 갈림길에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지금 나는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며 마음에 잔잔한 평안을 누리고 있다.
우리는 감사할 만한 사실이 눈앞에 보이거나 혹은 곤경 가운데서 벗어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있을 때 기꺼이
감사를 표시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어떤 분의 손에 우리의 미래를 맡기며 "이 문제에 관하여 어떤 것을 제게 주시든지
상관없이 나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충고를 거절하기 전에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는 말씀을 잠시 묵상해 보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찬양을 드리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당신에게 어떠한 분인가?
당신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생각은 당신의 존재가치와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삶에 기본적인 틀을 형성한다.
하나님에 관한 가장 적절한 정의는 수 십 년에 걸쳐 내려온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변한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그의 존재와
지혜와 능력과 거룩함과 공의와 선하심과 진리되심은 불변하다."
당신이 창조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큰 만족과 기쁨과 행복과 평안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은 그의 사랑과 선하심과 신실하심과 또한 우리 각 사람에게 보이시는 엄청난 관심에 대한 반응이다. 찬양은 지친 우리의 삶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주며 올바른 방향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도구가 된다.
당신이 너무 바쁘다고 생각할 때나 곤고할 때 그리고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을 때, 그때가 바로 찬양해야 할
시간이다.
잠시 멈추고 마음을 깨끗이 한 다음 하나님을 찬양하라. 다시 한번 새롭게 되는 것을 느낄 것이다.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미리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은 믿음이 있는 행위이다.
이것은 결과가 어찌됐든 하나님께 의뢰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찬양은 우리에게 주어질 응답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다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우리의 삶의 문제 해결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찾는 것이다. 찬양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치유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변화할 수 있다.
-숨겨진 상처를 치유하라
내가 상담한 많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자백하며, 용서를 구했고, 심지어 잘못에 대한 손해 배상까지 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용서했음을 지적으로 알지만 용서받았음을 감정적으로는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며 여전히 죄의식을 느낀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삶의 도전 앞에서 제일 처음 이렇게 반응한다 ".나는 그것을 할 수 없어." "그것은 내 머리로는 하기
힘들어." "내가 그것을 한다면 결국 실패하고 말꺼야." 그들은 가지고 있는 열등감 때문에 노력하지 않고 그것이 그들을
새장 속에 가두며 속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열등감을 느끼는 각 사람의 삶 가운데 존재하신다.
만약 과거에 어떤 사람에 대해서 불쾌한 인상을 가졌다면, 혹 그것이 유년기에서 온 것이라 할지라도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32)고 바울 사도는 권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정결하지 못한 생각 때문에 괴로움을 당한다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골 3:5-8)를 기억하라.
가끔 우리는 마음의 영상이나 생각을 하나님 앞에서 숨기려고 노력하지만 그것은 헛된 노력에 불과하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온전한 자아를 내어놓지 못하고 주님 앞에 이중적인 가면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은 정직을 원하시며
우리 자신의 진실만을 듣기 원하신다. 그는 우리의 생각을 다 아시지만 우리가 투명하고 정직하게 내딛는 발을 보시기 위해서 기다리신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필요함을 말해준다. 돕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기 원하신다.
-당신의 상처를 처리하라
상처를 인정하라
감정적인 상처에는 실망, 실패, 절망, 비통, 죄의식, 자기 거부 그리고 자기연민 등이 있다.
우리들 중에 감정적인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중 한 가지로 반응한다.
감정적으로 상처를 받은 사람은 흔히 고독한 가운데 상처를 드러낸다. 당신은 어린아이였을 때 다른 사람을 신뢰하는 것을 배웠어야만 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을 돌보는 사람들이 사랑을 주는 자가 아니거나 신실치 못하거나 혹은 당신을 돌보는데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다른 사람들을 신뢰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신은 조심스러워하고 의심하는 것을 배웠다.
당신은 외로운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지라도 여전히 혼자라고 느낀다. 자신을 감정적으로 고립시킴으로써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킨다. 위협감을 느낄 정도로 너무 가까이 오거나 친밀해지면 당신은 차라리 고립을 택하며 그 이유를 그들의 신실치 못함 때문이라고 다른 사람을 비난한다.
시편 142편 4절은 외로운 사람의 감정을 그림처럼 나타내 준다. "내 우편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자도 없고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아보는 자도 없나이다." 외로움이라는 감정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감정적인 교류의 단절을 가져오는데 계속적으로 상처받기를 자초하는 것이다.
감정 억제
고립과 외로움의 한 형태는 우리의 감정과 느낌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감정이란 우리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방법이며,
세상에 대한 우리의 반작용이다. 감정의 깨달음이 없다면 우리는 삶과 교통하는 일이 별로 없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감정으로부터 숨기 위해서 지성 속으로 도피해 버리는데, 생각이나 언어의 영역은 감정의 영역보다
고통이 덜하다. 감정은 매우 불안정해서 사람들은 자기 감정을 잘 신뢰하지 못한다.
감정적인 상처는 어떤 지적인 상처보다 더 크며, 희망과 에너지를 고갈시킨다.
그들은 머리로써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배우며,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사랑을 주고받는 능력이 제한된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뚜껑을 얼마나 단단하게 닫아두었던지 아무 감정도 자라날 수 없게 되어 두려움과 사랑, 평화, 기쁨 그리고 부드러움 등의 감정을 막아 버릴 수 있다.
지나친 예민
정서적인 성숙은 삶 가운데 일어난 일에 대해 비난할 대상을 찾거나 자기의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현재에 살면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당신이 어릴 때 인정을 못받았다면 자신의 가치감, 귀중함, 선함에 대한 느낌이 자라지 못하여 당신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게 만든다.
당신은 주변 세계를 향해 자신을 개방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며, 심지어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 놓는 것조차 힘들어한다. 당신은 어릴 때 적절한 양분을 섭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감정이 자라지 못하고 지나치게 예민하든지 혹은 감정적으로 닫혀 있는 상처를 가지게 된다.
자신의 삶의 근거를 감정에 두고 사는 과민한 사람은 감정으로부터 '의심'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 반작용에 대해 의아해 하며,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확인'하고자 하며, 인정을 받는 때에도 여전히 의심 속을 맴돈다.
과민한 사람은 자기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그는 쉽게 상처를 받는다. 심지어 단순한 의견 차이나 사소한 반대조차도 당황함이나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만약 과거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현재의 감정에 따라 온전히 살지 못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과거의 고통을 막아보려는 시도 속에서 우리는 또한 과거의 즐거움도 함께 막아 버린다.
긍정적인 기억들은 우리 속에 낙천주의자를 만들어 내지만 부정적인 기억들은 염세주의자를 만든다.
감정적인 빚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 연약한 존재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손을 내밀며,
시도해 보며,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말 당신이 마음을 닫게 하는 두려움인가 혹은 다른 어떤 것인가?
당신의 감정에 대해 열어 놓는다면 일어날수 있는 최악은 무엇인가? 그것이 지금의 경험보다 더 나쁜 것이겠는가?
고독하거나 슬프거나 상처를 받았다면 누군가와 감정을 나누라. 당신이 현재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미래에 대한 희망과
함께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수용하라. 과거의 경험은 변화될 수 없는 것이다.
의심이 많아지다
신뢰하는 능력이란 당신이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이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당신이 상처를 받기 쉽다는 것이며, 지속적으로
다소간에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당신이 어떤 형태로든 흥분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당신에게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면 머리 속에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당신은 정보나 사실들을 무시하지 않으며,
그것들을 주의깊게 검토하지만 비뚤어진 선입관과 미리 정해진 기대를 가지고 세상을 보게 된다.
의심이나 혹은 그것에 근거한 행동 양식을 버린다는 것은 당신에게 어려운 일이다.
지나치게 의심하는 버릇은 아무 이유가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생에 대한 이러한 반응의 씨앗은 아주 어린 시절에 뿌려졌을 것이며, 당신은 그 수확을 거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큰 씨앗을 심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의심스러운 생각이나 감정에 굴복할 때마다 즉각적인 어떤 감정이완을 얻게 되지만 당신은 그것이 당신을 더욱 단단히 묶도록 강화시킨다.
공포에 사로잡히거나 의심하는 것은 생각이 마비된 것이지만, 당신은 변화될 수 있다.
이것이 당신의 반복되는 모습이며 살아가는 최선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기꺼이 시인한다면, 여기 당신이 할 일이 있다.
먼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때 그것을 즉시 중단하라.
행동을 통해 당신이 성취하는 바가 무엇인지 결정하도록 노력하라.
모든 행동은 당신의 신념을 강화시켜 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당신의 행동을 멈추어라. 만약 문이 잠긴 것을 점검하고 있거나 다른 사람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내려고 애쓴다면, 속히 멈추어라. 당신의 기본적인 충동을 거부함으로써 확대해서 보게된다.
당신의 모든 생각과 느낌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드러나도록 적어서, 정직하게 대면하라.
이러한 제안의 목적은 당신의 두려움을 약화시키며 의심스러운 생각을 하는 경향을 감소시키기 위함이다.
처음에는 더 나쁘게 느낄 것이며 충동에 따라 행동하고 싶어질 것이다.
당신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아직도 효력을 발휘하는 옛날의 멧세지이다.
우울증
다른 형태의 상처는 우울증이다.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는 슬픔 속에서 산다.
슬픔은 우리로 하여금 사색적이고, 진지하며, 사려있고, 감사하게 하며, 충만한 삶을 위한 새로운 목적을 준다.
그러나 끊임없는 슬픔과 상실은 삶의 햇살과 기쁨을 빼앗아가며, 우울증에 빠지게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우울증에 빠지는 것은 잘못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다. 만약 우울증에 빠지는 것이 죄라면,
선지자 예레미야는 죄인 중의 괴수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의 기록 중 많은 부분이 우울한 상태에 있을 때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 가운데 어떤 요소들이 나타날 때 우울하도록 창조되었다. 그것은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줌으로써 스트레스와
긴장에서 잠시 숨을 돌리게 해 주는 단기적인 보호책이 될 수 있다.
우울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만드신 경고장치이다. 우리는 가벼운 우울증이나 슬픔의 상태에 있을 때 그 경고에,
주의를 기울여서 약간의 변화를 시도할 수도 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치유와 사랑스런 임재 속에서 기뻐한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시 18:28).(Richard F. Berg and Christine McCartney, 1981, p.162).
예수께서는 우리가 지고 있는 짐에 대해 용서와 자유를 선포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우울증에 빠진 사람의 느낌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여호와여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의 앞에 부르짖었사오니......대저 나의 영에 곤란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음부에 가까왔사오니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인정되고 힘이 없는 사람과 같으며 사망자 중에 던지운 바 되었으며 살육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다시 기억지 아니하시니......내가 소시부터 곤란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의 두렵게 하심을 당할 때 황망하였나이다. (시 88:1,3-5,15)
척 스윈돌(Chuck Swindoll)은 과거의 죄나 실패의 흔적을 가지고 사는 우리들을 위하여 위로가 되는 몇 마디 말을 해준다.
비록 당신이 그러한 추하고 쓰디쓴 날들을 자백하고 버렸다해도 지나간 과거를 완전히 지울 수 없다.
때때로 당신이 혼자 있을 때 과거는 마치 변덕스런 바다물결처럼 슬그머니 몰려와 당신을 휩싼다.
상처의 딱지는 격동하기도 하고 한동안 부드럽게 가만히 있기도 하여 당신은 그것이 없어질 수 있을지 의아해 한다.
비록 그것이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발각되어 거부당할까봐 두려움 가운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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